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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어떤 사랑인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by 곽뽕

말뿐인 권고사직이었다. 법적인 해고 요건만 갖추지 못했을 뿐이었다. 사실상 배 총괄은 내게 전화하기 전부터 고아 삼남매의 퇴사를 확정 지은 것과 다름없었다. 나와 지현이는 의미 없는 선택지를 받아 든 처지였다. <올리브> 매거진을 더 이상 발행하지 않는다는데, 다른 팀으로 옮겨도 흥미를 갖고 일하지 않을 거라는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논의해 본들 무의미했다. 배 총괄은 직원을 내보내는 와중에도 기억상실에 걸린 나르시시스트처럼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핑계만 줄기차게 늘어놨다. 총괄로서 역할을 잘 수행해보려 했으나 사람들이 따라주지 않아 이런 파국이 발생했다는 비겁한 태도로 초지일관했다.


“육식맨한테 오늘 메일 받았는데 뭐라고 얘기하지…”

“죄송하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취소해야지 뭐. <올리브>(매거진) 책 자체가 안 나오게 됐다고 얘기한 다음 양해 구하고.”

“육식맨이 <올리브>(매거진)를 검색해 봤나 봐. 박세리 감독 인터뷰 퀄리티라면 해보고 싶다고 해서 오케이 받은 건데…”

“어쩔 수 없지. 나도 육식맨 인터뷰해 보고 싶었어.”


주말 동안 집에 틀어박혀 지난 1년간 겪은 사건들을 순서대로 되짚기 시작했다. 인과를 중점으로 복기하고 또 복기했다. 개인적으로 반성해야 할 지점은 어디였는지, 향후 다른 조직의 구성원이 되었을 때 주의해야 할 부분은 어떤 지점일지에 대해 비판적으로 들여다봤다. 다만 권고사직은 권고사직이고 해고되는 진짜 이유를 속 시원하게 들어보고 싶었다. 아직 라이선스 계약이 남아 있는 <올리브> 매거진을 폐간한다는 말이 사실인지, 폐간되는 마당에 왜 같은 팀인 유나 선배는 출근시키지 않았으며 함께 부르지 않았는지도.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이라는 ‘죽음의 수용 과정 5단계’를 거꾸로 겪으며 주말을 보냈다. 안그라픽스에 마지막으로 출근하는 날인 월요일도 사무실 분위기는 금요일과 다르지 않았다. 나와 지현이와 솔비를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다. 평 주간이 주말에 연락해서 다들 월요일과 화요일 연속으로 연차를 내게끔 지시했다는 이야기를 연수에게 전해 들었다. 친하게 지냈던 평창동 사람들 대부분이 퇴사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퇴사를 위로해 줄 사람조차 없다는 사실에 괜히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올리브> 매거진 에디터로 일하며 가장 설렜던 다이나믹 듀오 최자 인터뷰 촬영.


지현이와 나는 책상의 개인 물건부터 챙겼다. 배 총괄에게 회사에 남는 걸 구걸해 봤자 부질없다는 데 서로 의견이 일치했다. 솔비는 생각이 달랐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회사에 남고 싶어 했다. 배 총괄이 ‘말만 세게했지 실제로 해고하진 않을 것’이라며 정체불명의 기대를 품고 있었다. 되려 나와 지현이에게 “왜 둘이서만 권고사직을 승낙해버렸느냐”라며 따졌다. “배 총괄에게 같이 가서 다시 잘 얘기해 보자”라고 짜증도 냈다. 지현이가 의미 없다고 몇 번을 얘기해도 솔비는 어린애처럼 길길이 날뛰며 성질까지 부렸다. 이번엔 솔비를 신경 써 줄 상황이 아니었다.


배 총괄의 희망대로 퇴사할 테지만 다시 말을 섞고 싶진 않았다. 가득 찬 불신으로 감정만 상할 테니 말이다. 불현듯 의심도 들었다. 권고사직이 회사의 공식 입장인 걸까? 안미르 대표가 가가집과 나나집 부근 신사동 어딘가에 또 다른 작은 사무실 하나를 임대해 사용하고 있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안그라픽스에서 오랜 시간 경력을 쌓아온 종필 차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차장님, 안미르 대표 번호 아시죠? 책을 진짜로 폐간하는 건지 직접 확인해 봐야겠어요”. 번호를 전달받고 안미르 대표에게 곧장 전화를 걸었다. 지현이와 가가집에서 100미터 정도 떨어진 안미르 대표 사무실로 향했다.


“<올리브>는 계약이 남아 있고, 하림 일을 하면서 이제 마이너스는 아닐 거라고 예상했는데 여전히 적자가 큰 상황이에요. 명맥을 가져가기 위해 일단 종이책을 유지는 하되, 디지털로 전환하면서 차차 축소해 나가자, 이후에는 완전히 디지털에만 ‘올인’하는 게 맞겠다는 판단이었어요.”

