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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함이라는 이름의 장막

사람들은 정말 진실을 원할까?

by 쿤스트캄

사람들은 정말 진실을 원할까?
솔직하게 마음을 고백하는 것이 진정한 관계로 이어지는 길일까?
나는 늘 그렇게 믿어왔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결국 신뢰를 얻고, 관계는 그 진정성 위에서 자란다고.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관계의 온도에 따라, 친밀도의 정도에 따라,

솔직함은 ‘정직함’이라는 다른 얼굴을 쓰고 등장했다.
그 두 얼굴 사이의 거리만큼 나는 종종 헷갈리고,

때로는 불편했고, 때로는 상처를 보았다.

솔직함은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생김새로 나타난다.
어떤 때는 자기보호를 위한 방어기제로 튀어나오고,
어떤 때는 상대에게 폭력처럼 느껴지는 칼끝이 되기도 한다.
이 사실을 몸으로 느끼고 나니, 나는 솔직함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잘 모르겠다.


유년 시절의 나는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는다’는 문장을 삶의 원칙처럼 품고 살았다.
솔직함은 자랑이었고, 무기였고, 나 자신을 가장 건강하게 지키는 방식이라고 믿었다.
심지어 뒤끝 없다는 말을 들으면 속으로 미묘한 기쁨까지 느꼈다.
그런데 지금은—질문이 주어졌을 때 정말 대답하는 게 맞는지조차 자신이 없다.


모르면 모른다, 생각해 본 적 없다, 밝히고 싶지 않다면 밝히지 않는 것.
예전의 나는 이런 회피를 ‘못난 행동’이라고 단정했다.
하지만 지금은 묻는다.

그 단정은 너무 단순했던 건 아닐까?
때로는 애매함이, 침묵이, 거리를 두는 말투가

상대를 배려하는 방식이 될 수도 있는데.


얼마 전, 누군가 내게 찾아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묻고,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 끝없이 털어놓았다.
그는 떠밀리듯 그 속에 쏟아지는 감정들을 마주하고 있었고,

나 역시 그 감정을 조우하며 단어들을 꺼내어 펼쳐 보였다.


그 순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맞았던 걸까?
아니면 솔직한 의견을 말하는 게 옳았을까?
진심을 말해도 상처가 되고, 침묵해도 상처가 되는 상황에서
솔직함의 기준은 대체 어디에 두어야 할까.

이제는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세상은 낯선 이들에게 너무 많은 진실을 쉽게 요구하면서도,
정작 가까운 사람들에게 진심을 꺼내는 일에는 장막을 친다.
그 장막을 걷고 들어온 사람에게만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 더 현명한 걸까?
아니면 장막을 들추는 그 자체가 불필요한 노출일까?


내 말속에는 분명 모순이 있다.
그 모순은 혼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관계를 살아내는 사람들이 매일 마주하는 자연스러운 진실일지도 모른다.

솔직함은 여전히 중요하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솔직함은 던질수록 빛나는 보석이 아니라,
관계의 온도를 읽을 줄 아는 사람만이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섬세한 도구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오늘도 스스로에게 묻는다.
솔직함은 언제 나를 지켜주고, 언제 나를 해치며,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어디부터가 무기인지.


그 물음 속에서 나는 찾고 싶다.
좀 더 조심스럽고, 좀 더 성숙한 방식으로
누군가에게 진실을 건네는 방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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