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론병 환자의 속마음
늘 갖지 못한 것을 부러워하며 살았어요
외로울 때는 사랑받는 사람들을 부러워했고요. 한창 불안감이 클 때는 안정적으로 사는 것 같은 사람들을 부러워했어요. 그리고 크론병을 얻어 음식을 먹지 못할 때는 정말 평범하게 일상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부러웠고요. 매일 삼시 세 끼를 먹어도 아프지 않은 사람들이 부러웠어요.
지금의 저는 180도 달라졌어요. 아내 덕분에 마음 깊이 안정감을 느끼며 살고 있고요. 제가 소유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약간의 부러움은 있어도 예전만큼 큰 갈망은 없어요. 무엇보다 이제 크론병 8년 차인데요. 이제는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어도 아프지 않아요. 그러니까 지금의 저는 제가 너무나 부러워하던 평범한 삶을 누리며 살고 있는 거죠.
막상 원하는 걸 얻으니
다른 욕심도 생기더라고요.
더 건강해질 수 있을까?라는 욕심이 생겼어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언젠가 약을 먹지 않고도 살고 싶다는 마음이에요. 제가 가진 크론병은 희귀 난치성질환이라서요. 평생 병원을 다니며 관리해야 하는 병이라고 생각했어요. 조금 귀찮기는 해도 아프지 않을 수 있는 게 좋아서 당연히 그렇구나 순응하고 살았고요.
그런데 간혹 크론병 커뮤니티 등에서 몸 상태가 좋아져 주치의와 상담 후 약을 끊었다는 글을 봐요. 수많은 환우 중에서 흔치 않은 경우이긴 할 테지만요. 괜히 그런 글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라는 기대를 하게 되잖아요. 가끔 생각해요. 어떻게 해야 더 건강해질 수 있을까...
그래서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노력을 해요
저는 히포크라테스의 '우리가 먹는 음식이 곧 우리가 된다'는 말에 꽤 동의하는 편이에요. 크론병이 소화기관에 생기는 병이니까요. 좋은 식재료를 먹고 싶고 어디서 재배됐는지 궁금해지더라고요. 간단하게 생각해도 매연 가득한 도로 옆에서 자란 채소보다 깨끗한 공기 속에서 자란 채소가 몸에 더 좋을 것 같거든요. 또 공장이 없는 지역의 좋은 흙과 물에서 자란 식재료가 더 몸에 좋을 것 같고요. 계란도 고기도 마찬가지겠죠.
한때는 마트에서 쌀을 살 때도 원산지를 하나하나 꼼꼼히 찾아봤어요. 지도 어플의 로드뷰로 논이 어디에 있는지 보는 거죠. 완제품으로 포장된 식재료를 살 때도 어떤 재료가 들어가는지 전부 읽어보고요. 몸에 안 좋은 성분은 없는지 첨가물은 어떤 것들이 들어갔는지 찾아보기도 해요.
제가 먹을 식재료와 음식을 잘 관리하고, 옷이나 물건 소비는 줄이더라도 음식은 좋은 것으로 먹으려고 해요. 그러면 히포크라테스 선생님(?)의 말처럼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먹는 음식들이 곧 제가 되니까 좋은 음식을 먹을수록 더 건강해질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결과적으로는 지금의 저는 꽤 건강하게 살고 있는 것 같아요.
크론병의 진단 초기,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을 때가 생각나는데요.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아파하는 분들도 많이 봤고요. 응급 상황인 환자들도 꽤 자주 봤어요. 또 수술을 기다리는 환자들도 엄청 많아서 신기해하기도 했어요. 그때는 정말 세상에 아픈 사람만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병원을 나오니 또 다르더라고요. 제가 퇴원할 무렵이 크리스마스 시즌이었거든요. 퇴원 수속을 마치고 로비층에 내려왔더니 영화에서나 볼 법한 거대하고 예쁜 크리스마스트리가 보였어요. 저는 그때서야 '크리스마스구나' 했는데요. 병원을 나와 신촌 거리를 걷는데, 세상에,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어디선가 끊임없이 캐럴이 흘러나오고, 카페와 식당에는 맛있는 음식들이 넘쳐나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어요. 너무 신기해서 뒤를 돌아보니 제가 한 달 동안 지낸 세브란스 병원은 여전히 그대로였고요.
제가 아파서 다시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면 저의 세상은 다시 아픈 사람만 가득하게 되겠죠.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는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거든요. 저는 행복해지려면 행복한 사람들 곁에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건강하기 위해 노력해야 해요. 정말 오래 건강하고 싶어요.
저는 요즘도 세브란스에 진료를 받으러 다녀요. 수많은 환자, 보호자, 의료진을 스치며 신촌거리를 걷기도 하고요. 그러면서 생각해요. 나는 언제까지 건강하게 신촌을 걸을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할 때면, 그동안 제가 쌓아 올린 건강하기 위한 노력들이 물거품이 될까 무섭기도 해요.
다행히 제가 크론병을 통해 얻은 가장 큰 배움은 회복탄력성이에요. 어쩌면 또 아플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에게는 아픈 이후에 노력해서 나아진 경험이 있잖아요. 다시 아프게 된다고 해도 또다시 건강해질 수 있다는 믿음과 자신이 있어요. 평생 약을 먹을지도 모를 크론병에 걸리기는 했지만요. 분명 저는 크론병을 통해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 하나를 배웠네요.
어제는 저녁으로 닭가슴살과 온갖 야채가 들어간 현미 볶음밥을 먹었어요. 섬유질 가득한 고구마도 한 개나 먹었고요. 예전이었다면 상상도 못 할 식재료들인데요. 그래도 오늘은 배가 아프지 않아요. 앞으로도 언제 아플지 모르지만 지금은 건강하고요. 아프더라도 다시 건강해질 거고요. 아내와 함께 누구보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