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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인 Oct 24. 2021

문제는 정치야, 바보야!




 교육은 이렇듯 개인위생과 관련한 지식을 공급해 인구의 건강을 증진하고 수명을 향상시킬 뿐만 아니라, 동시에 기술 지식의 확산을 통해 경제를 성장시키는 중요한 변수였다. 그래서 이스털린은 ‘왜 어떤 나라들은 발전하고, 어떤 나라들은 뒤쳐지는가’라는 개발 문제의 근본적 질문에 답하는 건, 곧 교육 확대의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답하는 것으로 귀결된다고 보았다(Easterlin, 1981). 스티븐 핑커 역시 "교육의 발달은 인간의 진보를 이끄는 사령부(«계몽»; 363)"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교육 확대의 배경에는 어떤 원인이 있었을까?


 이스털린에 의하면, 공적 교육의 확산은 정치적 조건이념에 크게 영향을 받았는데, 이는 교육이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력을 미치는 효과적인 수단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회적·정치적으로 권력을 획득하거나 유지하려는 사회 세력은 교육에 큰 관심을 둘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정치적 이해득실에 따라 어떤 세력은 지배를 위해 대중들의 교육 수준을 낮게 유지하려 했다면, 어떤 세력은 대중들이 교육을 통해 의식적으로 각성하길 원했다. 공적 교육 확산의 배경에 집단들 사이의 정치적 동역학이 중요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다. 이스털린이 가장 먼저 지목하는 사례는 식민지들의 독립이다(Easterlin, 1981; 11-12). 많은 경우 식민 정부에 비해 독립 이후 수립된 정부들이 대중 교육의 확산에 힘써, 식민지배를 겪은 여러 나라들에서는 독립 이후 대중의 취학률이 급격히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 물론 예외도 있다. 식민 지배 하에서도 교육이 확대되는 사례도 있는가하면, 독립이 반드시 교육의 확대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식민 지배를 겪지 않았음에도 저조한 교육 수준을 보이기도 한다. 식민 지배를 겪지 않은 나라들 가운데에 교육 수준이 낮았던 터키, 이란, 중국과 같은 나라들의 공통점은, 이스털린에 의하면 대중교육의 확산이 권력 유지에 위협적이라고 판단했던 절대왕정 국가들이었다는 것. 그에 비해, 공산주의 정권은 대중의 정치화를 위한 수단으로 교육을 적극 활용하는 자세를 보였다. 1920-40년 사이에 초등 취학률이 가장 가파르게 높아진 구소련의 사례가 이를 뒷받침한다.


 사회학자 만자노(Dulce Manzano)의 최근 분석은 1960년 이후 약 반세기에 걸친 자료들로 그 정치적 역학을 보다 구체화한다(Manzano, 2017). 만자노에 의하면 어떤 조건에서는 독재 체제가 오히려 대중의 취학률을 확대하는 역할을 한다. 많은 학자들은 경제 성장으로 인한 소득의 향상이 취학의 인센티브를 높여 역으로 교육 수준의 향상을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논의해오기도 했는데, 만자노의 분석에 따르면 경제의 성장이 대중 교육의 확대로 이어지는 인과 역시 이 독재 정치와의 상호작용 하에서야 성립했다. 이 정치적 변수를 포함한 만자노의 모형에서는, 1인당 GDP의 증가가 취학률의 확대로 이어지는 관계는 그 크기가 작거나, 혹은 통계적으로 유의하지 않았던 것(149-151, 157-8). 다만, 독재 정권이 빈곤층을 그 지지 기반으로 동원할 때에만, 독재 정권 하의 경제 성장이 교육의 확대로 이어졌다. 1960년 이후 취학률의 확대를 설명하는 중요한 원인은 이 계급 동원의 정치였다. 물론, 민주적 선거가 발달하지 않은 독재 국가에서 정권의 지지 기반이 되는 집단의 인구사회학적 특성을 식별하기란 어려운 일인데, 만자노가 이 연구에서 그 러프한 지표로 이용한 정보는 정부의 이념 성향이었다. 즉, 독재 정부가 좌익 이념을 표방해 빈민들을 지지 기반으로 할 때에야 경제 성장이 교육의 확대로 이어졌다.


 이처럼, 민주주의가 반드시 교육의 확산에 이롭지는 않다는 사실이, 역사적 자료들을 계량적으로 분석한 최근 연구들에서 제기되고 있다. 특히, 1820년 이후 2010년 까지의 민주화와 대중 교육 확대 사이의 장기적 관계를 연구한 정치학자 파글라얀(Augustina S. Paglayan)의 분석에 따르면, 평균적으로 6-70%의 취학 연령 아동이 민주화 이전 이미 초등 교육을 받고 있었으며, 민주화가 취학률의 확대로 이어지는 인과관계는, 보다 세련된 통계 모형으로는 확인되지 않았다(Paglayan, 2020).