“매체를 디지털로 전환하려 했다면 방향에 대해 공유해 줄 순 없었던 걸까요? 직원들이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교육을 해줄 수도 있고요. 메일로 ‘너희 둘은 디지털로 가’라고만 통보하니까 이해하지 못했던 거예요.”

“총괄님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다소 ‘스킵’이 많다든가 과격해서 두 분한테 영향을 끼쳤을 수 있겠네요.”

“투덜투덜했죠. 제약은 있지만 주어진 업무는 열심히 하던 상황이었어요. 그러다 지난주에 책을 폐간하게 됐으니 회사에서 나가달라는 얘기를 들은 상황이고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인사 조치에 대해서는 하나도 듣지 못했어요. 기자님이 전화로 해고당했다고 하셨잖아요. 운전하다가 깜짝 놀라서 어떻게 된 건지 총괄님께 물어봤는데, 지난주 금요일에 휴간? 휴간인지 폐간인지 정확히 어떤 단어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매체 발행을 중단한다는 얘길 두 분께 했다고 들었습니다. 해고라는 말을 쓰진 않았다고 했고요.”

“정확히는 권고사직으로 처리해 줄 테니 나가라고 말했죠. ‘디자인 G팀은 에디터를 뽑지만 너희는 안 갈 거잖아’라는 말도 덧붙여서 저희가 느끼기에는 실질적인 해고와 다름없다는 의미였습니다.”

“총괄님이 ‘세 분께 권고사직에 대한 본인들의 생각을 오늘까지 말해줬으면 좋겠다고 얘기했고, 기다리고 있는데 아직 연락이 오지 않았다, 대표님한테 연락이 갔다면 한번 만나 보시고 얘기를 들어보는 게 좋겠다’라고 하더라고요. 여기까지가 제가 파악한 상황입니다. 디테일한 부분에서 커뮤니케이션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제가 다 알 수는 없어요. 물론 못 챙긴 건 제가 많이 부족한 탓이겠지만, 어쨌든 지금 매거진 사업 자체를 유지하기 굉장히 힘든 건 사실입니다.”

“팀 전체가 아니라 몇몇 사람만 불러서 권고사직을 얘기하니까 폐간한다는 말에 의심부터 들었습니다. 다른 선택지가 있지만 안 갈 거잖아, 신세계(매거진)가 있지만 신세계는 버틸 수 없을 거야, 그러니까 너희끼리 잘 지내지 그랬어. 기분 나빠서 해고하겠다는 얘기로밖에 안 들렸거든요. 공교롭게도 평창동 사람들만 전부 퇴사하는 상황이라서 더 그렇게 느껴졌고요.”

“그럴 순 있겠네요. 결정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억울한 부분이라든가 감정이 상하는 부분, 이해가 안 가는 일들도 굉장히 많았을 거로 생각해요. 제가 미안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그렇지만 회사 입장에서 <올리브>나 <론리플래닛> 상황에 대해서 말씀드린 내용 중에 거짓은 없습니다. 총괄님이나 평 주간님은 일이 사라지면 기자들이 떠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제 입장에서는 사업이 축소됐으니 공식적으로 다른 옵션을 제안하고 의견을 여쭤보는 게 순서인 거 같고요.”

“그렇겠죠.”

“해고는 해서도 안 되고 할 수도 없는 옵션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배 총괄 님 입에서 해고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들, 저는 세 분을 해고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앞으로의 절차는 대표님과 얘기하면 되는 걸까요?”

“제가 직접 얘기하는 건 아무래도 조심스러워서, 황 이사님하고 얘기하시는 게 맞을 것 같아요. 대신 총괄님하고는 더 이상 얘기 안 하시는 게 나을 것 같고요. 황 이사님께 들어오시라고 할게요. 황 이사님이 하시는 말이 회사의 공식 입장이라고 이해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이후에 진행될 부분은 제가 황 이사님과 직접 얘기할 거고, 결론적으로 중간에서 총괄님이 인터셉트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모든 의문이 해소된 건 아니었지만 안미르 대표와의 대화는 최소한 이성적으로 이뤄졌다. 사업부 총괄이 매체 운영 중단을 이유로 직원에게 권고사직을 제안했는데 회사의 대표가 몰랐다는 말이 가당치는 않았지만, 적어도 배 총괄과 대화했을 때보다는 나았다. 안미르 대표는 상황을 빠르게 파악했다. 일부러 모르는 척을 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태도에 부족함은 없었다. 양쪽 모두의 문제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대화를 유도했다. 대화 말미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 것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영국 본사가 <론리플래닛>을 접고 저희도 휴간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하지만 라이선스가 남아 있었고 정기 구독자와 연간 광고도 남아 있어서 유지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책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던 상황입니다. 없어진다고 그랬다가 갑자기 되살아 난 게 이런 이유 때문인데, 사실 <올리브>도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정확히는 잘 모르겠어요.”

