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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구범석
Dec 19. 2024
나도 모르는
내 여자친구가 생겼다
할미가 만든 '오늘부터 의문의 1일'
"너, 뭐 하고 다니는 거야!?"
봄부터 기획했던 오디션 프로그램이 가을에 들어서야 첫 녹화를 마치고,
뒤이은 다음 라운드 준비에 한창일 때였다.
오랜 기간 할미를 두고 일터로 빨려 들어가는 게
걱정
됐지만,
이런 모진 스케줄은 할미와 따로 살 때도 새삼 다를 게 없던 내 일상이었다.
내 손길이 뻗쳐야 할 일들은 많았고,
늘 기민하고 예민하게 일처리를 해야 했다.
프로그램이 마무리되기 전까지는
고돼도 별 수 없는 이런 일정들 탓에,
함께 사는 할미와 나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불 꺼진 집에서 실루엣만 드러낸 할미가,
평소와 다른 어색한 말투로
'대체 뭐 하고 돌아다니는 거냐'
고 물은 시점부터.
나는 여느 저녁과는 다른 할미의
처음 보는 낯선 반응에 흠칫하며 말했다.
뭐 하기는. 일하고 왔잖아.
할미가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내가 매일
잘 있는지 전화를 넣은 횟수가 늘어갈수록,
할미는 점점 자신만의 상상 속으로 잠식되어 갔다.
'우리 손주는 나를 두고 즐겁다.'
나를 향한 할미의 서운함은 점점 호전적이었다.
늦게 퇴근하는 날이면
집안의 불은 모두 꺼져있었고,
하루는 안방에서 다른 날은 다른 방에서
잠자코 있다가 스윽 나타나 나를 노려보았다.
매번 어둠 속 팔짱 낀 할미가
거실만 비워두고 무작위로 나타날 때면,
난 머리가 쭈볏 서는 공포를 느꼈다.
언제부터 불빛 하나 없는 곳에서 저러고 있었을까.
이제 퇴근한다고 전화했을 때부터?
더러 전화를 받지 않는 날도 있었다.
혹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알 수도 없어서,
그건 그것대로 신경이 쓰였다.
나는 집에 들어올 때마다 엄습하는 오싹한 느낌이 싫어,
도착하자마자 전등 스위치부터 찾아 켰다.
그때마다 나는 룸슬리퍼가 끌리는 소리를 내며
스르륵 나타나 팔짱을 낀 채
날 노려보고 있을 할미의 눈빛을 뒤로 하고
얼른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평소 무섭게 봤던
<파라노말 액티비티>와 <더넌>의
알짜만 합쳐놓은 것처럼,
뒤에 있는 할미의 뜻 모를 감정에 나는 쫓기고 있었다.
계속 이럴 수는 없었다. 정확히는 이런 감정과 상황이 버거웠다.
나는 사과를 할 일은 아니지만 할미를 이해시켜야 했고,
그런 나 역시 할미의 배려가 마려웠다.
그리고 내가 놓치고 있는 할미가 서운할만한 이유들을 찾고 싶었다.
할머니 혼자 마실 갈 때도 마땅치 않고 심심했겠다.
최대한 빨리 마무리 짓고 오고 싶어도 일이 바빠.
나도 빨리 와서 쉬고 싶지.
잔뜩 일하고 와서 힘드니까 이렇게 불 좀 끄고 있지 마.
어떻게 말해야 지혜롭고 살가운 손자의 말이려나.
다행히도 하소연을 들은 할미는
안심된 표정으로 내 어깨를 토닥이며,
'우리 도련님! 그랬구먼~'
온화한 미소로
화답했다면 참 좋았겠지만.
어림없었다.
그녀는 나를 향한 공격의 끈을 더욱 꽉 묶어 말했다.
"너 그 여자랑 있다 왔잖여"
내가? 여자랑
?
"그려! 키 요맨 하고 머리 긴 여자."
키 요맨~하고 머리 긴 여자를 만나고 싶네.
일하다 왔다니까 무슨 소리??
"개수작 마유! 내가 봤슈!
요 골목에서 둘이 걸어가는 것도 봤구!
너 내가 누구냐. 쏙여 먹을 생각 말어!"
이 동네에 친구 하나 없는 내가,
어딘지 모를 요
앞에서
여자랑
걸어가는
걸 봤다니
듣던 중 반가운 말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할미는 거짓말 중이다.
그때부터 그녀는 마치 핸들이 고장 난 8톤 트럭 같은
폭주의 추리를 멈추지 않았다.
어쩌다 아침을 거를 때면
"그 여자네 집에 가서 먹고 가는구먼"
저녁에 호수공원으로 운동을 갈 때면
"그 여자네 집에 가서 쉬고 오는구먼"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겠는
"차는 가져가니?"
솔직히 가끔은 웃음도 났다.
헛웃음
7,
재밌게
즐기고 춤이나 추자는
정신승리
3정도
비율의
웃음.
