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 선생이 돌아가시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저 매화나무에 물을 주어라"였다고 한다. 이황은 매화를 유독 좋아하여서, 이를 안 기생 두향이 귀한 백매화를 선물하였는데 애지중지 키웠다고 한다. 그래서였는지 70세가 다 되어 운명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매화나무를 챙겼다.
얼마 전에 장 보러 갔다가 동네 꽃집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꽃집 창가에 놓인 커다란 매화 화분이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꽃집 안으로 들어가서 매화 화분을 자세히 보았다. 동그란 돌 항아리 같은 화분에 꽃이 활짝 핀 백매화 한 그루가 아름답게 심어져 있었다. 무언가에 홀리듯이 비싼 매화 화분을 사서, 집으로 배달해 달라고 하고 꽃집을 나왔다. 다음날 집으로 배달되어 온 매화 화분을 보니 보기보다 무거워 혼자 들기도 싶지 않았다.
우리 집에 온 매화 화분은 3일도 안돼 꽃이 떨어지는 것 같더니, 5일 만에 꽃이 누렇게 시들어져 앙상한 모습으로 변모하였다. 내 집에 온 귀한 생명인데 죽어가는 것 같아 걱정이 되어 꽃집에 원인을 물어보러 갔다. 내가 잘 못 키운 것인지, 우리 집 환경이랑 맞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키우기 까다로운 품종이라 그런 것인지, 꽃집 주인은 일단 물을 주어 보라고 했다. 원래는 열흘 정도에 한 번 물을 주면 되지만, 식물이 꽃을 피울 때는 물을 많이 먹는다고 했다. 화분의 흙을 들쳐 보아 수분감이 없으면 물을 흠쁙 주어보라고 했다. 집에 돌아와서 화분 받침에 물이 흘러내릴 정도로 충분한 물을 주었다. 화분에 깔린 작은 돌에 물이 스며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 날 보니 앙상하게 말라가던 가지에 약간 푸른빛의 물기가 돌면서 생기가 도는 느낌이 들었다.
매화 화분
생명을 가진 것을 키운다는 것은 사실 엄청난 책임감을 요하는 일이다. 그 대상이 아이이던 강아지던 식물이던 상관없이 하나의 생명을 책임진다는 것은 쉽게 생각할 일이 못된다. 옛날에 우리 집 아이들이 강아지를 키우고 싶어 한 적이 있었다. 내가 너희들이 며칠 예쁘 하다가 나중에 똥오줌도 안 치우고 제대로 돌보지 않으면 어떻게 하냐고, 일단 제일 키우기 쉬운 동물부터 키워보고 잘 키우면 강아지 키우는 것도 고려해 보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마트의 애완동물 코너에 가서 물어보니 거북이가 가장 오래 살고 키우기 쉽다고 해서 거북이를 한 마리 사서 아이들이 키운 적이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의 관심은 금방 없어졌고, 몇 달 뒤에 제주도로 장기 가족여행을 가면서 남동생에게 임시로 맡겼다. 여행에서 돌아와 보니 남동생이 잘 키우고 있는 것 같아서 그대로 계속 맡겼다. 몇 년 동안 동생이 거북이에게 들이는 정성을 보니 참 대단했다. 엄청나게 많은 거북이 용품들을 사들였고, 꾸준히 정성을 들여 손바닥만한 거북이를 몇 배 크게 키웠다. 가끔씩 보면 말 못 하는 거북이와도 애칭을 불러가며 대화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얼마 전에 입양한 부모가 아이를 학대해 죽인 뉴스가 나온 적이 있었다. 처음부터 나쁜 마음으로 아이를 입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처음에는 아이가 예뻐 보이거나 사회적으로 좋은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런데 한 생명을 키운 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내가 한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책임진다는 마음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동물이나 식물도 마찬가지이다. 처음에 개나 고양이가 예뻐 보여서 입양했다가 막상 키워 보니 똥오줌 치우는 것도 만만치 않고, 귀여울 때도 있지만 힘들 때도 많아 방치하거나 파양 하는 경우도 많다. 식물은 동물과 달라 눈에 띄는 큰 움직임이 없는 것 같지만 살아 있는 생명은 모두 마찬가지이다. 예쁘다고 사온 식물이 말라죽어가면 내가 제대로 돌보지 못해 하나의 생명을 죽인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그래서 잘 키울 자신이 없어서 집에 반려동물이나 식물 같은 생명 있는 것을 두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하나의 생명이 온다는 것은 하나의 우주가 오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를 둘 키워 보니 희로애락의 모든 감정이 들 때가 있다. 내 자식이니까 예쁠 때가 많지만, 좋은 날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생명을 가진 것을 대할 때는 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다시 이황 이야기로 돌아오면, 이황은 조선시대의 유학자들과는 다른 인간적인 면이 있는 것 같다. 이황의 일화에 보면 부인에 대해 전해 오는 미담이 있다. 이황이 젊은 날 상처를 하였는데, 두 번째 부인을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을 들였다. 그 이유는 이웃에 귀양 온 권질이라는 사람이 정신이 온전치 못한 자신의 딸을 이황에게 재혼해 달라고 부탁하였기 때문이다. 이황의 부인은 어린 시절 사화로 인한 큰 충격을 받아 어린아이 정도의 정신세계에 머물렀다고 한다. 하루는 할아버지 제삿날에 부인이 배를 하나 치마 밑에 감추었다가 떨군 일이 발생했다. 형수가 화를 내는데, 이황이 부인을 조용히 불러서 왜 그랬냐고 물으니 '배가 먹고 싶어서요'라는 대답에 손수 배를 깎아 주었다고 한다.
이황도 사람인 이상 괴롭지 않은 순간이 없지 않았겠지만, 부드러운 연민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였던 것 같다.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이황의 매화처럼 향기롭게 살고 싶지만, 사람의 미래 일은 알 수 없는 거다.
내 매화나무는 열심히 물을 주었지만, 얼마 가지 못해 벌레가 많이 생기더니 병들어 시들어버렸다. 병들어 죽어 가는 매화나무를 보면서 이 작은 나무 하나도 제대로 키우지 못했다는 엄청난 자괴감이 들었다. 내가 키울 수 있는 것은 귀한 매화가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도 쉽게 자랄 수 있는 튼튼한 녹색 식물 정도인 것 같다.
퇴계처럼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글 : 이계원(공유경제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