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하면 흡수를 해야 보약이 되거든요
과일은 보약이야
어릴 때는 아침에 일어나면 아빠가 꼭 사과를 입에 넣어주셨어요. 눈 뜨자마자 입맛도 없는데 이게 무슨 보약이냐며 짜증은 냈지만, 입은 사과를 우적우적 씹고 있었어요. 배탈이 자주 나기 시작한 고등학생 때는 좀 더 업그레이드가 되었어요. 아빠가 직접 키운(?) 유산균으로 만든 요거트에 사과와 꿀을 넣은 과일 요거트. 아빠의 요거트는 좀 시큼했지만 사과와 꿀을 곁들이면 꽤 맛있는 아침이 되었어요. 생각해 보니 저의 어린 시절은 항상 아빠가 챙겨주신 기억으로 가득하네요.
저희 부모님은 과일을 참 좋아하세요. 지금도 부모님 댁에 가면 냉장고에 김치와 맥주 그리고 제철과일은 항상 있어요. 특히 엄마가 유독 과일을 좋아하셔서, 해마다 직접 찾아가는 포도농장이 있으실 정도죠.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면 저희 집에는 포도향이 가득했어요. 엄마는 항상 말씀하셨죠. "난 밥대신 포도만 먹으면서 살고 싶다."
이렇듯 과일을 사랑한 부모님 덕분에 크론병 진단을 받기 전 제 삶에는 항상 과일이 함께 했어요. 하지만 크론병을 진단받은 후에는 선뜻 과일을 먹지 못했어요. 과일은 보통 날 것으로 먹고 은근 섬유질이 많잖아요. 그래서인지 먹고 싶단 생각이 잘 들지 않더라고요.
과일이 있으면 자취방 말고 진짜 집 느낌이 나.
연애할 때 아내가 했던 말이에요. 저도 공감해요. 정성스레 식사를 차려 먹고, 건강을 생각하며 함께 과일을 먹을 수 있는 공간이 정말 아늑한 가정집이라고 느껴요. 그리고 저는 아내 덕분에 크론병도 많이 나아져서, 이제는 과일을 매일 왕창 먹고 있습니다. 결코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지만요. 지금도 사과와 토마토가 한가득 자리한 냉장고를 보면서, 과일을 도전하던 때가 떠올랐어요.
통조림 과일
확실히 몸이 나아지면 이것저것 먹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 같아요. 한창 크론병으로 통증이 심할 때는 과일은 생각도 나지 않았는데요. 통증이 좀 괜찮아지고 마트에 갔는데 과일 통조림이 눈에 들어왔어요. 복숭아와 파인애플 통조림이었죠. '흐음... 통조림은 익혀서(?) 보관하는 과일이니까 먹을 수 있지 않을까?' 근데 파인애플은 섬유질이 많고 질기잖아요. 그래서 결심했어요.
지금은 복숭아 통조림을 도전하고 괜찮으면 파인애플 통조림을 도전하자!
황도 복숭아 통조림 하나를 샀어요. 설탕에 절인 복숭아도 과일은 과일이라서, 어릴 때 아빠가 하셨던 '과일은 보약'이라는 말이 생각나더라고요. 달콤하고 말랑한 게 참 맛있었어요. 고작 통조림 과일을 한 캔 먹었을 뿐이지만, 체감상 환자에서 꽤 건강한 사람으로 업그레이드된 기분이었어요. 자신감을 얻은 저는 얼마 후에 파인애플 통조림까지 도전했어요. 복숭아에 비해 질겨서 겁이 나긴 했지만 다행히 파인애플 통조림을 먹고도 멀쩡했어요. 하나도 아프지 않았죠. 정말 기뻤어요.
사실 영양적으로 과일 통조림이 건강한지는 제게 중요하지 않았어요. 크론병 진단 후, 입에 들어가는 모든 음식은 제게 도전이었거든요. 그저 다시 과일을 먹을 수 있단 사실을 확인시켜 준 통조림에게 고마웠어요. 온전히 과일 통조림 덕분에 다시 생과일을 먹어볼 생각을 할 수 있었어요.
배
'배'는 소화기에 좋다고 하잖아요. 저 같은 경우 배는 명절이나 제사 때나 먹는 과일이었어요. 직접 사서 먹어본 적도 없고요. 가끔 부모님께 선물로 들어올 때 잠깐 맛보는 과일이었죠.
크론병 진단받고 처음 맞이하는 명절에 집에 갔을 때 일이에요. 다른 명절음식은 먹을 엄두가 나질 않았어요. 전이며 떡이며 갈비며 예전이라면 맛있게 먹었을 음식들은 전부 보기만 해도 부대끼는 느낌이었어요. 음식 냄새 자체가 힘들었어요. 근데 부모님 집 베란다에 한가득 쌓여있는 '배'는 자꾸 눈이 가더라고요.
