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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롱 Apr 10. 2024

그래서 나는

별이 된다

이것은 나의 자전적 기록이다.



아주 오랜만에 '내 것'의 글쓰기를 해본다. 정확히 4월 4일 오전 01시 00분이다. 언제나 그렇듯 글을 쓸 때는 몰입하게 된다. 하얀 도화지 위에 검은 생각들을 정리하는 것이 여전히 내겐 편안한 일이다. 그 어느 때보다 살아있음을 느끼게 된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보지 않게 된다. 그래서 나는 글 쓰는 일을 멈출 수 없다. <치유의 글쓰기>에서도 알 수 있다. 글과 평생을 함께했을 기성 작가들이 얼마나 글쓰기에 대한 본질을 곁에 두고 살아가는지 말이다. 이 글은 다사다난했던 나의 경험들에서 피어난 끄적임, '잠시 서행하겠습니다'의 마지막 장이다.



7년이 지나고서야, 그 시절 겨울이 주는 따뜻함에 닿을 수 있었다.



블로그 공백기처럼 보이는 두 달여간 나는 메모를 통해 글을 썼다. 소중한 영감들이 날아가지 않게 붙잡아두고 정리해 두었다. 꾸준히 글을 써야겠다는 다짐은 저물지 않았다. 23년 12월 7일에 '잠시 서행하겠습니다'를 주제로 수필에 근접한 에세이 조각들을 꺼내보았다. 그리고 조각에 담긴 기억을 재차 정리하는 데 정확히 두 달이 걸렸다. 24년 2월 7일이었다. 바로 직전에 4일간 제주도에 다녀오면서 마음이 꽤나 치유되었다. 크게 목적을 두지 않고 떠난 여행이었다. "나는 이제 충분히 치유된 것 같은데" 치유의 숲에 들어가기 전, 나는 속으로 생각했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달릴 때는 고통과 힘듦에 무뎌지고, 주변의 것들을 살피지 못한다. 보고자 해도 보지 못하는 것이, 마치 도덕경 14장을 꿈에서 펼친 듯하다. 나는 치유의 숲을 천천히 거닐었다. 그저 걷다 보면 생각에 잠기고, 비로소 느끼게 된다.



나 자신과의 경쟁을 잠시 묻어두고, 단지 '좋다'라는 감정을 곁에 두었다.



올해 초에 글을 잘 쓰고 싶어서 글쓰기 특강을 들었고, 영감을 얻기 위해서 카피라이팅 강의를 들었다. 여러 공모전에 글을 제출하다 보니 기자단 활동을 하게 되었다. 타 사이트에서 원고료를 받으며 글을 쓰기도 한다. 일에 강박을 느끼면 삶의 경계가 무너지기 마련이다. 내가 지닌 본질을 또다시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나를 시스템에 잠시 가두었다. 이미 경험으로써 깨달은 이치이다. 시스템이라는 단어가 자유를 억압하는 듯 보이지만 그 안에 담긴 가치는 소중하다. 결국 나는 2개월 공백 기간의 포스팅을 시스템으로 부술 수 있었다. 시스템은 체계적이고 그렇기에 여유를 가져다준다. 지금 느끼기에 3년이면 시스템에 적응하고, 10년이면 인정받을 준비가 될 듯하다.



자명하는 것은 그동안의 경험 중 가치 없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제는 충분히 느꼈으니, 다시금 시스템의 삶에서 살아갈 필요가 있다. 다른 점은 여유가 생겼다. 감사하는 마음에서 여유가 피어나고, 꾸준함 속에서 열정이 지속된다. 나는 다시 일, 운동 그리고 글쓰기를 하면서 살아간다. 여전히 경험주의자의 성격을 지녔지만, 꾸준히 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만, 확장될 뿐이다. 공부도 곧 일의 영역이고, 운동이 생활이 되고, 글쓰기가 가치가 될 수 있듯이 말이다. 쉽게 얻는 것은, 쉽게 잃는다. 본질을 느끼려 애쓰는 중이다.





관계

2월 말쯤이 되어서 나는 미팅, 휴식, 졸업여행을 하나로 묶어서 서울에 다녀왔다. 미팅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상에는 참 뛰어난 사람이 많다. 한 가지에 미친다는 것은 경외심이 들면서 또 존경스러운 일이다. 아이러니하게 한국은 심하게 돈에 미쳐있지만, 돈만을 좇는 사람에게 존경을 주는 일은 상대적으로 박해 보인다. 그럼에도 사람을 수치화하고 단편적인 관계의 형성은 일상적인 흐름이 되었다. 이것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닐 테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가치는 중요하다. 행복과도 분명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오히려 소수의 불운한 기업 수장들 케이스를 들먹이며, 돈과 행복이 전혀 관계없다고 말하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려워 보인다. 다만, 행복의 역치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돈이 많아도 행복의 역치가 높을 수 있는 일이고, 돈이 부족해도 만족하며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살아가는 일이 마음먹기에 달렸다.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던지 말이다.



피고 지는 일.



영화 '파묘'를 보면 "땅에서 태어나고 평생을 살아가며, 죽어서 다시 땅에 돌아간다. 결국 순환하는 것이다"와 비슷한 내용의 대목이 나온다. 관계를 어렵사리 정의하자면 이처럼 순환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관계는 무엇일까.



나는 서울에 올라간 김에 친한 형을 만나서 '차돌 냉이 된장'을 얻어먹었다. 오색 가지의 싱싱한 재료들에 정성이 들어가 대접받았다. 정성 가득한 요리의 레시피는 메모지에 담겨있다가 집에 있는 가족들에게 전해졌다.



애정의 온도로 끓인 차돌 냉이 된장찌개.



