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물이 안 되는 게 아니라, 나에게 안 되는 나물이 있는 것
저는 크론병 환자에요. 크론병을 얻은 초반에는 '크론병 환우 카페'라는 곳을 가입해서 정보를 많이 얻었어요. 아플 때 먹을 수 있는 음식, 자신의 몸이 나아진 후기 등 실생활에 도움이 되고, 희망을 주는 정보가 꽤 많았어요. 저도 나름의 고민을 올리기도 하고, 가끔 제약회사에서 진행하는 이벤트로 크론병에 도움이 되는 영양제를 얻기도 했고요. 하지만 카페에서 읽은 것 중에 무서운 것도 있었습니다.
'아주 무서운 나물 괴담'이었어요.
어떤 크론병 환우가 명절에 고사리를 먹었는데요. 하루종일 배가 너무 아팠다는 거예요. 결국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응급실을 갔는데, 세상에... 그 고사리가 입으로 다시 나왔다는 거예요. '설마...'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이야기지만, 저는 비슷한 경험이 있거든요. 크론병 진단받기 전, 아무것도 모를 때의 경험이에요. 건강해지려고 아침에 현미밥을 지어서 먹었어요. 근데 하루종일 속이 불편하더니, 오후부터는 배가 너무 아팠어요. 늦은 밤에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병원에 갈까 고민하던 중, 화장실에서 구토를 했는데... 아침에 먹은 현미들이 그대로 쏟아졌어요. 그때 알았죠. "나는 현미처럼 거친 음식은 소화시키지 못하는구나" 현미밥을 같이 먹은 다른 사람들은 멀쩡했거든요.
크론병 확진을 받고, 식생활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얻은 뒤 '나물'은 아예 포기하고 살았어요. 그냥 먹으면 안 되는 음식처럼 대했죠. 식당을 가도 고기 위주로 먹고요. 어쩔 수 없이 비빔밥을 먹을 때면, 무나물과 계란 정도만 비벼서 먹었어요. 크론병 초기이고 아직 아픈 몸이니 괜한 도전이 싫었던 거죠.
근데, 약도 잘 먹고 몸관리도 잘하고 어느 정도 건강해지니 이유 모르게 나물을 먹고 싶더라고요. 그때부터 저의 '나물 도전기'가 시작됩니다.
나물 중에 최고, 콩나물 도전기
가장 만만했던 나물이 콩나물이었어요. 나물 특유의 향도 없고, 어릴 때부터 콩나물 국밥을 유독 좋아했고요. 콩나물은 어느 양념과 버무려도 맛있잖아요. 그래서 처음 시도했던 나물은 콩나물이었어요.
아내와 낙지볶음 집을 갔어요. 살짝 매콤한 음식이 먹고 싶기도 했고요. 낙지볶음에 콩나물을 조금 먹어보면 어떨까 싶은 마음에서였죠. TV에서도 많이 나오는데 늘 맛있어 보여서 먹고 싶었거든요. 물론 가기 전 몇 주 동안 아픈 적도 없었고, 평소 먹던 식사도 다 그대로인 상태로요. 아내 말에 따르면 혹시라도 아프면 원인을 명확하게 알 수 있어야 한다고 했거든요.
낙지볶음과 콩나물은 따로 나왔는데요. 저는 제가 먹을 콩나물을 덜어서 가위로 잘게 잘랐어요. 그럼 조금이라도 소화가 잘 될까 싶어서요. 오랜만에 먹는 매콤한 낙지볶음과 아삭한 콩나물 그리고 고소한 김가루에 이성의 끈을 놓친 저는 과식을 하고 말았어요. "우와 잘 먹었다. 이제 콩나물 먹어도 배 안 아픈가 봐!"를 외치며 식당을 나섰는데요. 그날 밤 배가 너무 아파 죽는 줄 알았습니다. 아직도 모르겠어요. 낙지가 너무 매웠는지... 콩나물 때문인지... 그 뒤로 몇 년은 콩나물 먹을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내의 고향 전주는 '콩나물 국밥'이 유명한데요. 함께 전주를 가면 저는 모든 콩나물을 아내에게 주고, 알량하게 남은 국물과 밥만 먹었어요. "내 언젠가 콩나물을 먹고 말리라!" 생각하면서요. 그리고 시간이 흘러 최근의 이야기인데요. 최근 내시경 검사 후 '염증'이 없다는 소식을 듣고는 다시 콩나물국밥을 도전했어요. 그랬더니? 배가 안 아프고 너무 맛있더라고요. 그 뒤로는 콩나물 불고기도 먹고, 콩나물 무침도 먹고, 아주 틈만 나면 콩나물을 먹고 있습니다 :)
도라지와 더덕, 눈에 보이는 섬유질이지만
어릴 땐 두 가지 모두 안 먹었어요. 그런데 대학 다니며 우연히 채식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어요. 그곳에서 잘 팔리던 메뉴 중 하나가 '더덕/버섯구이 덮밥'이었고요. 더덕과 버섯을 빨간 양념에 버무린 뒤 구워서 현미밥과 먹는 메뉴예요. 근데 그때 더덕을 먹어보니 진짜 맛있더라고요. 그 뒤로는 기회가 생기면 더덕구이는 꼭 먹었죠. 도라지는 새콤한 무침으로 종종 먹었는데, 그 알싸함이 왜인지 상쾌해서 종종 먹었고요.
