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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낼 수 있을까

바스러진 몸, 그 후

by 쿤스트캄

지난주 비가 몇 차례 쏟아지더니 창밖으로 보이는 잎사귀가 진한 초록으로 물들었다. 봄을 밀어낸 하늘은 두둥실 구름을 삼켰다.


보통의 사람들이 날씨가 따뜻하다, 덥다 등의 표현을 할 때 그렇다고 말할 수 없었고 오히려 춥다고 느꼈다. 병원을 가는 오늘에서야 눈부심과 따뜻함을 공감했다.

꽤 오랫동안 펭귄처럼 걸어 다녀서 그런 걸까. 오늘 뵌 기사님은 내가 어디에서 타고 어디에서 내리는지 모두 기억하고 계셨다. 그리고 편안한 하차를 도와주셨다. 날씨요정과 버스요정이 데려다주는 길은 모두 따뜻했다.


매번 택시를 타기에 민망한 거리에 있는 병원을 가기 위해 벌이는 시간과의 눈치싸움은 치열하다. 편하게 앉아서 가기 위해 출퇴근 시간, 등하교 시간, 아이들이 많이 다니는 시간, 어머니들이 장을 잔뜩 보고 버스를 타는 시간 등. 근래 가장 많은 눈치를 보면서 살고 있고 이는 유쾌할리 없다.


오늘 따뜻한 버스기사님을 만난 건 사실 기적에 가까운 엄청난 행운이었다. 그래서 최근 겪은 현실이 더 냉혹하다 느꼈다. 다음은 지난 스무날 넘는 기간 동안 겪은 공간과의 눈치 싸움이다.


시간과의 눈치싸움에 실패할 수밖에 없던 어느 날이었다. 지하철은 사람이 가득했다. 빠른 하차가 아닌 칸에 몸을 실었다. 교통약자석에 가까운 곳에 몸을 세웠다. 자리에 앉기를 기다리는 어르신들의 눈치를 보며 한 발은 쭉 뻗은 채, 다른 한 발은 늘어난 무게를 지탱하며 정신승리로 버티고 있었다. 바로 앞에 자리가 생겨서 앉으려고 하자 승차하신 악작 같은 어르신에게 빼앗겼다. 멀쩡해 보이는 젊은 여성인 나는 슬펐다.


한 번은 아이 둘과 외출한 아버지가 서있었다. 노약자석을 남매로 보이는 아이들이 번갈아가면서 앉아가는 걸 보고 처음에는 앉아있는 꼬맹이가 부러웠지만, 시간이 지나니 왜 노약자석에 있나 싶었고, 이후에는 어린아이들이 타면 양보해 주던 과거의 일반구역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국인 여행객을 제외하고 서울에서는 유모차를 가지고 지하철을 이용하거나 아이들과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는 경우는 보기가 쉽지 않기에 그 아버지는 그런 선택을 한 걸까. 한발 버티기 고수가 될 때쯤 목적지에 도착했다.


노약자와 장애우를 위한 엘리베이터 역시 이용하기 호락호락하지 않다. 보통은 닫힘 버튼 작동이 불가능하고 이는 빠르게 닫혀서 다치거나 불편을 겪는 이용자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보통은 가만히 있는 경우가 다수다. 세네 발자국 거리남짓 엘리베이터가 닫힐 수도 있다는 생각에 올라가는 표시를 누르고 안전하게 탔는데, 버튼 눌렀다고 혼이 났다. 그러더니 닫힐 거 같으면 열림표시를 누르지 않겠냐며 역정을 내셨다. 같이 타고 있던 아주머니 두 분의 강력한 눈빛도 생생하다.


그날 이후 나는 이동할 일이 생기면 운전기수가 되어주는 주변사람들과 함께 다닌다.


아픈 사람도, 장애우도 생각보다 많이 있다. 하지만 잘못된 시선과 인식 그리고 개인주의로 인하여 함께의 가치는 기업문화프로그램이나 봉사단체활동을 제외하고는 일상에서는 점점 보기가 어렵다.


출입문이 열리고 어르신이나 몸이 불편해 보이는 사람이 타면 엄마 무릎 위로 올라가서나 서서 목적지까지 이동한 유년시절을 꺼내봤자 현실성 없는 옛날옛적이야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 저출생과 고령화로 일반구역이 노인석으로 바뀌고 지금의 교통약자석이 어린이석(금쪽이석)이 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우스갯소리가 들리는 지금이다. 하지만 적어도 언젠가 있을 상황에 배려받고 싶다면 눈과 귀를 더 이상 막아서는 안된다. 주변을 더 살피고 행동해야 한다.


해낼 수 있을까. 나도 내 옆에 앉은 사람도. 우리 모두마이다. 치유가 희망이 되기를 바라본다


* 맞춤법 검사를 마치고, 한 가지 확인을 했다. 노약자석이라는 표현이 교통약자석으로 바뀐 지 올해로 20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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