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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몬스 Mar 03. 2023

허리 요새에 새로운 적이 침입하였습니다

산 너머 비치는 햇살 속에서 걷는 기분이 좋다. 햇살을 보는 것은 눈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최후의 날에 마주하는 햇살은 그게 어떤 모습이든 달라 보일 테다. 세상에 비친 무엇이든 가슴에 아름답게 담을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꿈꿀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으니.


"다음에도 저번처럼 안압이 올라가면 실명이에요. 이미 많이 진행되어서 위아래로 안 보일 텐데, 이미 신경 죽은 거는 어쩔 수 없어요. 살아있는 건 지켜야죠. 약 잘 넣고 관리 잘하세요."


공고히 쌓아온 내 허리 요새에 예상치 못한 적군이 등장했다. 추간판 탈출로 인한 좌골신경 통증만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기에 제1의 통수권자인 허리의 명령에 따라 내 몸은 움직이고 있었다. 체계적인 지휘에 따라 규율을 철저히 지켜가며 괴롭지만 나름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하던 차에 내 요새에 반란군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허리 통증은 내가 하고 있는 세상의 모든 고민을 쓸데없게 만드는데 퍽 쓸모가 있었는데, 실명은 그 허리 통증마저 하찮게 만들었다. 믿지 않는 신에게 묻고 싶었다. 내게서 죽어가는 것은 무엇이고 태어난 것은 무엇이냐고. 휘청대며 한발 한발 걷고 있는 내게서 이제는 아예 앞을 볼 수 없도록 눈을 가져가려 한다. 겸허히 받아들일 저주인 건가. 땅에 바짝 엎드려 기어가야 하는 걸까. 결국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길인 걸까. 이 불행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 끝에 섰을 때 나의 모든 불행이 그럴만했었다고 이해하게 될 수 있을까. 함께 하는 삶을 나도 꾸려나갈 수 있을까. 창밖의 그들의 삶을 까치발을 들고 훔쳐보곤 했다. 그곳에 다가설 수 있을 거라 여겼던 내가 거품처럼 부서졌다. 살며시 까치발을 다시 내려놓았다. 내 불행이 좋아하는 이에게 옮겨갈까 무서워졌다. 무뎌지고 싶지 않았다. 불행을 기억하고 기억하여 내 슬픔이 언젠가 누군가를 안아줄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 다독였었다. 무뎌지고 싶다. 무뎌지고 싶지 않다. 무뎌지고 싶다.


*


"눈 빨개진 거는 신경이 터진 거야. 무슨 일 있었어요? 이건 뭐 1-2주면 없어지니까 괜찮은데.. 다른 게 문젠데.. 녹내장 진단받은 적 있어요? 백내장도 있고. 눈이 이렇게 안 좋은데 왜 관리를 안 했어요? 병원 안 다녔어요?"

"작년에 눈 정밀 검사받았는데 아무런 말 없었는데요."

"안 아팠어요? 안압이 40이에요. 정상 최고수치도 20인데, 2배야, 2배."


빡!

터지듯한 느낌이 들어 거울을 보니 눈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악!

어디서 피가 난거지. 빨간 피가 흐르지는 않았다. 단지 공포영화 주온의 주인공 토시오처럼 빨간 물감 풀어놓 보인. 뽕 국물에 스며든 나무젓가락의 색 정도쯤이었다면 오늘 유난히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넘어갔을 것이다.

잠시만!

이성을 차리자. 눈앞이 흐리고 어지럽다. 보이나. 안 보이지는 않는데 눈이 왜 이렇게 빨갛지. 일단 아예 안 보이는 건 아니니까 아주 심각한 건 아닌 것 같아. 내일 회사 갔다가 병원 가봐야겠다. 병원기다려야 해서 싫은데, 허리 아픈데. 어쩔 수 없지.

빡!

이번에는 뒤통수다.


스크린에 떠 있는 클로즈업된 시뻘건 눈이 보였다. 눈에 빨간색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말한다.

