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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스턴, 문제가 생겼다 3

갈아엎어도 부족할 만큼 본질적인 문제가 곪아 터졌다

by 곽뽕

“점심 미팅이 있어서 자리를 좀 비웠습니다.”

“들었어요. 정재훈 작가님이랑 식사했다면서요?”

“매달 좋은 원고 보내주시는데 그간 직접 뵌 적이 없었거든요. 곧 연말이고 해서 식사 자리 한번 만들었습니다.”

“좋네요. 다음 미팅 때는 저도 같이 뵙고 싶네요. 오늘 보자고 한 건 유나 기자하고 사이가 어떤가 싶어서요. 듣기로는 잘 지내지 못한다는 거 같다던데?”

“음… 어떤 얘기를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못 지내는 건 아닙니다. 거리감이 조금 느껴지기는 해도요. 아무래도 유나 선배가 나중에 합류해서 가까워질 기회가 많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침에 유나만 빼고 커피를 마시러 간다고 해서 저번에 솔비한테 한 소리했거든요? 선배들 커피 챙기는 것도 막내가 할 일이라고. 봉석 기자가 그래도 선배니까 지현이랑 솔비한테 얘기해서 디렉터를 잘 챙겼어야죠.”

”네. 죄송합니다. 유나 선배를 빼고 다녀온 건 아니었습니다. 먼저 출근한 사람끼리 커피를 사러 나갔다가 왔는데, 다녀오고 보니 선배가 출근해 있어서 오해가 생긴 것 같습니다. 좀 더 신경 쓰겠습니다.”

“점심도 셋이서만 먹으러 간다던데?”

“그럴 리가요… 점심이면 매번 뭐 드시고 싶은 거 있느냐고 물어보고, 유나 선배가 안 먹는다고 하거나 따로 먹는다고 했을 때만 셋이 갔을 텐데요. 저희가 유나 선배를 빼놓고 밥을 먹으러 갔다는 건 금시초문입니다. 오히려 유나 선배가 다른 사람이랑 먹으러 갈 때는 있어도요.”


유나 선배와 고아 삼남매 사이에 미묘한 간극이 유지됐던 건 사실이다. 가까워질 물리적 시간이 부족했던 것과 더불어 라포Rapport가 형성될 만한 ‘껀덕지’가 부족했다. 유나 선배는 배 총괄이 뽑은 사람이었고 나와 솔비와 지현이는 아니었다. 유나 선배는 새로 합류한 멤버였지만 나와 솔비와 지현이는 평창동에서부터 혼돈을 겪어온 멤버였다. 유나 선배는 배 총괄 혹은 평 주간과 독대하며 직접 지시를 전달받았지만 나와 솔비와 지현이는 간접적으로만 지시를 전달받았다. 더욱이 유나 선배는 편집장님을 겪어본 적이 없었지만 나와 솔비와 지현이는 반년 넘게 편집장님을 겪어온 상태였다. 아무래도 나와 솔비와 지현이의 사이가 조금은 더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일부러 거리를 두려고 한 적은 없었다. 점심을 같이 먹지 않은 것도 선배의 선택이었고, 커피를 같이 마시지 않은 것도 선배의 선택이었다. 업무 외에도 어떤 사안을 선택해야 할 때면 나와 솔비와 지현이는 유나 선배에게 가장 먼저 의사를 물었다. 그때마다 대답을 피하거나 거절한 건 정작 선배였다. 어떨 땐 선배가 스스로 고립시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외톨이를 자처하는 사람에게 내민 손길은 빈번히 갈 곳을 잃었다. 오히려 고아 삼남매에게 아쉬운 점을 묻는다면 서로를 묶어줄 이벤트가 부족했다는 사실보다도, 선배가 취한 행동을 꼽고 싶었다.


다 함께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디저트를 찾아 가로수길을 돌아다닌 적도 있었건만, 배 총괄 눈에는 뭐가 문제로 보였을까.


유나 선배는 나나집에 수시로 미팅을 다녀오면서도 <올리브> 매거진의 향방과 관련된 화제 앞에서는 늘 3자의 입장을 취했다. 디렉터이기에 회사에 도는 흉흉한 소문에 대해 아는 바가 있느냐고 물어도 언제나 딱 잘라 모른다고만 대답했다. 편집장님 사건 이후 배 총괄과 직접 소통하는 사람은 오직 유나 선배였음에도 말이다. 닥쳐올 것만 같은 위기 앞에서 초연해질 방법을 찾고 싶었던 건 고아 삼남매의 욕심이었을까. 나쁜 의도가 있을 거로 단정 짓고 싶지 않은 마음과, 앞서 겪은 일련의 사건에 기인해 피어오르는 미심쩍은 마음이 공존한 채 가시지 않았다. 선배의 입장에선 해소되지 않는 거리감에 서운한 감정이 들었을 순 있겠지만, 배 총괄의 지적은 너무나 단편적이었다.