“일단은 접는다고 이해하겠습니다.”

“예. 지금 상황으로는 접는다고 보시는 게 맞을 거예요. 제가 휴간이라고 표현했지만 언제 복간될지 모르는 휴간이어서 사실상 폐간이라고 보셔도 무방한 거죠.”


상황에 따라 책 발행을 접지 않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는 모호한 뉘앙스가 풍겼다. 결과만 놓고 보면 직감한 게 맞았다. 나와 지현이가 퇴사한 이후 <올리브> 매거진은 편집장까지 새로 뽑고 1년이 더 넘게 발행된 후 폐간됐다. 물론 안미르 대표와 대화를 마친 당일 오후에는 폐간을 전제로 가가집에 도착한 황 이사님과 면담이 진행됐다. 황 이사님은 권고사직을 받아들일 경우 회사는 위로금 형태로 3개월 치 급여를 지급하고, 권고사직 처리로 실업급여를 탈 수 있게 조치해 주겠다고 했다. 부서 이동이 가능한 곳으로는 단행본을 출간하는 출판사업부가 있으며, TO가 있는지는 한 번 더 정확히 확인하고 알려준다고 했다.


소속을 잘못 적은 것부터 신뢰가 가지 않았지만, 디자인 책을 출간하는 출판사업부에서 매거진 에디터를 받아줄 이유도 없긴 했다.


며칠 뒤 도착한 메일에는 다른 부서에 TO가 없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번에 황 이사님은 나와 지현이를 출판사업부가 위치한 파주 안그라픽스 사무실로 호출했다. 너무 사무적이지는 않은 투였다. 본인도 ‘배 총괄에게 찍혀 좌천되는 바람에 파주로 밀려난 상황’이라며 3개월 치 급여를 받고 퇴사하는 게 지금으로선 최선일 거라며 조언했다. 회사 내부에서 보상 없이 내보내라는 이야기도 나왔으니 보상은 3개월 치가 마지노선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지금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마저도 없던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협박 아닌 협박에 하는 수없이 받아들였다. 퇴직연금 IRP 계좌를 만들었다. 남은 연차를 모두 소진했고 마지막 급여와 위로금 명목의 3개월 치 급여를 수령했다. 안그라픽스 경력에 마침표가 찍혔다.


<올리브> 매거진에서 계획했던 커리어의 방향은 산산이 부서졌다. 이직할 곳이 정해지지 않은 채 퇴사하는 최악의 상황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번 퇴사는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 회사로부터 매거진 사업을 접는다는 이유로 사직을 권고받은 탓에 충격의 결 또한 확연히 달랐다. 출근하지 않은 날부터 본질적인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매거진 사업을 접는 회사가 비단 안그라픽스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매거진 에디터로 커리어를 지속하는 게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까, 지속할 수 있기는 한 걸까?”


에디터로 일하며 또 다른 길을 열어가는 건 하기 나름일 테지만, 종이 잡지에서 피처 콘텐츠를 계속 만든다고 가정했을 때 현실적으로 마주할 미래가 밝아 보이지는 않았다. 매거진의 영향력은 레거시 미디어 중에서도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약해진 상황이었다.


라이선스 매거진의 특성상 홈페이지를 마음대로 개편할 수는 없다고 하지만, 말하기도 입 아픈 디지털 시대에 트렌드와 동떨어진 사용자 경험은 개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미 전 세계가 실시간으로 연결된 시대. 매체당 발행 부수가 1만 권에도 미치지 못하는 종이 잡지가 영향력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매거진이라는 인쇄 매체가 명확한 돌파구를 찾지 못한 건 국내외 가릴 것 없었지만, 규모가 작은 내수 시장에 한정된 국내 매거진 업계의 특성상 생존이 급선무였다. 돈은 안 되는데 비용만 발생시키는 텍스트 콘텐츠부터 과감히 줄였다. 잡지 중에서는 영향력이 가장 크다는 라이선스 패션지마저 돈이 되는 패션과 뷰티에만 ‘올인’했다. 주특기인 이미지 제작을 무기 삼았다. 브랜드의 이미지 제작을 대행하는 업무가 생존의 실마리였다.


