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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롱 Dec 19. 2023

너의 해독

나도 해독이 될 수 있을까

너는 서행 도중에 멈춘 것인지 생각했다. 링컨 아저씨처럼 아주 조금씩이라도 걸었어야 했는데 말이다. 그런 생각에 잠긴 채, 무지근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멈추어있다간 뒤돌아볼 것 같은지, 너는 다시 서행한다.



무계획으로 떠났으니 그에 걸맞게 즐겨보기로 했다. 결국 너는 하루 더 일찍 지인의 집에 방문하기로 한다. 마침 지인도 심심하시다니, 염치 불고하고. 하룻밤 더 남은 호텔을 남겨두고 다시 서울대입구역으로 향하는 그날 오후이다.



이런 기분이 들 때면 너는 무소유가 떠오르고, 가만히 앉아서 은월이나 바라보고 싶다. 너는 커다란 침대와 그게 전부인 방을 대충 정성스럽게 정리하고 다시 거리로 나온다. 혹시나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아도, 은색 빛깔의 깨끔한 달덩이는 찾아볼 수가 없다. 네가 좋은 사상을 지녔는지, 좋은 사람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적어도 오늘은 그것을 묻어둔 채, 공허한 마음으로 버스에 오른다.





해독주스

거리를 걷다 골목길로 들어서니, 삼거리에 초등학교 경비원이 서있다. 아침 빛이 돌던 출근길과 달리 이제는 제법 어둑하지만 한기는 돌지 않는다. 추운 게 싫었던 너는 따뜻한 겨울이 딱히 슬프지 않다.



너는 다소 굽이 진 길을 헤매다가, 마침내 집에 도착했다. 주변의 주택들과 달리, 그것만은 깔끔한 회색빛의 빌라였다. 주택보다 높이 솟아있지만 그렇다고 눈에 띄지는 않았다. 오히려 도로의 아스팔트 같고 어둑한 느낌에 너는 빌라를 지나치고서 다시 되돌아갔다.



여러 과일에 채소를 갈아서 abc 주스를 만든다. 전용 믹서기는 네가 알던 믹서기와 달리 투박한 느낌으로 재료들을 조각낸다. 당근이 부서지고 양배추가 아삭거리기는 것을 보고 있자니, 한 편으로 마음이 안정된다. 네가 비트 한 조각을 집어 들어서 믹서기에 넣자, 음료는 이내 적색 보랏빛으로 물들더니 그 위로 스며든 황금빛 사과가 꽤나 놀놀하다.



너는 꼭 몸에 좋을 것 같은 음식, 특별한 감정이 담긴 음식을 구글링 해본다. 네가 기대한 것보다 더 신기한 효능이 있기를 내심 바라면서 설렘으로 모바일 화면을 바라본다. 애석하게도 너는 "해독주스 효과 없어요"라는 글을 읽고 있다. 차라리 플라세보효과라도 바라면 좋을 것을, 부정적 글을 읽고 있자니 이전의 설렘이 사그라든다. 효능을 검색하면 긍정 평가, 부작용을 검색하면 부정 평가. 너는 질문에 걸맞은 결과가 나올 것을 알고 있기에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나도 해독이 될 수 있을까"

너는 지금 무지근한 자신의 영혼을 믹서기에 집어넣어, 찌꺼기는 버려두고 온전한 양분을 담은 한 잔의 음료로 만들어 갈아 마시고 싶다. 어쩌면 영혼까지 닿을지 모르는 한 잔의 주스를 이내 들이켠다. 카페에서 만들어주었던 해독주스보다 훨씬 건강하고 순수한 맛이 난다. 그보다 더 날 것의 향이 이내 올라온다. 해독의 향을 머금은 채, 마음 한편에 여유를 두었다.





청경채

저녁이 깊어지니 너는 저녁을 먹으려 한다. 배달로는 먹어본 적 없었던 샤부샤부 재료가 눈앞에 있다. 평소 같으면 고기에 눈길이 갔을 것이, 지금은 뜨거운 국물이 될 육수가 그러하다. 육수를 들이붓고 나니, 청량해 보이는 청경채가 눈에 들어온다. 청경채가 값이 올랐다는 너의 어머니의 말을 들은 뒤로부터, 너는 마라탕에 청경채를 집어넣기 시작했다. 먹다 보니 그것이 또 마음에 들어서, 너의 몇 안 되는 '좋아하는' 채소 리스트에 담게 되었다.



그런 청경채를 가장 먼저 육수에 담가놓고, 차례대로 재료들을 넣기 시작한다. 채소가 하나둘 들어갈 때마다 더 깊어질 육수를 바라며.






너는 지금 해독이 필요한 것인지, 소독이 필요한 것인지 더 이상 알고 싶지 않다. 번잡했던 마음에 질서를 잡으려니, 그것들을 붙잡아두어야 했다. 확신을 가진 채, 두려움을 활용하는 것은 과도기적 설렘이다. 너는 여전히 서행하고 있다. 간혹 질서를 위해 정차하기도, 방향을 틀기도 하지만 여전히 시동을 켠 채 달려가는 중이다.



뜨끈한 국물로 피로와 함께 너의 독소를 잠재우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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