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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것이 아니고 틀린 것

독일, 베를린 장벽의 살아있는 벽화를 보며

by 숲속의조르바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다는 학교를 나왔다는 분들이, 가장 똑똑하다는 분들이 맞선 편에 서서 정면으로 싸우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동문 선후배이거나 친구일 것이 분명한 여럿이 심판석에 앉아서 꽤 오랫동안 대치하고 있다.


똑똑한 양반들이 어찌 저리 정반대의 입장에서 싸우고 있을까?


그들이 싸우는 것은 단지 어떤 명확한 진리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어쩌면 서로 다르게 정의된 정의를, 혹은 정의로 포장된 권력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중립적 입장에서 이 상황을 보기는 꽤나 힘들고 물론 나도 명확하게 한쪽으로 치우친, 반대편에서 보기에는 틀린 곳에 서있는 사람 중 하나다.



이 난데없고 어이없는 싸움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 있다.


한때, 그리고 여전히 나와 의견이 다르면 그것을 틀린 것으로 말한다.

절대적 진리가 아님에도 나와 의견이 다르면 틀린 것이다. 정치적인 논쟁, 종교적 견해가 주로 그렇다.


[틀린 것이 아니고 다른 것이다]라는 말이 언제부턴가 회자되면서 다양성과 소수가 존중받는 분위기가 생겨나는 것도 같다. 다행이다.


그렇지만 저 말이 회자될수록 틀린 것을 다른 것으로 합리화하는 방패로도 쓰이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봐도 틀린 것은 틀린 것이지 [다른 것]으로 설 수 없다. 분명 다른 것이 아니고 틀린 것이다.


흑백논리, 양비론, 극단적 집단 광기, 혐오가 빚어낸 [다름]이 넘친다. 사고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진실을 밝혀 억울함만이라도 풀어달라며 곡기까지 끊어가며 몸부림치는 공간 옆에서 치킨과 피자, 어묵을 먹어 대는 자들도 자신들이 틀린 것이 아니고 다름이라 말한다. 명절이면 정치적 견해로 가족끼리도 심하게 싸우는 것도 심심찮다. 가족끼리도 이런데 거리의, 모니터 뒤의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은 당연히 더할 수밖에 없다.



< 독일, 베를린 이스트사이드갤러리, 2014 >

독일의 통일을 기념하면서 분단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에 다양한 예술가들이 작품을 그린 이스트사이드갤러리 프로젝트가 있었다.


그중에 저 손바닥이 찍힌 벽이 좋아서 2006년과 2010년 그리고 2012년에 찾아 갔었다.


1킬로미터가량 도로가의 콘크리트 벽에 그려진 작품들이기에 오가는 사람들의 낙서와 자칭 예술가들의 덧칠이 자연스럽게 더해졌다.


수많은 낙서와 덧칠, 덧댐이 있었음에도 다양한 손바닥이, 통일을 바라던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을 담은 듯한 손바닥의 콘셉트는 변하지 않았다.


다르되 틀리지 않은 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와 비슷한 예로 체코 프라하의 존레넌 벽이 생각난다. 공산주의 시절 체코의 젊은이들은 존레넌의 Imagine의 가사처럼 사상적, 체제적, 종교적 한계가 없는 자유를 꿈꾸었는지 강가 으슥한 뒷골목의 담벼락에 그림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이 벽은 단 하루도 같은 날이 없다. 새로운 메시지를 남기고 덧대고 하면서 저항과 자유와 꿈을 그대로 그리는 모두의 도화지가 되었다.


저항의 상징이던 이 벽은 차츰 어느새 신념이 다른 자들의 테러공간으로 변질하기도 했다. 온통 시뻘건 페인트로 덮이기도 했다. 베를린의 벽과 다르게 가장 기본적인 가치에 대한 존중이 없는 행위다. 그런데 그렇게 시뻘겋게, 시커멓게 벽을 도배해서 테러했던 자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다. 그 벽은 살아있는 벽이다. 아무리 가리려, 숨겨 덮으려, 죽이려 하려 해도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2010년과 2016년 프라하의 벽은 같은 곳 하나 없이 달랐고 언젠가 그곳을 가더라도 모든 것이 새로울 것이다. 그리고 그 어느 한 구석에는 레넌의 얼굴이나 피스마크(☮), Imagine이 분명 쓰여 있을 것이다.




2025년 대한민국의 광장은 여전히 두 패로 나뉘어 있다.


나름 지식인이라던 사람들이, 종교인의 탈을 쓴 자들이 시뻘건 페인트를 뿌려댄다.


그렇지만, 이제껏 우리가 그랬듯 틀리지 않은 바름이 다시 곧 서리라 믿는다.





#베를린장벽 #존레넌벽 #프라하 #틀린소리도정성껏 #저는틀린게아니고다른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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