 “계몽=고전적 자유주의”라는 핑커의 도식으로는 '계몽'의 결실인 지식 확산(교육)의 배경에 이런 비민주적·반자유주의적 정치가 중요하게 작용했다는 사실이 매끄럽게 설명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물론 바람직한 가치이지만, 민주주의가 항상 모든 면에서 가장 바람직한 사회적 결과를 산출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그야말로 지나친 낙관주의다. 오늘날 민주주의가 직면한 가장 큰 정치적 도전도 이 사실과 관련있다. 최근 몇십 년 간 가장 성공적이었던 사회적 진보의 사례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닌, 일당 독재 국가 중국에서 발생했다는 것.




 중국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보자. 드레즈와 센은 중국과 인도의 수명 추이를 비교하며, 한 국가의 평균 수명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정책 요인들을 지목한다(Drèze & Sen, 1991, chapter 11).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살고 있어서 사회 발전 지표의 세계적 트렌드를 좌지우지하는 중국 인도는, 1950년을 전후로 40세 안팎의 비슷한 기대수명을 가지고 있었던 동시에, 매우 높은 문맹률과 세계 최저 수준의 국민소득 등 굉장히 비슷한 조건을 공유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 후 크게 벌어진 두 나라의 수명 차이를 두고 흥미로운 비교가 가능하다. 한스 로슬링이 그의 저서 «팩트풀니스»에서 보여준 평균 기대수명 추이를 나타내는 그래프에서(p.83), 1960년 경의 움푹 패인 골짜기를 만들어낸 중국의 대기근도, 이런 비교적 방법은 꽤나 명쾌하게 설명해준다. 중국과 인도는 매우 다른 정치체제를 선택했다. 공산당의 일당독재 체제를 확립한 중국에 비해, 인도는 의회 민주주의 제도를 안착시켰다. 1958년에서 1961년 사이 중국이 겪은 대기근과 같은 현상을 설명해주는 것이 바로 이 차이다. 인도에 비해 정부의 국정 운영에 대해 비판적인 언론과 정치적 반대파의 역할을 기대할 수 없었던 중국의 권위주의 체제에서는, 대기근과 같은 재난에 대한 신속한 정책 대응을 가능케 하는 정보적 효율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반면, 언론의 자유와 정치적 반대파가 정부를 견제했던 인도는 1943년의 벵골 대기근 이후로는 중국의 1958-61년의 대기근에 비견할 만한 기근 사태는 겪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 더 지적해야 할 사실이 있다면, 대기근을 겪던 시점의 중국은 이미 다른 저개발 국가들에 비해 낮은 수준의 사망률을 기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한스 로슬링은, 짧은 시간 안에 벌어지는 변화에 비해, 긴 시간 간격을 두고 천천히 일어나는 변화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둔감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50년대 이후 벌어진 중국과 인도의 사망률 격차를, 중국의 대기근으로 인한 사망자 수와 직접 비교해보아도 새삼 그런 사실을 느끼게 된다. 아래 그림2에서 보듯, 1960년만 하더라도 큰 차이가 없던 중국과 인도 사이의 기대수명의 격차는 그 이후 급격히 증가한다. 드레즈와 센에 의하면, 이렇게 벌어진 중국과 인도의 평상시 사망률 격차는, 인도의 인구 규모를 감안하면, 수천만명을 아사시켰다는 그 중국의 대기근이 인도에서 8년마다 벌어지는 것과 산술적으로는 동일한 규모였다(Drèze & Sen, 1991). 인도는 대기근과 같이 짧은 기간 안에 급격히 사망자가 늘어나는 "뉴스" 이벤트에 대해서와는 달리, 장기간에 걸쳐 만성적으로 나타나는 높은 영양실조와 평상시의 높은 사망률에 대해서는 중국에 비해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던 것. 그럼, 무엇이 중국과 인도 사이의 큰 사망률 격차를 낳은걸까?