기존에도 브랜드의 광고를 녹인 ‘에디토리얼 콘텐츠’나 2차 활용(지면 이외의 다른 채널에 개제)이 가능한 이미지를 제작해 브랜드에 납품하는 일이 매거진의 수익 모델이긴 했으나, 이제는 유일한 수익 모델이 됐다. 브랜드와 대등한 입장을 유지하던 매거진이 완전한 ‘을’의 위치로 전락해 버린 이유였다. 스마트폰이 빠르게 세상을 바꿔 나가던 2010년대까지도 어느 정도는 유지됐던 매거진의 위상은 온데간데없었다. 주체적인 미디어로서 독자적인 시선과 주관을 드러내는 게 불가능해졌다. 콘텐츠 소비 방식에 찾아온 변화가 가장 큰 벽이었다. 어떤 레거시 미디어도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었지만, 유독 국내 매거진 업계는 스스로 작아지는 길을 택하며 그 벽을 더 높게 세운 면이 없지 않았다.


많은 잡지사가 태블릿 전용 디지털 매거진을 발행했지만 사업성이 없었다. 애플이 '뉴스스탠드' 서비스를 종료한 2015년부터는 디지털 매거진이 흔적을 감췄다.


매거진은 자기 미래를 대비하는 일에 소홀했다. 신문물이 등장할 때마다 무수히 많은 칼럼과 기사로 새로운 미래를 예견해 왔음에도 말이다. 한때 잡지사마다 인터렉티브 요소를 가미한 모바일 매거진을 발행하며 새로운 시장을 공략해 본 적도 있으나 사업성이 없어 접은 지 오래였다. 이후 콘텐츠로 돌파구를 찾으려는 노력은 거세당했다. 이익 앞에서 효익의 가치는 무용지물이었고, 상업 미디어가 갖는 숙명과도 같은 딜레마를 자본 논리를 앞세워 매거진 스스로 걷어찼다. 콘텐츠 소비 대상인 독자를 포기하고 콘텐츠 제작에 비용을 대는 광고주를 선택했다. 어떤 산업이든 소비 주체와의 적극적인 소통이 무엇보다 중요해진 시대임에도 말이다. 콘텐츠 소비 주체의 피드백을 반영하지 않는 미디어의 미래는 불투명해질 수밖에 없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으로 시작해 인스타그램, 틱톡, 유튜브로 콘텐츠 흐름이 완전히 넘어가는 데도 기민하게 대응하는 대신 고개만 빳빳이 세웠다. 스티브 잡스가 최초의 아이폰을 꺼내든지 10년이 훌쩍 지났는데도, 매거진이 새로운 시대에 대응하는 방법이라고는 지면 콘텐츠를 SNS 플랫폼에 업로드하는 것뿐이었다. 과정마저도 실망스러웠다. 애정했던 한 남성지의 인스타그램 계정 팔로워 수가 하루아침에 몇 십만 단위로 껑충 뛰었다. 자본 논리가 우선이니 당연한 현상이었을까? 지금은 자리잡은 두산매거진의 ‘패스트페이퍼Fastpaper’도, ‘인스타그램 매거진’을 대표하는 ‘데일리 패션 뉴스’‘아이즈 매거진’이 수익을 낼 수 있다는 사례를 증명해 낸 다음인 2023년에서야 뒤따라 탄생했다.


2021년 <데이즈드> 매거진 농구선수 변준형 화보 촬영 현장. 이미지 콘텐츠는 여전히 매거진이 가진 최고의 경쟁력이지만, 텍스트 콘텐츠는 경쟁력을 상실했다


읽는 콘텐츠를 담당하는 피처 에디터의 입지가 줄어든 현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안그라픽스 퇴사 후 지현이의 소개로 잠시 일했던 <데이즈드> 매거진에서 체감했다. 에디터마다 차별화된 주관과 색깔로 읽는 재미가 그득했던 <데이즈드 & 컨퓨즈드> 시절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피처 에디터의 역량은 오직 유가 광고가 붙은 셀러브리티 화보의 인터뷰에서만 의미를 가졌다. 피처 콘텐츠는 한 권의 책 안에서 호흡의 구색을 맞추는 기능으로만 사용됐다. 다른 라이선스 패션지의 상황도 다를 게 없었다. 그간 쌓아온 경력의 효용부터 냉철하게 바라봐야 하는 시점이었다. 콘텐츠 산업의 현실부터 제대로 직시해야 했다. 외부인으로 밀려 나왔기 때문이었을까? 조금은 더 객관적인 시각으로 업계를 바라볼 수 있었다.


