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술 좋아하는 크론병 환자 이야기

저만 이런 건 아니겠죠..?

by 강씀

2년 전쯤의 일입니다. 제 생일 다음 날이 크론병 정기진료였어요. 매번 하던 대로 피검사를 마치고, 진료실을 들어갔죠. 그런데 그날따라 교수님이 별 말씀없이 모니터만 계속 보시더군요. 영문도 모르고 괜히 불안해지던 찰나, 교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간 수치가 조금 높네요


아차, 선생님의 말에 뜨끔해버린 저는 어제 있었던 일을 술술 말했습니다. "사실 어제가 제 생일이라 친구들하고 술을 조금 많이 마셨는데요... 그래서 간수치가 조금 높은 걸까요?" 제 말을 듣고 또 한참동안 말씀이 없던 선생님은 질문하셨어요. "...평소에도 술을 자주, 많이 마셔요?" 저는 허겁지겁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정말 가끔 마시고 많이 안 마시는데, 어제만 유난히 많이 마신 거예요!"



평소에 교수님의 조용조용하고 나긋나긋한 화법을 참 좋아했는데, 이날만큼은 유독 불안하고 힘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스스로 좀 찔렸던 게 컸나봐요. 사실 크론병 환자인 저는 술을 무척 좋아하거든요. 크론병 환자인 주제에 술을 좋아한다니.. 하하...



오늘은 술 좋아하는 크론병 환자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저는 술을 좋아합니다


술맛 자체도 좋아하고요. 같이 먹는 음식들도 꽤 자극적이고 맛있는 것 같아요. 또 술을 마시면 기분도 좋아지고요. 술을 마실 때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대화하기 편한 분위기도 좋아해요. 그리고 저는 독한 술을 좋아해요. 특히 고량주나 백주 같은 중국 술을 좋아하고요. 와인도 벌컥벌컥 마시는 걸 좋아해요. 아, 싫어하는 술도 있네요. 맥주같이 소변 마려운 술이랄까요. 조금 번거롭잖아요, 하핫.



아내와 저를 처음 이어준 것도 술이었어요


저희가 알게 된 모임에서 우연히 술 이야기를 했는데요. 마침 아내도 사람들 만나며 술 마시길 즐기던 사람이었고, 특히 위스키를 매우 좋아하던 시절이었어요. 제가 알던 위스키바를 추천해주거나 맛집을 공유하는 등 서로를 가깝게 만들어준 게 술인 거죠.



모임이 아닌 따로 만났던 것도 삼겹살 집에서 소주를 마신 기억이에요. 꽤 시끄러운 맛집이었는데요. 저희는 둘다 목소리도 작은 편인데 그때는 용케도 이야기를 나눴었네요. 이후 2차, 3차로 이어지는 술자리에서 저희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졌고요. 끊기지 않는 대화에 거의 새벽 4시가 되어서야 헤어졌어요. 사실 헤어지기 싫었는데요. 제가 술을 많이 마시면 딸꾹질을 하거든요. 그 딸국질이 멈추질 않고 대화를 방해하기에, 아쉽게 그 날의 자리가 마무리되었죠. 그래도 덕분에 저희는 술 취향도 대화 취향도 참 잘 맞는 사이라는 걸 그날 알 수 있었어요.



연애 때도 저희 부부는 술을 참 많이 마셨어요. 각자 일을 마치고 저녁 먹다가 음식이 맛있으면 반주를 하기도 했고요. 아예 술마실 생각으로 맛집을 찾아다니기도 했어요. 언젠가는 그냥 치킨 먹으러 나갔다가 맛과 분위기에 들떠서 치킨 한마리에 소주만 4병을 마신 추억도 있어요.



아내는 제게 위스키의 세계를 알려주기도 했는데요. 언젠가 창고형 마트에 갔다가 아내가 좋아하는 위스키가 저렴하다며 술을 한병 구매한 적 있어요. 그리고는 한참을 마시지 않고 집에 두고 있었는데요. 어느 늦은 밤, 갑자기 아내가 위스키가 먹고 싶다며 찬장을 확인했어요. 마침 집에 초콜렛이 있었고요. 맛있는 바닐라 아이스크림도 있었어요. 평소 아내는 '위스키는 초콜렛이랑 아이스크림과 함께 먹는게 최고'라는 생각을 자주 말했는데, 모든 게 준비된 상태였던 거죠. 정말 딱 한 잔만 마시자며 싱크대 앞에 조촐하게 늘어놓고 위스키를 따랐는데요. 정말 너무 맛있었어요. 그날 저희는 싱크대 옆 조그마한 공간에서 위스키 한병과 초콜렛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다 비울 때까지 대화를 나눴어요. 참 많은 이야기를요.



