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
광주송정에서 가장 빠른 KTX 용산행을 선택했던 것은 첫째로 할인 운임이며, 둘째는 새벽에 떠나기 위함이었다. 고작 일주일이지만, 그 일주일마저도 일평생 고향을 떠나 홀로 돌아다닌 적이 없었다.
걸어도 되는데 마냥 달렸다. 세계 챔피언까지는 아니더라도 지역 대회에서 동체급 내 1등이 되고자 하던 그 마음. 그 정신력으로 왼쪽 발바닥 뼈가 피멍이 들어도 그냥 달렸었다. 10분만 더, 10분만 더. 그렇게 트레드밀에서 내려온 나는 더 이상 달리지 못했다. 이후에 잘못된 방식의 치료와, 그 끈을 놓지 못한 채 달려가다 멈추다를 반복했다. 그것이 천천히 걷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란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발목의 부상은 어느덧 마음으로 옮겨졌다. 그때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잠시만 서행하기로 한다.
당신은 서행하고 계시나요
새벽 공기를 받으며 서울행 KTX를 기다린다. 편의점이 보이지 않아 자판기에서 바나나우유를 하나를 꺼내보았다. 빈자리가 많았는데도 나는 중년의 남성과 함께 가게 되었다. 그는 일찍이 텍스트로 된 글들을 읽는 듯하였다.
나도 가방에서 ‘아버지의 해방일지’ 한 권을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무계획일지라도 짐은 챙겼어야 했는데, 난 여행 전날 부랴부랴 기차표 예매를 하고 짐 정리를 하다 보니 4시간 남짓 잠에 들었다. 잠만 충분히 잤다면 온전히 몰입할 수 있었을까. 나는 이후 일정을 생각한답시고 합리화하며 그와 함께 눈을 감았다.
서울대입구역 근처에 사는 지인과 함께 조식을 먹기로 했다. 그렇기엔 광명역이 가까웠고, 그것을 뇌리에 담아두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땐 열차는 이미 광명역 도착 직전이었다.
창틀에 앉은 내가 헐레벌떡 나가려 하자, 그는 받침 선반에 왼쪽 무릎까지 부딪혀가며 화들짝 일어났다.
샐러리맨이 맬 법한 가방을 메었던 그는 이런 새벽 열차를 얼마나 탔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속도를 줄일 수 없는 고속도로였을까.
당신은 서행하고 계시나요.
고기를 씹는 일
해가 뜨며 거리는 제법 출근길 느낌이 났다.
지하철에 들어가니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났다. 사람들이 제법 있는 중앙으로 갈수록 냄새는 사라져 갔다.
샤로수길에 들어섰지만 내가 아침에 보던 출근길과 별다를 건 없었다.
한 가지 재밌었던 건 뛰어가는 사람들이 꽤 많이 보였다. 나의 출근길에서 종종 뛰던 사람은 나뿐이었는데, 나보다 더 급하게 뛰어가는 그들을 보니 또다시 궁금해졌다.
퀴퀴한 냄새를 뒤로하고 골목길로 들어서니, 내가 좋아하는 빨래방 특유의 따뜻한 내음이 났다.
빨래들을 건조 후 풍기는 섬유유연제 향이겠지만, 나는 그것이 푸근해서 마음에 든다.
지인과 먹었던 조식은 치즈피망토스트에 abc해독 주스였다. 뿌려먹는 치즈와 조각난 피망, abc주스는 심미적으로 보았을 때 즐거움을 주었지만, 그 이상 의미를 담을 수 없었다.
약간의 작업과 일정을 정리하고 본격적인 홀로 여행을 시작했다. 원래 성격대로면 맛집을 전부 찾아서 예약을 하고, 정확한 시간에 식사를 마쳤겠지만 나는 맛집 앞을 돌아다니며 맛집을 찾았다. 샤로수길의 텐동을 먹고 싶었으나 대기 인원이 문밖까지 서있는 것을 보고, 한식을 먹기로 했다.
차돌된장찌개 정식과 고기를 시켜놓고, 혼자 다 먹으려니 마음이 뒤숭숭해졌다.
배고픔에 설렌 것인지, 낯선 곳이 어색해서인지, 그 경계에 앉아서 고기를 먹는다.
어떤 방송 매체에서 들었던 기억으로는, 소개팅 자리에서 또는 누군가와 마주 앉아 고기를 씹는 것은 서로의 호감도를 올려준다고 한다. 그야 내 주변을 보아도 고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물 빠진 고기라면 모를까, 잘 익은 스테이크나 황제살을 싫어하는 사람은 드물었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기를 씹으니 무언가 공허하다. 분명히 맛은 있으나, '맛'의 영역이 아닌 무언가가 느껴진다. 새로운 경험으로 변화하는 것은 즐거운 것이지만, 또 다른 느낌은 비가 쏟아지기 전 흐린 날씨와 같은 슬픔이다. 하루 만에 이런 생각이 들고나니, 문득 세상은 어차피 혼자라고 끄적였던 지난날의 과오가 떠오른다.
그래도 역시 변화하는 것은, 어떠한 것에 도전하는 움직임은 그 무엇보다 가치 있고 즐거운 일이다.
자유의지
숙소에 도착하니 커다란 침대 하나가 있다.
게스트하우스나 캡슐 호텔을 갈 것이라고 말했지만, 결국에 합리적인 가격의 호텔을 선택했다.
그것은 아마 작은 용기의 부재로 보인다.
길을 걷다 보니 '자유의지'라는 메시지가 보인다.
*외적인 제약이나 구속을 받지 아니하고 내적 동기나 이상에 따라 어떤 목적을 위한 행동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의지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은 생각보다 적었다.
이태원거리 중심에는 외국인들과 사람이 꽤 있었지만, 또 종종 조용한 거리가 나오기도 한다.
서울에서 별을 보고 싶은 소망이 있었는데, 좀 더 공부하고 오는 것이 좋겠다.
자유의지가 더 강해지거나, 누군가와 함께 볼 수 있을 때.
서울의 달동네는 내가 알던 것과 다소 괴리가 있었다.
고즈넉하기보단 어둑어둑하고, 무엇보다 개인 주차장에 자리 잡은 외제차들은 보기에 낯선 풍경이었다.
내부가 훤히 드러나는 창을 가진 사무실에서 맥 혹은 델로 보이는 컴퓨터로 작업을 하는 사람.
외국에서 살다 온 듯한 개 3마리와 함께 산책하는 외국인.
좁은 골목길 사이 숨어있는 오마카세 맛집까지.
거리를 지나고 계단을 걷던 하루 끝에서,
쏟아지는 불빛과 차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