트렌드를 이끌지 못하게 된 매거진 콘텐츠

미국 매거진 산업을 대표하는 <보그>나 <에스콰이어>는 1930년대부터 ‘트렌드 빌더’로서의 위상을 확립해 나갔다. 미국은 전쟁이 끝난 1950년대부터 경제적 안정을 찾으며 중산층이 빠르게 증가했고, 이때부터 소비 대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안정적인 생활 속에서 취향을 쌓기 시작한 중산층에겐 부를 물려받은 ‘올드머니’의 생활 방식이 곧 동경의 대상이었다. 매거진은 ‘올드머니’가 아니면 직접 경험하기 힘든 패션과 식사 예절, 취향과 여가 생활 등을 콘텐츠로 가공해 소개했다. 소비 트렌드를 이끄는 첨병이자 삶의 이상향을 제시하고 설계해 주는 리더로서 중산층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1933년 창간한 <에스콰이어>는 남성 패션·라이프스타일·문학 작품을 함께 다루는 고급문화 잡지로 출발했다. 전쟁 이후 세련되고 감각 있는 남성을 표상하는 매체로 자리 잡았다.


잡지와 처음 사랑에 빠진 2010년만 해도 매거진이 트렌드를 제시하던 시절이었다. 스물이 갓 넘은 나이에 스스로를 중산층이라는 단어로 규정지은 적은 없지만, 돌이켜 보면 올드머니의 삶을 동경하고 따라하고 싶었던 1950년대 미국 중산층의 심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가 가보지 못한 곳들에 관한 이야기, 내가 갖지 못한 물건들에 관한 이야기, 내가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삶을 사는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는 잡지를 통해서만 접할 수 있었다. 에디터를 선망하며 직업으로 삼고 싶었던 이유도 마찬가지다. 간접적으로만 접할 수 있는 이야기를 직접 경험하고 콘텐츠로 제작해 전달하는 에디터의 일이 더없이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런데 매거진과 에디터가 누려온 위상은 2020년대에 접어들며 유효기간이 만료된 듯 시들어버렸다.


1971년 일본에 처음 진출한 맥도날드는 첫 번째 매장을 도쿄 긴자에 위치한 미츠코시 백화점에 오픈했다. 미국식 패스트푸드가 대중에게 확산되려면 문화유수론(文化流水論, Cultural Diffusion Theory)에 따라 상류층 소비문화의 중심인 미츠코시 백화점부터 공략해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지금껏 매거진은 트렌드를 아래로 흘려보내는, 미츠코시 백화점과 같은 역할을 담당해 왔지만 지금도 미츠코시 백화점이 꼭 필요한지는 의문인 세상이었다. 젠지를 중심으로 틱톡이나 길거리에서 탄생한 대중문화가 하이엔드 브랜드를 자극하며 새로운 트렌드가 만들어지는 일도 빈번했다. 무엇보다 작금의 시대에는 잡지를 보지 않고도 세계를 속속들이 관찰할 수 있었다. 영상으로 값비싼 물건의 ‘언박싱’을 체험하고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사생활 또한 실시간으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트렌드가 상류에서 형성돼 하류로 흐른다는 문화유수론이 예전만큼 유효한 시대가 아니었다.


1971년 도쿄 긴자 미츠코시 백화점에 문을 연 일본 최초의 맥도날드. 해외 문화를 동경하는 젊은 층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소비문화의 중심지였던 미츠코시 백화점이 제격이었다.


보는 콘텐츠를 만드는 패션 에디터나 뷰티 에디터는 매거진 산업을 그나마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봤을지도 모른다. 소비 생활에서 불가결한 의식주의 한 부분과 K-컬처 붐을 이끄는 선봉장 격 분야를 다루기 때문이다. 주로 읽는 콘텐츠를 만드는 피처 에디터의 입장은 완전히 달랐다. ‘읽는’ 행위가 뒷전인 시대였다. 호기심을 가득 품고 탐구하고 사유하는 행위의 의미마저 등한시되는 현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거진이라는 종이 책은 가뜩이나 발행 속도도 느린데, 시대가 요구하는 즉각적인 도파민도 공급하지 못했다. 텍스트 기반의 인쇄 매체가 갖는 분명한 한계였다.


일상 속 잡다한 이야기를 빠르게 습득하고 싶으면 유튜브에서 ‘14F’를 시청하고, 쉽고 깔끔하게 요약된 뉴스가 필요하면 매일 아침 도착하는 ‘뉴닉’의 뉴스레터를 읽는 게 더 효율적이었다. 글로벌 산업의 동향을 깊이 이해하고 싶으면 ‘커피팟’의 뉴스레터를 구독하고, 새로 출시된 테크 제품 리뷰를 보고 싶으면 ‘잇섭’이나 ‘UNDERkg’ 영상을 유튜브에서 찾는 게 더 효과적이었다. 사용자 경험을 개선할 생각이 전혀 없는 웹페이지에서 장문의 매거진 콘텐츠를 읽는 것보다는 말이다. 배우와 뮤지션의 고화질 인터뷰 영상도 SNS에 차고 넘쳤다. 아이돌 팬이라면 인터뷰 기사를 읽는 것보다 ‘위버스Weverse’‘버블Bubble’ 플랫폼에서 아이돌과 직접 소통하며 얻는 만족감이 더 큰 시대를 이미 살고 있었다.