그림2. 중국과 인도의 기대수명 추이


 그 이유는 두 나라가 채택한 사회 정책에 있었다. 센과 드레즈는 중국이 비슷한 출발선에서 시작해 인도를 크게 앞지른 요인으로 식량의 공적 조달, 공적 보건 의료, 교육을 지목한다(Drèze & Sen, 1991). 사회주의 국가였던 중국에서 인도에 비해 식량, 의료, 교육 등의 공공성이 매우 높았던 것. 앞서 드레즈와 센은 1980-90년대 중국의 기대수명 증가 속도가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Drèze & Sen, 2002). 1950년대 이후 중국의 수명이 급속히 증가한 원인을 사회복지의 공공성에서 찾으면, 이런 공공성이 해체되기 시작하는 개혁개방 이후에, 높은 경제 성장률에도 불구하고 수명 증가는 비교적 정체하게 되는 현상까지도 매우 잘 설명할 수 있게 된다.


 물론, 다행스러운 점은 이런 사회복지 정책이 반드시 공산당 일당독재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것. 인도의 자치주 케랄라(Kerala)의 사례 역시 사회서비스의 공공성이 수명 증가의 결정적인 원인이라는 논리에 증거를 보태준다.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인도의 주들 가운데 소득 수준이 가장 낮았던 케랄라 주는, 1976-80년 이미 인도 전체의 평균 기대수명인 52세에 비해 훨씬 높은 수준인 66세의 수명을 기록한다. 인도에 비해 훨씬 앞서있던 중국과도 비슷한 수준이었다. 케랄라 주를 인도의 다른 자치주들과 구별지어주는 특징이 역시 사회복지의 높은 공공성이었다. 그리고, 인도의 다른 지역들과 차별화되는 케랄라의 이런 독특한 좌표에는 사회운동의 힘이 있었다. 세계 최초로 민주적 선거를 통해 공산당이 집권한 정치적 사건을 낳은 주민들의 높은 공적 참여와 대중 운동의 전통이 그것(강현수, 2010).




 하지만, '탈정치화'를 지향하는 스티븐 핑커의 사회적 진보에 대한 기술은, 이런 사회 운동의 역할을 누락하고 있다. 역사학자 데이비드 벨이 지적한 것처럼, 한국어 번역판을 기준으로 863쪽에 달하는 두꺼운 벽돌책에서, "수세기 동안 평등권과 노예제 폐지, 노동조건 개선, 최저임금, 결사권, 기본적 사회보장, 더 깨끗한 환경, 다른 수많은 진보적 이상을 위해 투쟁한 사회 운동"에 대한 이야기만큼은 찾아보기가 어렵다(Bell, 2018). 그래서 위생개혁의 배경에 있었던 조직 노동자들의 급진적 사회 운동과 정치 참여에 대한 이야기도, 대중 교육 확산을 낳았던 사회 집단들 사이의 정치적 역학도, 스티븐 핑커의 책에서는 알 수가 없다.


 물론 이유야 어쨌건 인류의 수명은 계속 증가해왔으니, 정치적 의지만 뒷받침된다면야 앞으로도 많은 나라들이 더 긴 수명을 누릴 수 있을 거란 ‘낙관’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스티븐 핑커도 교육과 공공 의료, 인프라, 사회보험에 대한 정부의 투자가 삶을 개선하는 데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계몽»; 149, 176-8, 551-2). 하지만 이에 대한 그의 설명은 여전히 탈정치적이고 이념중립적이다. 핑커에 의하면, 경제가 부유해질수록 정부 지출도 따라서 자연히 증가하는 사회적 법칙이 있는데, 즉 ‘바그너 법칙’이라고 알려진 법칙이다.


 사실, ‘바그너 법칙’은 인구 구조의 변화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경제학자 셸턴(Cameron Shelton)은, 1970년에서 2000년에 이르기까지 100개에 이르는 국가들의 데이터를 통해 정부의 지출과 관련되어 있는 변수들을 통계적으로 분석한 결과, 인구 구조를 통제하자 국가별 1인당 GDP와 GDP 대비 정부 지출 비율 사이의 관계는 유의미하지 않게 되었다고 보고한다(Shelton, 2007). 교육, 의료, 사회안전망 등의 정부 지출의 개별 항목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즉, 노인의 비율이 많은 나라들은 더 부유한 나라들이고, 동시에 은퇴한 노인들의 사회적 보호를 위해 사회안전망에 대한 지출이 높을 수밖에 없는 나라들이었다.


 중요한 건, 이념중립적인 인구학적 변화와 같은 비정치적인 원리만으로는 정치적 선택에 의해 좌우되는 복지체제 사이의 질적 차이는 설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우선, 적어도 비교적 부유한 OECD 국가들 사이에서는 정치적 이념과 GDP의 상호작용이 정부 지출 비율에 큰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난다(Pickering & Rockey, 2007). 즉, 재화와 서비스의 공급에 있어서 정부의 역할을 선호하는 정도에 따라 평균적인 유권자의 이념을 좌-우 1차원으로 측정했더니, 유권자의 좌익 성향이 높을수록 GDP의 한 단위 증가가 정부 지출의 증가로 이어지는 정도가 훨씬 컸다. 단적으로, ‘사민주의’ 스웨덴과 ‘자유주의’ 미국 사이의 차이가 이런 이유로 설명이 된다.