"여기 보이죠? 여기 시신경이 다 죽었어. 안 보이지 않았어요?"

"눈이 안 좋아지는 것 같아서 작년에 검사받았던 건데, 아무 이상 없다고...."

"시신경 죽은 건 다시 살릴 수가 없어요.... 나이가... 30대네. 젊네. 이렇게나 많이 진행되었는데 왜 몰랐을까. 있는 거라도 살려야지."

"양쪽 다 그래요?"

"응, 양쪽 다. 안압도 40, 39."

"안 보이게 되는 거예요?"

"이미 진행됐어."


손으로 큰 동그라미 만들었다가 점점 손을 모으며 작게 만든다.

"점점 눈이 닫히게 되는 거야.. 실명하는 거지. 시신경 중앙에 위아래가 신경이 다 끊어져서 없어요. 보통 주변부부터 시작되는데 환자는 중앙의 위아래가 끊겼어. 안 보였을 텐데.. 일단 약 써보고, 수술해야 돼요. 약 잘 넣어야 돼. 잊어버리지 말고."


눈을 잃을 순간에도 허리 걱정이 된다. 리석게도 재하는 랄한 적보다 바로 코 앞에 실재하는 성가신 적이 위협적이었다.

"혹시 수영장에 못 가 나요?"

"물안경 쓰면 안압 올라가니까 안 좋고, 눈을 만지면 안 되는데, 물이 있으니까 눈을 만질 수밖에 없어서 수영장에는 안 가는 게 좋지."

"그럼 운동은요? 제가 허리가 아파서 토요일마다 재활을 하는데 온몸에 힘을 줘야 해요. 숨 안 쉬어지는 강도로 운동을 하는데, 그건 되나요?"

"음.... 안 좋을 것 같기는 한데, 무거운 거 들거나 고개를 아래로 향하거나 그런 게 있으면 하면 안 됩니다. 힘을 얼마나 주는지 모르겠는데 일상적으로 하는 운동은 괜찮아요. 대신 무거운 거 들면 절대 안 돼."

"뜨거운 물로 샤워하거나 찜질하는 건 괜찮아요?"

"그것도 안 돼요. 시신경을 활성시킬 수 있어서 찜질은 하지 말고 샤워는 미지근한 물로 잠깐씩 하세요."

"아.... 네."

"약 꼭 잘 넣고 다음 주에 봅시다. 약 잘 넣어야 돼."


눈을 감은 채로 빨간 적외선 치료기를 쐬면서 실감한다. 아니, 실감이 안 난다. 방금 무슨 대화를 나눈 거지. 내가 눈이 안 보일 수도 있다는 얘기를 한 건가. 잠깐만. 눈이 터져 빨개서 온 건데 갑자기 녹내장, 백내장은 뭐고, 실명은 뭐지. 제정신이 아니었다. 회사를 다녀와 1시간 30분 대기 후 받은 진찰이라 기운은 기운대로 없고, 눈은 눈대로 피곤하고, 허리는 허리대로 말썽이었다. 목소리에 힘이 안 들어가서 놀란 기척도 낼 수가 없었다. 리서  마음의 균열 소리가 들려왔다.


병원 앞 횡단보도에 멈춰 섰다. 빨간 불이다. 늦어서 더 빨리 가야 하는데 빨간 신호에 계속 걸리는 날이 있다. 반대로 유난히 신호에 걸리지 않고 가는 날도 있다. 막힘 없이 길을 지나는 날에는 뭐든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내가 잘하거나 못해서 그런 일이 생기는 건 아니다. 하필 벌어진 거다. 내 눈이 이렇게 된 건 하필 그런 일이 생긴 거다. 나는 그냥 하필 빨간 신호에 걸린 거다.  


허리를 침대에 뉘었고 눈을 감았다. 외출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찜질기부터 켰다. 그 위에 철썩 붙어 허리를 지지 몰려오는 안도감로 샤워를 하곤 했다. 바로 어제까지 보듬었던 감정이었는데 한순간에 수구에 흘려보낼 추억이 되었다. 찜질기와 뜨거운 물 샤워 없이 허리 통증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대책을 세워야 했다. 은 이렇게 또 허리에 변화를 가져왔다. 