차돌 냉이 된장찌개를 얻어먹은 다음 날에는 졸업여행이 시작되었다. 불과 한 달 전인데, 이제는 4명 중 2명이 고향을 떠나 타지로 가게 되었다. 졸업과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염원하는, 다음에 또 만날 것을 기억하는 '이별 여행'이 아니었을까.



'이별 여행'은 마냥 즐거웠다. 친구들과 있을 때는 철학적이지 않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먹고 마시며 노는 일이 더 중요하다. 단둘이 있을 때는 사뭇 진지해질 수 있다. 여러 명이 있을 때는 비교적 덜 하다. 그래서 내게 '관계'라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대목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끊고 맺을 수 있으면서도, 그럴 수 없는 일이다. 상처를 주면서도 치유해 주는 것이다. 관계가 지니는 가치가 무엇일까. 내게는 잘 나온 음식 사진보다 건배하는 순간의 염원이 더 소중해 보인다.



관계가 지닌 가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곁에는 소소한 관계들이 맺어지고 있다. 끊어지고 비워진 자리에는 또 다른 누군가가 스며들기 마련이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도 결국엔 사람이 치유할 수 있다. 결국 순환하는 것이다.



관계는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거미줄 같다. 눈물을 흘려도 곧바로 떨치지 않는 일이 마치, 거미줄에 맺힌 빗방울과 같다. 단지 밝은 날이 다가오고 마를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 할 뿐이다. 정성스레 만든 거미집도 한순간에 끊어질 수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비바람에도, 스쳐 가는 누군가에게도 무너져 내릴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거미줄을 친다. 살아가야 하기에, 무너져 내리면 다시 짓는 것이 순리인 셈이다.



어쩌면 끝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가는 중일 수 있다.



거미줄을 다시 치지 못해서 죽어가는 이에게 글을 건넨 적이 있다. 어쩌면 무모한 일이었다. 비로소 행복해졌는지,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성공의 기준이 무엇인지 등, 가장 힘들었던 시절의 내게 건네주고 싶었던 나의 이야기를 담았다. 어쩌면 쓰라린 일이었다. 글을 다 읽었다는 마지막 문장에서 내게 두 가지 감정이 뒤섞였다.



내면에 담긴 감정들.



1년 전 비혼을 주제로 20대 청년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나는 비혼주의자였다. 또 다른 비혼주의자 동료는 결혼을 꿈꾸는 누군가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모습은 마치 선원을 유혹하는 세이렌 같았다. 어째서인지 자신만만하던 결혼주의자의 낯빛은 점점 어두워졌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근거는 비단 돈 때문이 아닐 테다. 그리고 홀려버린 결혼주의자는 관계를 맺는 일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깊은 고찰을 했을 테다. 내가 비혼주의를 외칠 때도 관계가 불러올 고통에 대한 걱정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하나의 관계가 여러 관계로 퍼져나가듯, 한 번 덧난 관계의 상처도 끝없이 커지리라 생각했었다. 나는 어쩌면 다가오지 않을 걱정에 ‘관계의 부재’를 스스로 자초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나는 사랑받는 일이 중요하지 않았고 단지 성공하고 싶었다. 과거의 나에게 묻고 싶다. “성공한 사람의 기준은 뭐라 생각해?”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큰돈을 버는 인생이 성공한 거야?” 그 당시에 내가 생각했던 성공은 지금과 본질적인 차이가 있었다. 나의 관계를 성공과 연결 짓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야 비로소 생각해 보는 성공의 기준은 자신의 관계로부터 존중받고 사랑받는 사람이다. 관계의 순환이 만들어내는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자신의 마음에 항상 사랑을 품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자신의 가족, 친구 그리고 동물까지 그 대상이 무엇이든 사랑을 전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랑을 전할 때 비로소 사랑받을 자격이 생긴다. 이제 ‘나의 관계’에는 항상 사랑이 존재한다.



우리는 사랑을 전할 수 있다.



우리가 달려갈 세상에서 잠시 서행해도 괜찮다. 방향을 틀어도 괜찮다. 복잡한 관계 속에서 지치기도, 상처받기도 때론 위로받기도 한다. 우리에게는 어떤 마음을 품고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다. 상처로 인한 우울, 슬픔, 그리고 분노와 함께 살아간다면 자신의 관계는 건강하게 흘러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사랑, 희망, 존중과 같은 감정들을 마음에 품는다면 진정으로 순환하는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 우리의 관계는 결국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러니 ‘나의 관계’에 좋은 감정들을 두고 살아가자. 그게 나의 관계, 혼자가 아닌, 우리의 관계다.





나는 '별'이라는 단어를 마음에 두었다. 그래서 틈틈이 별에 대한 부스러기를 기록하고 있다. 내 이름에 들어가는 '별 이름 규(奎)'도 마음에 든다. 밍기뉴의 '별'이라는 노래를 가장 좋아한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대형마트와 목욕탕, 휴일에 맡는 팝콘 냄새, 떡볶이 국물에 푹 찍어 먹는 달걀처럼 살다 보니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별'이라는 것은 서정적이면서 과학적이고 또 낭만적이다. 서로 존중하는 인물들이 별로 형상화되기도 한다. 나의 꿈에도 크고 작은 것들이 넘쳐난다. 누구나 품을 수 있고 동시에 누구나 품어줄 수 있다. 나는 여전히 먼 미래에 대한 큰 야망을 품고 있다. 동시에 아주 작은 목표들에 집중하고 있다. 어쩌면 자그만 별들도 내가 품었던 커다란 야망이었을지 모른다. 이번 여름날에 무수히 수놓을 별들을 눈에 담고 와야겠다. 쏟아지는 별들에 그대로 잠긴 채 말이다.



그래서 나는 별이 된다.

너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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