 사회복지학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을 창시한 에스핑-앤더슨(Esping-Andersen)은 이 ‘스웨덴’과 ‘미국’ 복지체제의 질적 차이를 잘 설명해낼 수 있는 분류체계를 고안해내었다(Esping-Andersen, 1990). 그는 사회 복지 제도의 존재나, 사회 복지에 단순히 얼마나 많은 돈이 쓰이는지보다도, 복지국가를 유형화하는 특징적 요소들이 있다고 보았다(pp.2-3). 에스핑-앤더슨에 의하면, 나라들마다 계급정치의 상이한 역사적 경로를 거치며, 서로 다른 복지체제를 발전시켜 왔고, 그런 복지국가들 사이의 차이에 가로놓여져 있는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가 노동력의 ‘탈상품화’였다. 즉, 자본주의가 야기한 노동력의 상품화로부터 노동자들의 사회적 권리를 보호하는 개념이다. 사회복지 급여의 소득대체율이 높고 포괄 범위(coverage)가 넓을수록 탈상품화의 정도도 높다. 사민주의 세력의 주도로 복지국가가 건설된 스웨덴 등의 노르딕 국가들이 탈상품화 수준이 가장 높으며, 이념적으로 그 반대편에 있는 미국 등의 자유주의 복지국가가 탈상품화 수준이 가장 낮은 나라들이다. 그리고 이 복지체제의 차이는, 복지국가들 사이의 건강 차이를 설명하는 변수로서 주목받아 왔다. 많은 연구들은 복지체제와 이를 형성한 정치적 전통이 공중의 보건 및 위생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영유아 사망률과 긴밀한 통계적 관계가 있다는 결과들을 보고하고 있기 때문이다(Bambra, 2006; Navarro et al. 2006; Muntaner et al., 2011).


 그리고, 이런 정부의 사회 정책들은, 스티븐 핑커가 지지하는 고전적 자유주의 정치의 결과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가 비방을 아끼지 않는 이데올로그들, 즉 그의 표현으로는, "시장을 경멸하고 마르크스주의와 로맨틱한 시간을(«계몽»; 550)" 보낸 이들이 가능케한 정치적 성과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사회보험 정책의 확대가 국제 공산당 코민테른의 활동과 긴밀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2019년 미국정치학회(APSA)에서 발표된 한 논문은 통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Rasmussen & Knutsen, 2019). 논문의 저자들은, 노르웨이에 대한 사례연구를 통해, 사회복지 정책이 러시아에서 이뤄진 노동자 혁명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한 타협안으로서 수용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런 사정은 노르웨이에만 국한된 특수한 경험이 아니었다. 러시아 혁명 이후 창립된 국제 공산당 조직 '코민테른'의 초청을 받거나, 혹은 코민테른 대회에 참석해 표결권을 행사한 조직이 있었던 나라들에서, 그렇지 않은 나라들에 비해(1인당 GDP 같은 변수를 통제했을 때에도), 1925년 노인연금이나 실업 및 가족수당 등 사회 이전(social transfer) 프로그램의 적용 범위가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더 컸다는 사실을 저자들은 보여준다. 즉, 코민테른에서 활동할만큼 노동자들의 정치세력이  조직화되어 혁명의 위협을  크게 느낀 나라들일수록,  관대한 사회복지 정책을 시행했다는 것.


