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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인 Feb 08. 2021

«평등해야 건강하다», 정말?



사회역학(Social Epidemiology)은 질병과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요인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사회의 불평등과 건강의 관계에 대해 역설해온 리처드 윌킨슨(Richard Wilkinson)과 케이트 피켓(Kate Pickett)부부가 바로 사회역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저자가 공동 집필한 «평등이 답이다(The Spirit Level)»와, 리처드 윌킨슨의 «평등해야 건강하다(The Impact of Inequality)»는, 사회의 소득불평등이야말로 부유한 국가들에서 건강 수준의 격차를 설명하는 핵심 변수라고 주장합니다. 국내에도 번역이 되어 잘 알려진 저서들이지요. 그 주장의 개요를 간단히 살펴보기 위해, 윌킨슨이 강연자로 나선 TED 강연(https://youtu.be/cZ7LzE3u7Bw)을 참고해볼까요.


그림1. 국민소득과 기대수명. https://youtu.be/cZ7LzE3u7Bw



‘건강’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쉬이 답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생명체가 불건강의 극단에 처할 때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쯤은 큰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령대별 사망률로부터 계산한 출생 시 기대수명은, 역으로 그 사회의 건강 수준을 나타내는 좋은 지표가 되어줄 수 있는 것이지요. 윌킨슨의 TED 강연은 기대수명과 관련된 한 ‘역설’로부터 시작합니다. 1인당 국민소득이 PPP 달러 기준 약 2만 달러 근처에서 4만 달러에 이르는 국가들의 소득과 기대수명을 한 좌표평면에 나타낸 그림1에 따르면, 국민소득은 적어도 일정 구간 이상에서는 그 나라의 기대수명과 뚜렷한 상관관계를 보이지 않습니다.



반면, 아래 그림2에서는 한 나라 안에서는 소득 수준이 높은 지역이 소득이 낮은 지역에 비해 기대수명이 더 높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한 나라 안에서는 분명히 소득 수준이 높을수록 더 건강한, 소득과 건강 사이의 상관관계가 나타나지만, 같은 상관관계가 나라 별로 비교해보았을 때에는 나타나지 않는 ‘역설’적 현상이 있었던 겁니다. 리처드 이스털린이 소득과 행복의 관계에 대해서 발견한 ‘이스털린의 역설’(https://brunch.co.kr/@kuy06154/2)을 연상시키는 재미난 현상입니다.



그림 2. 잉글랜드 & 웨일스의 지역별 소득 수준과 기대 수명. https://youtu.be/cZ7LzE3u7Bw



리처드 윌킨슨의 연구가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런 ‘역설’을 설명할 변수로서 소득 불평등을 지목하기 때문입니다. 기대수명 뿐만 아니라, 유아사망률, 살인율, 수감률, 비만, 정신질병 등 ‘사회적 기울기(Social gradients)’를 갖는 건강 및 사회문제들이 소득 불평등과 상관관계가 있다고 윌킨슨은 지적합니다(그림3). ‘사회적 기울기’란,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 비해 그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 건강 문제를 더 많이 겪는 현상을 일컫는데, 즉 그림3은, 이미 높은 수준의 경제적 부를 일군 나라들에서는, 이같은 문제들을 좌우하는 인자가 절대적인 소득의 크기가 아니라, 상대적인 소득의 격차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셈입니다.



그림3. 소득 불평등과 건강 및 사회 문제 지수. https://youtu.be/cZ7LzE3u7Bw



대체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요? 왜 평등한 사회일수록 더 건강할까요? 저자들에 따르면, 불평등이 심한 사회에서는 우월한 사회경제적 지위의 확보를 위한 경쟁이 심하고, 따라서 지위의 확보 및 유지와 관련한 불안, '지위 불안'도 심하기 때문입니다(윌킨슨과 피켓 교수의 연구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으로는 “평등해야 부자도 오래 산다”라는 한겨레 기사(http://m.hani.co.kr/arti/461076.html#cb) 참고). 이런 연구 결과가 시사하는 정책적 함의는 분명합니다. 경제적으로 이미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나라들에서는, 더 이상 경제 성장이 삶의 질을 높여주지 못합니다. 이제는, 성장이 아닌 분배 정책이 우선이어야 합니다!



근데, 과연 그럴까요? 2009년 «평등이 답이다(The Spirit Level)»를 펴낸 직후 윌킨슨과 피켓은 미디어의 집중적인 관심을 얻었지만, 그만큼 이들을 향한 비판도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피켓과 윌킨슨 교수에 의하면, 비판자들은 매 분석마다 표본 가운데 어떤 나라들은 포함하고 어떤 나라들은 제외하며, 분석할 변수가 달라질 때마다 그 나라들을 갈아 치우는 방식으로, 소득 불평등과 사회 문제들 간의 통계적 관계가 사라지도록 만들었을 뿐입니다. 비판자들이 제 입장에 유리한 사례들만 선별적으로 고르는 '체리 피킹'을 했다는 지적으로 해석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표본을 바꾸든, 이들 사회 건강 문제를 모두 합해 지수화하면 여전히 소득 불평등과 강한 통계적 관계가 있다고 저자들은 응수합니다(https://www.equalitytrust.org.uk/resource/authors-respond-questions-about-spirit-levels-analysis).