저건 먹을 수 있지 않을까?
냅다 베란다에서 수북이 쌓인 배 하나를 들고 와 열심히 깎았어요. 자주 먹지 않는 과일이라서인지 배를 직접 깎아서 먹은 건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조심스럽게 한 조각을 잘라먹었을 때, 상큼 달콤하고 조금은 쌉쌀한 맛은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정말 맛있었거든요.
토마토
토마토는 과일이기도 하고 야채이기도 해서 과채류라고 하죠. 제가 어느 정도 건강을 되찾고 냉장고에 항상 채워두는 것 중 하나가 방울토마토였어요. 씻어 먹기도 편하고, 쓰레기도 별로 안 나오고, 맛있고, 딱 자취하는 사람들이 먹기 좋은 과일이잖아요.
원래 토마토로 만든 샐러드며 음식을 좋아했다 보니 꼭 다시 먹고 싶었어요. 영화 '리틀포레스트' 아세요? 저는 일본 원작을 봤는데요. 거기 보면 주인공이 방울토마토 피클을 담그는 편이 있거든요. 끓이고 절인 방울토마토 피클은 부드러워서 소화도 잘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저도 해서 먹어봤는데 아주 시큼하고 맛있었어요.
그 뒤로 제 자취집에는 항상 방울토마토가 있었어요. 건강해지고 음식에 들이는 정성이 줄어든 이후 방울토마토 피클은 담그지 않지만요. 대신 상큼한 발사믹식초와 올리브오일 그리고 소금, 후추를 살짝 뿌려 먹는 방울토마토 샐러드는 항상 먹었어요. 제 아내는 제가 먹는 것처럼 만들어주면 시다고 못 먹어서, 이제는 연하게 먹지만요.
사과
다 건강해진 상태에서 별 감흥 없이 먹은 과일이 사과예요. 사과는 워낙 딱딱하잖아요. 그래서 아플 때는 먹을 생각도 안 했고요. 여러 과일과 야채를 도전하는 와중에도 사과는 먹지 않았어요. 정말 일상생활에도 문제없고 분위기에 맞게 술도 한두 잔 기울일 수 있을 때 사과를 다시 먹기 시작했어요.
어릴 때 아빠가 먹여주던 사과가 아닌 제가 직접 사서 깎아 먹는 사과는 뭔가 남달랐던 것 같아요. 아빠가 항상 말씀하시던 "과일이 보약"이라는 말이 와닿더라고요.
건강해야 먹을 수 있는 게 과일이고, 과일을 먹으면 건강할 수 있는 거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몸에 좋으니까' 먹는 게 과일일지 모르지만요. 저희 같은 크론병 환자는 '건강해야만' 먹을 수 있는 게 과일이거든요. 보약도 몸이 많이 안 좋은 사람에게는 안 좋을 수 있다고 들었어요. 어쩌면 과일은 정말 보약과도 같네요.
가끔 예능을 보면 외국에서 취두부 같은 향토음식을 '도전'하잖아요. 근데 저는 제 인생에서 입에 넣는 음식이 '도전'이 될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어요. 이걸 먹으면 아프지 않을까? 괜찮을까? 노심초사했던 몇 년간 정말 괴로웠어요. 아마 앞으로 몸관리가 잘 안 돼서 아픈 날이 다시 온다면 그건 생각만으로도 두렵네요.
음식은 아무리 좋아도 먹어야 보약이 되잖아요. 무언가를 편안하게 먹을 수 있는 몸이 어쩌면 가장 건강한 상태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직까지도 저는 다양한 음식에 도전하며 살고 있어요. 과일을 좋아하고 또 과일을 좋아하는 가족들과 살다 보니, 유독 과일에 더 도전하는 것 같지만요.
하나씩 도전하다 보니 이제는 못 먹는 과일이 없는 것 같은데요. 과일 외의 어떤 음식도 걱정 없이 먹을 수 있는 날까지 저만의 도전은 멈추지 않을 것 같아요. 물론 아프면 바로 중단할 거예요. 아, 저의 목표는 이거예요.
먹고 싶은 걸 먹고 소화시킬 수 있는,
가장 건강한 몸
▶ 본 브런치북에는 제가 겪은 크론병과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 몰라서 아팠던 저의 경험이 다른 분들에게는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되는 이야기를 좀 더 편하게 보고 싶으시면 브런치북/작가 구독을 부탁드릴게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