 사회 보장 제도에만 이런 현상이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스티븐 핑커는 미국과 서유럽에서 1870년 경 주당 62~66시간에 이르렀던 노동시간이 오늘날 불과 40시간이하로 줄어들었다고 말한다(«계몽»; 382). 그는 17장에서 노동시간을 줄이고 여가를 늘려준 동력으로 '노동 운동'과 '노동 관계법' 역시 짧막하게 한 줄 언급하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장을 기술 진보로 인한 노동 생산성 향상에 할애한다. 사실 그가 인용하는 노동 시간 그래프의 시계열이 노동시간이 크게 치솟아 정점을 찍었던 산업혁명기 직후부터 시작하고, 노동 생산성이 훨씬 낮았던 산업혁명기 이전 유럽 사회에서의 노동시간은 그보다 짧았다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Schor, 1991; Chapter3), 핑커가 간과하는 건 기술적 진보에 말미암아 사회적 진보를 성취하는 최종적 역할은 결국 정치에 있었으며, 그 배경에 또한 코민테른의 활약이 있었다는 점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각 나라들의 노동시간 감소를 리드했던 것도, 코민테른에 초대된 노동자 세력이 조직화되어 있던 나라들이었다(Rasmussen & Knutsen, 2019). 1916년 대부분의 나라에서 주 65시간에서 70시간을 상회했던 노동시간이, 이 나라들에서는 러시아혁명이 있었던 1917년을 거치며 1919년까지 10시간 이상 급격히 감소했고, 그에 따라 나머지 나라들과 벌어졌던 격차도 이후 점점 감소하며 전체적인 노동시간 감소를 낳았다. 이 나라들이 다른 사회복지 정책들의 진보 역시 이끌었다는 사실은 앞에서 본 바와 같다. 즉, 1917년 러시아에서의 혁명이 러시아를 비롯한 소비에트 연방과 구 공산권에서는 권위주의적 정치체제로 귀결되었을지 모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이념이 노동시간 법제와 각종 사회보장제도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사회권을 한층 넓히는 데 톡톡한 역할을 한 노동 운동을 자극하기도 한 셈이다.


 물론, 사회 진보가 경제의 성장과는 관계가 없고 오로지 정치만이 그 원인이라고 말한다면, 그것 역시 지나친 관점이며, 사실이라고 할 수도 없다. 수명과 국민소득 사이의 시계열적 관계가 약하다고 해서 경제 성장이 건강의 증진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도 지나친 주장이다. 예컨대 의료 서비스 및 양질의 식품 생산과 같은 부문의 성장은 국민 건강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며, 따라서, 해당 부문의 성장으로 경제가 커지면, 경제 성장이 건강의 증진으로 이어지는 통계적 관계가 나타날 수도 있을 테다. 하지만, 건강 증진에 분명한 기여를 하는 구체적인 부문의 경제 활동을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경제 성장을 추구하며 그 부산물로 복지의 증진을 기대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일까? 중국처럼 1인당 GDP의 큰 폭의 향상 없이도 수명이 크게 증가한 사례는 있어도, 마찬가지의 GDP의 향상이 항상 큰 폭의 수명 증가로 연결된 것은 아니란 역사적 사실을 상기해보자. 요컨대, 경제 성장이 건강의 증진에 기여하는 긍정적 효과는 그 이득이 분명한 구체적 경제 활동의 효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경제 활동이 건강의 증진 등 사회 진보에 기여하도록 조율하는 최종 심급은, 결국 정치일 것이다.


 한마디로, 인류의 삶의 질을 한층 높여준 사회적 변화들은, 근대 자본주의가 가져온 경제적 풍요 이상으로, 자본주의를 비판적으로 견제하고 극복하려 해온 ‘정치’에 의해 가능해졌다. 핑커는 사회 지출이 사회주의의 원칙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자유 시장 자본주의는 어느 정도의 사회 복지 지출과도 양립 가능하며, 오히려 자본주의 국가들이 그 이전 사회에 비해 전체 경제의 점점 더 큰 몫을 사회 지출에 할애하고 있다고 말하지만(«계몽»; 174-6), 지금까지 보았듯, 사실 여기에 바로 '사회 운동'과 ‘정치’의 역사적 역할이 있었다. 자본주의의 그런 변화를 이끌어낸 핵심에 자본주의에 도전해온 정치가 있다는 것. "자본주의 옹호론을 읽는 순간 입에 물고 있는 음료를 바지에 쏟(«계몽»; 149)"을 정도로 자본주의를 싫어한 이들의 역사적 역할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에스핑-앤더슨의 복지국가 유형론은 물론이고, 피터 홀(Peter Hall)과 데이비드 소스키스(David Soskice)의 ‘자본주의 다양성(VOC)’ 개념(Hall & Soskice, 2001)이 모두 이 정치의 심급에서 나타나는 변화들을 이론적으로 개념화한 작업들이기도 하다. "진보를 싫어(«계몽»; 71)"하는 "지식인"들이 핑커의 주장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는 사실, 경제의 발전과 기술의 진보에 대한 관심에 비해, 진보적 사회 운동과 정치가 인류 복지에 미친 굵직한 성과들을 다루는 데에는 그가 이렇게 인색했던 까닭이다. 스티븐 핑커는 "진보(progressive)"들이 진보(progress)를 싫어한다며 불평하기 전에, 이들에게 제 몫의 정당한 평가를 돌려주어야 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문제는 정치야, 바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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