뉴닉은 밀레니얼과 젠지에게 가장 각광받는 뉴스 미디어 플랫폼이다. 매일 아침 도착하는 뉴스레터뿐만 아니라 홈페이지도 텍스트 가독성을 고려한 최적의 UI와 UX를 갖췄다.


온전히 대중으로 넘어간 콘텐츠 권력

매거진은 과거의 영광을 놓지 못했다. 관습처럼 다뤘던 콘텐츠만 반복해 제작했다. 스포츠 선수나 할리우드 배우가 소유한 자동차 소개 콘텐츠는 잊을 만하면 남성지에 등장했고, 에디터가 애정하는 아이템과 장소 소개 콘텐츠는 잊을 만하면 여성지에 등장했다. 심지어 디지털 콘텐츠만 전담하는 팀이 갖춰진 2025년인 지금까지도 말이다. <GQ> 인스타그램 계정에는 사실 관계마저 불확실한 내용으로 가십에 지나지 않을 ‘스포츠 스타들이 타는 슈퍼카’ 콘텐츠가 올라왔다. <얼루어> 인스타그램 계정에는 아무런 맥락도 없는 개인적 취향에 불과한 ‘얼루어 에디터들의 요즘 핫플!’ 콘텐츠가 올라왔다.


*<GQ>가 올린 ‘스포츠 스타들이 타는 슈퍼카’ 인스타그램 콘텐츠에는 F1 드라이버 루이스 해밀턴이 파가니 존다 760 LH 모델을 소유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그런데 무려 10년 전인 2015년에도 기사로 다뤄졌던 내용이다. 더 큰 문제는 구글에만 검색해도 루이스 해밀턴이 해당 모델을 처분했다는 이야기가 보인다. <GQ> 코리아의 콘텐츠가 정확히 확인되지 않은 사실관계로 만들어진 콘텐츠라는 얘기다. ‘스타의 자동차’라는 주제는 여전히 남자들의 호기심을 가볍게 자극하기 좋긴 하나, 조금만 검색하면 알 수 있는 내용이 오늘날에도 콘텐츠로서 가치를 지닐지는 의문이다.

*<얼루어>가 올린 인스타그램 콘텐츠는 매거진이 여전히 과거의 영광에 취해 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만 같다. 과거에는 ‘매거진 에디터’라는 직업이 우월한 지위를 가졌다. 일반인이 경험하기 힘든 장소와 물건과 인물을 가장 먼저 만나는 주체가 에디터였기 때문이다. 요즘은 누구나 손쉽게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 누구나 손쉽게 콘텐츠를 제작하고 배포할 수도 있다. 에디터란 직업에 부여된 권위 자체가 사라졌다. 유명인도 아니고 서사가 알려진 인물도 아닌, 이름도 공개할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에디터의 취향은 어떤 지점에서 콘텐츠로서 가치가 있을까?


모바일 시대가 콘텐츠 시장을 뒤흔든 지 오래였다. 틱톡, 인스타그램, 유튜브 같은 SNS 플랫폼은 콘텐츠마다 정량적 데이터를 기록해 공급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제공했다. 콘텐츠에 대해 소수에 의한 정성적 평가만 이뤄졌던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누가 만든 콘텐츠든 같은 조회 수, 좋아요 수, 재생시간을 획득했다면 같은 파급력과 지위를 지니게 됐다. 소비 주체의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기 시작함에 따라 콘텐츠 공급자의 전통적 의미가 퇴색됐다. 콘텐츠 권력은 콘텐츠를 소비하는 대중으로 넘어갔다. 아날로그 시대, 다시 말해 자본과 인력으로 정보를 독점할 수 있던 시절에 만들고 싶은 콘텐츠만 만들었던 레거시 미디어의 권위는 붕괴되는 게 당연했다.


과거에는 트렌드에 있어 매거진 에디터가 최전선에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지만, 오늘날 인스타그램에서도 그 전제가 유효한지는 모르겠다.


매거진은 지금껏 만들어 왔고, 만들고 싶은 콘텐츠만 고집하려는 경향이 너무나도 강했다. 매달 아이돌 멤버별로 여러 종의 커버를 동시에 제작하며 정보를 전달했던 종이 잡지를 ‘소장하고 싶은 굿즈’로 포지셔닝한 패션지의 전략만 의미 있었다. 매거진이 소비 트렌드 최전선에서 오랜 시간 권력을 누려왔기 때문일까? 아니면 매거진 에디터들이 오랜 시간 권위를 가져왔던 직업에 ‘뽕’을 가졌기 때문일까? 소비 주체와 소통하는 동적인 미디어가 되려는 생각이 없어 보였다.