하지만 크론병이 생긴 이후 두 가지 나물 모두 쳐다보지도 않았어요. 가끔 마트에서 도라지 모습만 보여도 '저 섬유질이 내 배를 긁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죠. 근데요. 이상하게 이 두가지 나물은요. 몸이 아플 때도 먹었을 때 문제가 없었어요. 부모님 집에서 엄마가 만들어 놓은 도라지 무침이 너무 맛나보여서 '에라 모르겠다'하고 먹었는데 멀쩡했고요. 더덕구이도 먹어도 멀쩡하더라고요.
주치의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게 맞았어요.
"어떤 음식은 먹어도 되고 어떤 음식은 안된다 이런 건 없어요. 몸이 안 좋을 때는 어떤 음식이든 주의해야 하지만요. 몸이 건강할 때는 이것저것 조금씩 시도하면서,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먹을 수 없는 음식을 구분해 놓는 게 좋아요. 그러니, 건강할 때 여러 가지 음식을 조금씩 먹어보면서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알아두세요."
저는 도라지, 더덕은 잘 먹는 크론병 환자네요 :)
나물 아니고 옥수수잖아... 너 왜 그러는 거야
옥수수는 어릴 때부터 진짜 좋아했어요. 부모님과 피서 가는 길에 차 안에서 먹던 삶은 옥수수도 참 맛있었고요. 통조림으로 파는 캔 옥수수도 너무 좋아했어요. 앉은자리에서 캔 옥수수 한통을 다 먹을 수 있는 건 물론이고, 횟집에 가도 밑반찬으로 나오는 옥수수를 더 좋아했을 정도였어요. 근데 크론병을 얻은 뒤로 옥수수를 먹을 일이 없었거든요. 그땐 몰랐죠. 크론병을 얻은 뒤로 옥수수를 먹으면 아프게 될 줄은요.
작년에 아내와 치앙마이에서 한 계절을 살았어요. 그땐 내시경 검사 결과도 좋고, 주치의 교수님도 잘 다녀오라 하셨고, 몸 상태도 최상이라 "드디어 크론병 환자인 나도 장기 해외여행을 갈 수 있다!"라는 자신만만한 마음으로 출발했죠.
음식도 입에 잘 맞았어요. 특히 돼지고기 바질 볶음 덮밥인 '팟 카파오 무쌉'이 맛있었고요. 팟타이, 고기국수, 카오소이, 모닝글로리 볶음 등 모든 음식을 먹을 수 있었고 다 맛있었죠. 그리고 태국에는 태국 김치라고 해야 할까요? '쏨땀'이라는 음식이 있어요. 엄청 질긴 파파야를 채 썰어서 태국 양념에 버무린 겉절이 같은 음식인데요. 살짝 걱정했지만 쏨땀마저도 너무 맛있고 멀쩡하더라고요. 기고만장해졌죠.
쏨땀 맛에 푹 빠진 저는 쏨땀 전문 식당을 찾아서 아내와 함께 갔어요. 그곳에는 파파야 쏨땀 외에도 다양한 쏨땀이 있었어요. 그중 저는 옥수수 쏨땀을 시켜서 먹어봤는데요. 정말 맛있더라고요. 굉장히 맛있는 콘 샐러드를 먹는 기분이랄까요? 그렇게 식사를 맛있게 하고 숙소에 왔는데, 어라. 조금씩 배가 아프기 시작했어요. 그리고는 이틀 동안 숙소에서 진통제를 먹으며 누워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저는 한국에서도 초당 옥수수를 먹고 호되게 아픈 경험이 있었거든요. 근데 태국에서도 옥수수를 먹고 또 아픈 거예요. 저는 아무리 건강해도 옥수수는 먹으면 안 되는 몸인 걸까요.
그렇게 이틀을 앓은 뒤, 교훈을 얻었습니다. 옥수수는 먹지 말자.
저는 제 몸에 관해선, 제 감을 믿는 편이에요. 여전히, 아직도, 고사리는 먹지 못할 식재료예요. 보기만 해도 먹고 싶지 않고, 먹으면 아플 것 같은 생각이 들거든요. 그건 현미도 마찬가지고요.
무엇이든 다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해요. 음식을 먹고 아플 때면 "왜 나만 이럴까?"라는 원망이 들기도 하고요. 하지만 언제까지 그 기분으로만 살 수 없기에, 저는 나물에 계속 도전했고 이렇게 '나물 도전기'를 쓰고 있어요.
크론병은 제 인생의 족쇄 같았어요. 정기적으로 병원을 가야 하고, 매일 약을 챙겨야 하는 등의 일들은 확실히 큰 족쇄죠. 하지만 이제는 그 안에서 행복을 찾고 있어요. 크론병을 잘 관리하면서 안정하고 건강하게 즐길 수 있는 삶, 그게 제가 바라는 일상이에요. 크론병이나 다른 질환으로 고통받는 모든 분들이, 지금은 힘들더라도 앞으로 있을 자신만의 행복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저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게 건강하게 살면서, 또 건강하게 사는 이야기를 앞으로도 열심히 써 볼게요. 우리 같이 응원하면서 행복하게 살아요 :)
▶ 본 브런치북에는 제가 겪은 크론병과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 몰라서 아팠던 저의 경험이 다른 분들에게는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되는 이야기를 좀 더 편하게 보고 싶으시면 브런치북/작가 구독을 부탁드릴게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