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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기린 Jan 14. 2023

퇴사의 기분은 이런 기분일까?

'퇴사 의사이신가요?'


A4 한 페이지 분량이 되는 면담 사유를 한동안 털어낸 뒤 들은 첫마디였습니다.



워낙 많은 이야기를 털어낸 직후라 어떤 답변이 첫마디로 나올지 여러가지를 예상했지만 10글자도 안 되는 답변이 나온다고 예상해내기엔 여간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황당함과 부끄러움, 안 속 깊은 곳에서 끌어 나오는 화와 약간의 체념까지 여럿 감정이 섞인 한 마디밖에 할 수 없었죠.


'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고 단 2주가 지난 시간,
마음을 다잡고 시작한 날갯짓이 힘을 다하는데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누군가는 의지력이 약하다 노력이 부족하다 하겠지만, 도망치듯 나온 걸 변명하진 않으나 그 선택감정 단 한 스푼도 섞지 않은 순도 100% 이성적인 선택었습니다.


회사를 운영하기 힘든 시기입니다.


물가와 금리는 서로 말이라도 맞춘 듯 불편한 동행을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지속하고 있으며 그로 인한 고통은 회사도 그리고 거기를 생업으로 여기고 있는 직원들에게도 동일하게 쥐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회사가 이 위기를 대하는 태도는 달랐습니다. 현재 자금이 없다는 식의 소극적인 월급 지연 지급 공지, 납득이 되지 않게 급작스럽게 시작한 수주작업, 이 모든 걸 그 어떤 목적도 프로세스도 설명하지 않은채 그저 하루 할당량을 채우고 퇴근하라는 회사의 강압적인 태도.


고통이야 다 같이 참고 버티면 그만인 사람들도 회사에 충분히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폭풍우 끝에는 언제나 따뜻한 햇살이 찾아오듯 서로 의지하며 버틸 수 있다면 그런 믿음을 가지고 현재보단 미래를 보며 동행할 사람들이요.


그런 사람들을 위해 지금 필요한 건 저와 같은 사람들이 회사에 남아 있어야할 충분히 납득될 만한 이유라고 생각했죠.


제 면담은 그 이유의 답변을 받기 위한 의도였습니다.


지금 그렇게 월급이 밀릴 정도로 힘들다면 회사의 장기적인 비전이 뭔지. 이 위기를 타개할 타개책이 뭔지. 불안한 직원들을 위해 그런 사실 하나 공유 못해줄 정도는 아니지 않냐고...


회사를 운영하는 경영진이 불안한 만큼 이를 생업으로 생각하고 다니고 있는 직원들도 불안하다고...


하지만 제가 그런 회사의 타개책을 알 정도의 가치도 없었는지 아니면 실제로 타개책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었는지 제가 들은 첫마디는 앞선 그 한마디였습니다.




면담이 끝나고 난 후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A4 용지 한 분량의 질문들에 대한 원하는 답은 단 하나도 듣지 못했으며 저를 빨리 피하고 싶은 그 표정과 분위기는 말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조금이나마 회사의 핵심 요원이라 생각이 들었다면 그런 면담이 있을 수 있었을까 약간의 허무한 기분도 들었습니다.


회사를 다닌 지 1년 반 또다시 사수가 사라지고 모든 업무에 책임이라는 잣대가 생긴 지 1년이 넘은 지금 다시 한번 퇴사라는 결심이 들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퇴사의 기분은 이런 기분일까?


입을 굳게 다문채 하릴없이 인수인계서를 채우고 있는 지금, 묵은 감정을 털어내는 듯 시원함과 섭섭함 그리고 그 대처에 대한 씁쓸함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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