SBS는 2021년 7월 새로운 예능 <신발 벗고 돌싱포맨(이하 돌싱포맨)>을 론칭했다. <돌싱포맨>은 네 명의 MC가 ‘이혼하고 혼자 사는 남자’라는 공통점을 기반으로 짠한 ‘케미’와 능글맞은 입담을 쏟아내는 방구석 토크쇼다. 매주 새로운 게스트를 초대해 능글맞은 웃음을 풀어내며 SBS의 대표 예능으로 자리 잡았다. 탁재훈, 이상민, 김준호, 임원희 조합은 프로그램 론칭 전부터 <미운 우리 새끼(미우새)>를 통해 검증을 마친 상태였다. 당시 SBS 유튜브 채널에선 <미우새>의 에피소드 중에서도 압도적인 예능감을 보유한 탁재훈을 필두로 이혼남들의 이야기를 모은 클립이 유독 인기를 끌었다.


<미우새> 이혼남 에피소드 영상 유튜브 댓글창엔 ‘네 명만 따로 모아 프로그램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이 많이 달렸다. 제작진은 ‘이혼남’ 조합이 재미를 보장한다는 걸 촬영하고 편집하는 과정에서 이미 알고 있었겠지만, 유튜브에서 재생 시간과 조회 수라는 정량적 지표와 실시간으로 달리는 시청자 댓글로 그 재미가 가진 가능성까지 명확히 깨달았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돌싱포맨>은 파일럿 검증을 마치고 정규 방송으로 곧장 편성됐다. SBS뿐만 아니라 레거시 미디어 대부분이 발 빠르게 새로운 플랫폼과의 공생을 택했다.


유튜브라는 미디어 플랫폼을 TV 방송의 경쟁자라고만 인식했다면 <지구마불 세계여행>과 같은 프로그램은 존재할 수 없었다.


비슷한 시기 ‘나영석 사단’으로 불리던 tvN 제작진은 사직서를 내고 ‘에그 이즈 커밍’을 독보적인 프로덕션으로 키우는 데 힘을 보탰다. 유튜브에 ‘채널십오야’ 채널을 만들었고 유튜브 전용 콘텐츠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무려) 700만이 넘는 구독자를 확보하며 웬만한 방송국 못지않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김태호 PD 역시 마찬가지였다. TEO 프로덕션은 유튜브에서 ‘빠니보틀’이 촉발한 새로운 여행 포맷을 가져와 ENA에서 <지구마불 세계여행>을 론칭했다. 출연진도 아예 빠니보틀, 곽튜브, 원지라는 대세 유튜버를 메인으로 내세웠다. 대중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빠르게 알아채고 자기만의 콘텐츠로 풀어내야 생존하는 시대에는 자존심이 문제가 아니었다.


매거진도 트렌드가 확산되는 경로를 특정할 수 없어진 시대임을 자각해야 했다. 소비 주체와 소통하지 않는 콘텐츠 제작자는 외면받는다는 현실을 인지해야 했다. 평가와 피드백을 두려워하지 않고, 디지털 환경을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트렌드 빌더’나 ‘콘텐츠 리더’로서의 자격은 고사하고 산업 자체의 존폐를 걱정할 때가 온다는 사실을 알아채야 했다.


흥미로운 사례가 있다. 비슷한 시기에 유튜브 채널을 연 ‘박스까남’과 ‘옆집언니 최실장’은 잡지와 연관된 이력과 ‘고민될 땐 이거 사’라는 유사한 직설 화법의 포맷에서부터 출발이 같았다. 박스까남은 에디터와 편집장 경력을 기반으로 오디오, 시계, 자동차와 같이 하이엔드 소비 제품을 ‘언박싱’ 포맷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옆집언니 최실장은 스타일리스트 경력을 살려 ‘40대 여성이 입을 수 있는 리넨 셔츠’나 ‘현실 여름 코디 꿀팁’처럼 실생활에 유용한 패션 아이템을 코디네이션 포맷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초기 두 채널의 성장세는 비슷한 듯했지만 구독자 수와 평균 조회 수에서 점점 차이가 벌어졌다. (2025년 기준 구독자 수 약 4배 차이) 100만이 넘는 조회 수 영상도 ‘옆집언니’가 훨씬 더 많아졌다.


'옆집언니 최실장'은 패션 스타일링에 관한 대중의 고민을 정확히 짚어낸 콘텐츠로 100만 명에 가까운 구독자를 확보했다.