요즘은 술 좋아하시는 장인어른과 함께 약주 한잔하며 대화하는 게 즐거워요.


장인어른은 가끔 제게 "자네 술 잘 못 마셔"라고 하시는데요. 글쎄요, 제 생각에는 제가 더 잘 마시는 것 같은데 말이에요. 늘 같이 마시다가 먼저 취하시거든요. 그러면 저는 조금 더 마시다가 내려놓는 편이고요. 물론 장인어른을 이겨 먹을 생각은 없어요. 다만 제가 더 잘 마신다는 걸 여기서라도 말해보고 싶었어요 :)








정말 신기한건요. 각자 살 때나 서로 연애할 때는 그렇게 술을 좋아하던 저희 부부인데요. 결혼하고는 전혀 술을 마시질 않아요. 이상하게 술 마시고 싶단 생각도 들지 않고요. 제가 가정주부가 되면서 외식도 거의 하지 않아 반주할 일도 줄었지만요. 집에서도 술을 모아놓기만 하고 마실 일이 없더라고요. 왜일까요.



예전에는 술로 친구를 만나고, 술로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고, 술로 감정을 해소했던 것 같아요. 사실 나쁜 경험은 아니에요. 오히려 고맙고 좋은 시간이었죠. 더불어 수많은 맛집과 좋은 추억도 덤으로 남았고요. 아마 젊었던 저는 풀어야 했던 가슴 속 응어리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술 덕분에 그나마 풀고 살 수 있었던 것 같고요. 어쩌면 저는 술을 즐겼던게 아니라 제 안의 불안을 술로 해소한 걸지도 몰라요.



그나마 다행인 건 술을 그렇게 자주 마신 것에 비하면 크론병이 크게 악화되지는 않았다는 거예요. 물론 고작 몇 년 마신데다가 약도 빠트리지 않고 잘 먹었지만요. 지금 생각하면 정말 위험해졌을 수도 있겠다 싶어요. 그래도 몸이 '어휴, 그래, 약은 제대로 먹으니까 봐준다'한 것 아니었을까요?








이제는 몸도 무한정 마시는 술을 버텨주지 못하는 나이에요. 마시면 정직하게 살이 찌고, 혈압이 오르고, 몸에 이상이 생기는 나이죠. 나이들면서 술을 줄이지 않으면 배가 갈수록 볼록해져서 구슬동자가 되더라고요. 건강뿐 아니라 돈도 함께 사라질 거고요. 얼마 전 식당에서 보니 소주 한병에 오천원이더라고요. 이제는 4명이서 한 병씩만 마셔도 음식 하나 가격을 훌쩍 넘는 시대에요. 술을 잘 마시지 않게 된 게 차라리 다행인 것 같아요.



사실 함께 살아가는 아내를 위해서도, 언젠가 태어날 아기를 위해서도, 가족을 생각하면 술을 마시지 않는게 현명한 판단이에요. 물론 그렇다고 아예 술을 끊은건 아니고요. 장인어른 뵐 때만 마셔요. 장인어른과 대화 나누며 마시는 술은 항상 맛있고 즐겁거든요. 아, 가끔 친구들 만나도 한번은 마셔야겠고요. 아내가 마시자고 하면 마셔야죠, 뭐. 하핫.



인생이 힘들어서 기댈 곳이 술밖에 없던 시절은 끝났어요. 이제 술은 기대는 것이 아니라 가끔 있는 만남의 꽃 같은 게 아닐까 싶어요. 가끔 보면 더 즐겁잖아요. 이 정도면 제 크론병도 가끔 만날 술을 눈 감아 주겠죠? 평소에 열심히 관리하니까요!



'먹을 수 있다는 행복한 기적' 브런치북에는 크론병 환자로서 가진 음식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매주 수요일마다 연재되는 이야기를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