그러나 비판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꾸준히 끈질기게 윌킨슨과 피켓 교수의 저서를 비판해온 Christopher Snowdon에 따르면, 피켓과 윌킨슨이야말로 체리 피킹을 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저자들은 조세회피국을 표본에서 제외하기 위해 표본을 인구 수 300만 이상의 국가로 제한했는데, 저자들이 밝힌 이유라면 인구 수 100만 이하의 나라들을 제외하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더 많은 나라들을 표본에서 제외한 것은, 저자들의 입장을 지지하는 사례만 남겨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관계를 만들기 위한 체리피킹이라는 것이지요. Snowdon이 «평등이 답이다(The Spirit Level)»의 출간 후 10년이 지난 시점의 데이터로 소득 불평등과 여러 건강 및 사회 문제들 사이의 관계를 다시 통계적으로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대부분의 분석에서 소득 불평등과 사회 문제들 사이에는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없었다고 합니다(http://spiritleveldelusion.blogspot.com/2019/03/the-spirit-level-ten-years-on.html).



윌킨슨과 피켓의 연구에 대해 유의할 점은, 이들의 통계적 분석 대부분이 주어진 한 시점에 국가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횡단면적 상관관계에 대한 분석이라는 점입니다. 윌킨슨은 «평등해야 건강하다»에서, 1970-80년대의 자료들에서 관찰되었던 소득 불평등과 수명 사이의 상관관계가, 일시적으로 사라졌다가 일정한 시간적 간격을 두고 다시 나타나기 시작한 현상에 대해 언급한 바 있습니다(pp.143-44). 그 이유는 소득 불평등에 영향을 받지 않는 노인층의 사망률 때문이었지요. 이런 현상에 대해서 윌킨슨은 노인 사망률에 영향을 미치는 연금 제도의 정착과 의약품의 보급으로 말미암은 것일 수 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최근의 데이터에서도 소득 불평등과 기대수명을 포함한 여러 사회 문제들 사이의 상관관계가 없다는 Snowdon의 분석 역시, 건강 지표에 영향을 미치는 어떠한 다른 변수의 변화로 인한 현상인걸까요? 즉, 그래서 특정한 한 시점이 아닌 긴 시간적 지평을 두고 보면 불평등과 기대수명 사이의 관계가 과연 나타날까요? 이 가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시간의 변화에 따른 변수의 변화를 추적할 수 있는 패널 데이터가 필요합니다. 변수들을 여러 시점에 걸쳐 반복 측정한 패널 자료는, 한 시점의 변수 간 상관관계를 보여줄 뿐인 횡단면 자료보다 더 인과 추론의 타당성을 보태주는 자료이기 때문입니다.



세계은행의 'World Development Indicators' 데이터를 이용해, 간단한 패널 데이터 분석을 해보면 아래와 같이 소득 불평등과 기대수명 사이에 뚜렷한 인과관계가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림4는 2010년 달러 기준 1인당 GDP가 2만 달러 이상인 국가들을 표본으로, 1980년부터 2015년까지 5년 간격으로 측정한 기대수명과 1인당 GDP, 지니계수를 고정효과 모형으로 분석한 결과입니다. 즉, 연도와 국가 등 조사 단위의 고유한 상수적 특성을 통제하여, 독립변수(지니계수)가 아닌, 관측되지 않은 교란요인으로 인한 종속변수(기대수명)의 변화를 통계적으로 처리하는 방법입니다. 그 결과, 1인당 GDP 로그값의 1 표준편차 증가는 0.16 표준편차의 기대수명 증가로 이어지지만, 지니계수의 같은 변화가 기대수명의 변화로 이어지는 관계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43개 유럽 국가들을 표본으로 고정효과 모형으로 분석한 결과, 기대수명과 불평등 사이의 관계는 사라졌다는 Hu et al. (2015)의 연구 결과와도 비슷합니다.



그림4. 지니계수와 기대수명. 세계은행 WDI 자료 통계 분석.



소득불평등을 지니계수가 아닌 다른 지표로 측정하여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World Inequality Database(https://wid.world/data/)에서 상위 10%의 소득 집중도(세후 소득 기준) 데이터를 얻어 같은 모형으로 분석하여도, 아래 그림5와 같이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결과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GDP와 기대수명 사이의 관계가 통계적으로 유의하지 않다는 차이 정도가 있을 뿐입니다(기대수명과 GDP의 관계에 대해서는 https://brunch.co.kr/@kuy06154/12 참고).


 

그림5. 상위 10% 소득집중도와 기대수명



윌킨슨과 피켓은 쏟아지는 비판에 대해, 정치적 의도를 위해 만들어진 근거 없는 비난들과, 제대로 된 비판을 구별하겠다는 이유로, 모든 차후의 논쟁은 피어 리뷰를 거친 논문으로 이뤄질 것이라고 선언해버렸습니다(https://www.equalitytrust.org.uk/resource/authors-respond-questions-about-spirit-levels-analysis). 그럼, 피어리뷰를 거쳐 출판된 학술 논문들은 윌킨슨과 피켓의 이론을 얼마나 지지하고 있을까요? 관련 연구들에 대한 리뷰 논문들 가운데에서도 윌킨슨, 피켓 (2006), 피켓, 윌킨슨 (2015)과는 달리, Lynch et al. (2004), Macinko et al. (2003) 등은 소득 불평등과 건강 사이의 관계는 불분명하다는 결론에 힘을 실어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소득 불평등과 건강 사이의 관계는 윌킨슨과 피켓 교수가 자신있게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매우 불분명한 것 같습니다. 애초 윌킨슨과 피켓에 따르면 비만, 살인, 정신질병 등 거의 모든 사회 문제들을 설명할 줄로만 알았던 '불평등'이라는 열쇠는 사실 만능키가 아니었던 겁니다. 윌킨슨과 피켓의 연구 결과에 기대어 선진국에서는 이제 불평등과 분배 문제가 정책의 우선 순위여야 한다고 주장해왔다면, 사실 그 주장이 발을 디딜 곳은 입지가 위태로운 셈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불평등'이라는 문제의 정치적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닐 겁니다. 다만, 불평등이 건강과 관계를 맺는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보다 정치한 접근이 필요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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