옆집언니 최실장이 크리에이터로서 더 뛰어난 재능을 가졌기 때문일까? 박스까남도 특유의 필력과 하이엔드 브랜드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로 오래전부터 블로그 계에선 인플루언서였다. 두 채널이 차이를 보이게 된 근본적 원인은 옆집언니가 대중의 질문, 쇼핑의 갈증, 스타일의 현실적 제약 등을 고려한 맞춤형 콘텐츠로 ‘실제 소비자’의 고민과 니즈를 정확히 읽어냈다는 사실에 있었다. 박스까남도 자신의 미감과 취향을 반영한 콘텐츠를 꾸준히 만들어 왔지만, 하이엔드 제품에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은 게 현실이었다. 소비 트렌드 중심에 선 밀레니얼과 젠지에겐 권위가 부여하는 가치보다 ‘개인이 경험할 수 있는 가치’가 더 중요해졌다. 더군다나 하이엔드 제품을 꾸준히 소비할 만큼 재력을 갖췄다면 굳이 박스까남 유튜브에서 정보를 얻을 이유도 없었다. 박스까남보다 많은 정보를 가진 사람도 많을 테고, 얻고자 한다면 좋아하는 브랜드와 제품에 대한 정보는 지천에 널렸으니까.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지만, 두 유튜브 채널의 기록은 올드머니의 취향을 앞세운 매거진식 콘텐츠가 힘을 잃었다는 사실을 여실히 시사한다.


*자동차 유튜브 채널인 ‘정우성의 더파크’‘김한용의 MOCAR’도 비슷한 사례로 읽힌다. 두 채널의 격차는 <GQ>에서 매거진 에디터로 자동차 콘텐츠를 만들었던 정우성이란 사람의 특성과, 디지털 매체에서 자동차 기자로 활동하다 <모터그래프> 편집장을 거쳐 개인 크리에이터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김한용이라는 사람이 갖는 특성을 명확히 드러낸다. 더파크 정우성은 박스까남과 마찬가지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우선인 매거진식 콘텐츠 포맷으로 자동차를 리뷰한다. 대중의 관심보다는 브랜드의 생각과 의도와 고민에 더 큰 가치를 둔다. 반대로 MOCAR 김한용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새로 출시된 자동차와 변화하는 자동차 산업을 소비자의 시각에서 조망한다. 브랜드가 민감해할 주제여도 대중이 원한다면 다룬다. 유튜브를 시작한 시기와 그간 쌓인 대중적 인지도 차이만이 격차를 만든 게 아니다.


고민이 깊어졌다. 자본주의라는 링 위에서 생존을 도모해야 할 때였다. 직장을 구하고 월급을 받아 카드 값을 메꿔야 한다는 눈앞의 과제도 문제였지만, 거창해도 주체적인 인간으로서 어떤 생산 활동에 참여했을 때 더 큰 만족을 얻을 수 있을지에 대한 선택도 문제였다. 매거진 에디터라는 경력을 지속하느냐 아니면 지금까지의 경력을 기반으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느냐. <보그>와 같은 특정 매체가 아니라면 한 회사를 오래 다니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업계 상황도 감안해야 했다. 미래가 불투명해진 커리어 자체도 고려해야 했다. 여전히 좋아하고 애정하는 잡지였지만, 쳇바퀴만 열심히 굴리는 것보다 새롭게 도전하는 행위의 값어치에 마음이 더 끌렸다.


곧바로 어떤 도전을 시작할지 명확한 계획을 세우진 못했다. 나아가야 할 방향 정도만 설정하고 이런저런 소식에 귀 기울였다. 윤곽만 열심히 그리면서도 자신은 있었다. 지금껏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가졌던 고민과 실패의 경험, 무엇보다 좋은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은 콘텐츠가 필요한 곳이라면 분야를 막론하고 필요한 자질일 거로 생각했다. <에스콰이어>와 매거진 <B>에서 흥미로운 콘텐츠를 만들어왔던 박찬용 에디터가 2019년 발간한 책에서 밝힌 견해와 마찬가지였다. 내가 가진 태도 자체가 무기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잡지 에디터적인 취향이라는 말은 좀 그렇지만 잡지 에디터적인 태도라는 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세상 모든 일의 재미를 궁금해하는 호기심. 자기가 모르는 세상에 대한 겸손. 남에게 정보를 주어야 하니 어디서든 배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겸허한 자세. 자기가 틀렸다는 사실을 언제든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한 마음. 적다보니 이런 사람들이라면 에디터 말고 다른 일을 더 잘할 것 같기도 하다.

박찬용 ≪잡지의 사생활≫
- ‘취향이 뭐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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