평소에도 다른 질병을 조심하고 조심다. 가만히 있어도 아픈 허리가 다른 질병과 엇갈려서 오는 무질서한 통증은 줄이고 싶었다. 감기 걸리면 기침할 때마다 허리가 울려 아플 수 있으니 조심다. 변비에 걸리면 허리에 더 힘을 써야 하니 먹는 양과 음식에 신경 썼다. 생리통이 올 때는 몸을 사렸고, 발목이 아파서 걷지 못하게 되수영장에 가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 했다. 사소한 적들침입할 수 없도록 방어하고 방어했다. 다른 곳은 더 강해야만 했다, 약한 허리가 견딜 수 없을 때면 다른 부위로 내 몸을 지탱해야 했으므로.


눈이 안 보이게 되면 무엇에 의지해 살아가야 할까. 침묵이 흘렀다. 왜 몸과 마음이 퇴화하는 속도가 같지 않은 걸까. 회복될 거라는 희망은 헛된 꿈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구름 뒤에서 서서히 실체를 드러낸 것은 빛이 아니라 맹렬한 어둠이었다. 좋아하는 책과 영화를 못 보면 무슨 낙으로 하루를 보내지. 혼자 지낼 수나 있을까. 어떻게 요리하고, 어떻게 씻고, 어떻게 걷고,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할까. 허리가 바꿔놓은 삶을 받아들이는데도 몇 년의 세월이 걸렸는데, 눈이 바꿔놓은 삶을 내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눈이 먼 속박의 삶은 가늠도 되지 않는다. 허리는 외부 세계의 문을 닫아버리긴 했지만 혼자 생활가능했다. 외로움과 통안에서좁은 세계의 경계선을 조금씩 넓혀가며 안온한 재미를 찾았다. 눈은 차원이 달랐다. 한쪽 눈이 아니라 양쪽 눈이 모두 그렇다고 하니 더 막막했다. 끝이 없는 터널 속을 걷고 있지만 언젠가는 끝이 날 줄 알았는데 정말 글자 그대로 깜깜한 어둠 속에 갇히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두려움이 내려앉았다. 운다고 해결되는 일은 없었지만 눈물이 났다. 비집고 나오는 눈물을 아까 넣은 안약이 희석될까 봐 꾸역꾸역 참았다.


아무 일 아닐 거야. 일주일 후에 괜찮아질 거야. 눈이 빨개져서 알았으니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실명한 채로 알게 되었을 거야. 지금 있는 거라도 지키면 될 거야. 나는 지킬 수 있어.


누군가를 안고 싶어졌다. 사랑하는 누군가의 눈, 코, 입을 만지고 싶었다. 바라보고 싶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곳에서 살아나는 감각들을 느끼고 싶었다. 벽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차갑고 판판했다. 다음에 이사할 때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점자표시가 끊기지 않는 도로가 있었던 곳이 어디인지 머릿속에 기록된 정보를 매만졌다. 수영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주쳤던 선글라스를 낀 아저씨를 떠올렸다. 1-1번 칸 문 앞에서 한 손에는 경전철 손잡이를, 다른 한 손에는 흰 지팡이를 잡고 서 있던 모습, 새말역에 내려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으로 내려가시던 모습이 차례로 그려졌다. 그 태연한 뒷모습이 만들어지기까지 어떤 과정을 지나왔을까. 어떤 행복으로 어두운 과거를 어내을까. 아저씨가 더듬어가는 미래는 무엇일까. 이어지는 생각이 무거워 그만두었다. 의사 선생님이 무거운 건 들지 말라고 당부하셨으니까. 무거운 건 참을 수 없이 위험하니까. 그토록 좋아하던 눈이 햇살이 눈부신 봄날에 내리고 있다. 검은 눈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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