어디서부터 어떻게 대꾸해야 될지 모르겠어서 그랬다.
나의 "아니"라는 말쯤은 가볍게 예상한 할미의 추리는 확고했다.
머리카락 한올 구경 못한
여자를 빚어낸 할미는
나를 강제로 솔로탈출시켰고,
그녀가 정해준 '오늘부터 의문의 1일'이 시작됐다.
차라리 <나는 솔로>의 광수로 출연한 내가
고독정식을 두 번이나 먹었다더라.. 같은 루머가 더 그럴싸하겠다.
하지만 할머니의
'너 요즘 아주 재미가 좋구나...'를 말해주는
저 가느다랗게 뜬 눈길은 오로지 하나만을 말하고 있었다.
'우리 손주는 나를 두고 즐겁다. 그 여자랑.'
평소 나의 연애와 결혼을 지지하고 소망하던 할미에게서,
어찌 저런 말들을 듣나 서운하고 당황스러웠다.
나는 막내 손자가 연애하면 좋아해야 되는 거 아니냐
물었지만,
할미는 대답 없이 눈만 흘겼다.
내가 이제는 이런 질문까지, 이렇게 말려드나 싶기도 했다.
설마 일이 아닌 연애에 정신을 놓은 내가
자신을 방치한다 느꼈을까.
애초에 바로잡을 수 있는 진실이 아니니 그런 추측도 의미가 없었다.
이후에도 회의 때문에 놓친 할미의 전화를 확인하고 다시 걸면
그녀는 길길이 날뛰며 소리를 질러댔고,
내가 집으로 오는 내내 전화를 걸어 어디냐고 확인했다.
이게 뭐라고 운전이 급해지는 나 스스로 할미의 뒤틀린 애착에 동조하고 있었다.
그렇게 막상 집으로 돌아오면 할미의 날카로웠던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평온했다.
내가 집에 도착해 있다는 것,
육안으로 확인했다는 자체에 안도하는 느낌이랄까.
그렇게 나는 할미의 계속해서 던지는 자잘한 잽을 맞고
점차 대미지가 쌓여갔다.
얼굴을 치나 싶다가 로우킥도 살뜰히 넣으며 차곡차곡 점수를 쌓아갔다.
나는 수건을 던져줄 목격자도 구세주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휘말려갔다.
이 모든 사실은 가짜임을 넘어 진짜처럼 흘러갔고,
기묘한 뉘앙스의 이야기들로 살이 보태졌다.
잠시후 일찍 합주 일정이 있어
몇 시간이라도 잠을 자 둬야 했던 어느 날 새벽.
상상이 확신이 되고 확신이 신념이 된 할미는
방문을 조심히 열고 들어와 말했다.
"너 있잖여 그.. 요 앞에 사는 그 여자애"
새벽 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내가 마치 "아, 내가 사랑하는 다름 아닌 내 여자친구? 왜 왜?"
같은 대답이라도 할 줄 알았을까.
할미는 동네가 아니라 파주 어디에도 없는
신비로운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금 꺼내기 시작했다.
나는 잠이 필요했다.
안
그래도
피곤한 시기,
4시간
정도라도
눈을
붙여야
하루
일정을 견딘다.
그치만 어렴풋이 퍼져있던 잠의 기운이 소멸되고,
날 괴롭히고 있다는 피해감이 몰려와 화가 일었다.
결국 참을 수 없는 무거운 억울함을 느낀 나는 할미와 다퉜다.
그 새벽, 창피도 모르고 소리를 높이며 맞섰다.
그리고 출근 때 입을 옷가지를 챙겨 집을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그제야 할미는 내 팔을 붙잡아 앉히려 했다.
미안하다며.
할미는 어째서
마음도
모르고
떼쓰는 아이처럼,
이 시간에 기운도 좋게 다툼을 사서 하려 할까.
내게서 가느다랗게 떨리는 한숨이 뱉어졌다.
나는 1박할 결심을 거두고 할미에게 당부했다.
생각하는 그런 사람은 없으니,
하지 않아도 될 걱정들로 힘들지 말고
제발 여기서 편히 쉬시라고.
그리고 내가 연애라는 걸 하게 되면
할미에게 제일 먼저 말하겠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 할미의 '뭐어어?'라는 눈빛을 읽었다. 환장할 노릇.)
우리는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몸을 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할미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오래 살아남았다는 건 강하다는 것인가.
다음에 있을 전투를 위해 급속 충전하듯
고르고 규칙적인 숨소리의 할미를 들으며,
나는 가슴 한쪽이 욱신거리는 통증과
뻐근한 위통을 겪으며 엎드려 잠을 설쳤다.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믿었던 할미는
얼마 후 프로그램 준비를 위해 떠난 강릉에서
내게 끝나지 않은 결투를 신청했다.
강릉에 있던 내게 엄마의 전화가 걸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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