“그리고 <온 더 로드> 기획은 기자님한테만 얘기한 건데 만천하에 알리고 다니면 어떡해? 다들 나한테 와서 자기도 한 달 살기 보내 달라고 난리야(웃음). 이러면 나는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가 없지. 모두가 반대하는 걸 어떻게든 해보려고 설득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신 부사장님이랑 대표님도 하지 말자고 하는 거 내가 겨우 설득한 거예요.”


배 총괄은 한 달 전쯤 ‘한 달 살기’ 여행법을 메인 콘텐츠로 삼은 <온 더 로드>에 참여를 제안했다. 제안을 듣고 일부만 승낙하긴 했지만 완전한 승낙을 가정하고 기획부터 구상해봤다. 어떤 지역을 입체적으로 다뤘을 때 콘텐츠의 가치가 극대화될지에 대한 고민을 가장 먼저 시작했다. 주목받는 국내 여행지를 동 단위로까지 쪼개 리스트업했고, 에어비앤비든 뭐든 호텔처럼 잠시 머무르는 숙박이 아닌 살아보는 숙박이 가능한 곳이 있을지 지역마다 찾아봤으며, 여행자의 시선을 넘어 거주자의 시선으로 담아낼 수 있는 아이템으로는 어떤 것들이 적합할지 조사했다.


아무리 한 달을 살아본다고 한들 ‘로컬’의 매력을 실제 거주자보다 더 많이 발견하기란 쉽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온 더 로드>의 에디터라면, 지역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 일반 여행자와 단기 거주자와 실제 거주자의 시선 중 어디쯤에서 균형을 잡으면 좋을지에 대한 고민 또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다만 책의 판형과 분량은 물론이고 책의 발행 주기와 제작에 가용할 수 있는 예산 범위 등에 대해서는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고민의 지점마다 필요한 정보가 무수히 많았지만, 배 총괄의 책상은 나나집에 있어 직접 물어보기가 어려웠다.


급한대로 같은 건물에 있던 배 총괄의 선배이자 심복이자, <GMT> 매거진 편집장인 평 주간에게 <온 더 로드>와 관련해 정해진 사항이 있는지 물었다. <론리플래닛>과 아시아나 매거진의 디자인을 담당하고 있으며 발간이 확정되면 <온 더 로드>의 디자인까지 담당하게 될 기업 팀장님에게 제작과 관련해 정해진 사항이 있는지 확인했다. 확인한 결과, 두 사람이 아는 정보도 내가 아는 것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온 더 로드>는 아직 말 그대로 아이디어에 불과했다. 예산을 포함해 제작과 관련된 모든 사항을 직접 기획하고 제안해야 하는 상황인가 싶었다.


<론리플래닛>에서 부록 형태로 발행하던 2015년 <온 더 로드>. 배 총괄이 기획했다는 <온 더 로드>가 제대로 발행됐다면 어떤 모습이었지 궁금하긴 하다.


“제가 어떤 걸 알리면 안 되는데 알리고 다녔다고 얘기하시는 건지 이해가 좀 안 되는데요. 기획을 하다가 궁금한 게 생겼고, 총괄님이 가가집에 안 계시다 보니 평 주간님과 기업 팀장님께 <온 더 로드> 관련해서 구체적으로 아는 게 더 있는지 여쭤본 게 다입니다.”

“아니, 그러니까. 그걸 나한테 물어봐야죠. 왜 다른 사람한테 물어보냐니까(웃음). 두 분 다 나한테 와서 봉석이 물어봤다고 얘기해요. 그럼 내가 진행할 수가 없지.”

“평 주간님은 <올리브> 매거진에 피드백을 주고 계시고 기업 팀장님은 <온 더 로드> 디자인을 맡을 분이셔서 여쭤봤습니다.”

“봉석한테 제안한 건 난데?”

“음… 죄송합니다…”

“효진도 나한테 와서 물어보더라고. 봉석이 가는 거냐고. 그렇게 사방팔방 다 얘기하고 다니면 기자님한테만 제안했던 게 의미가 없어지지 않을까?”

“효진 선배한테는 제가 얘기한 게 아닙니다. 얼마 전에 효진 선배가 먼저 저한테 ‘한 달 살기’ 가는 거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전 총괄님이 제안했다고 했고요. 그런데 선배는 자기가 가는 줄 아는 눈치더라고요. 저번에는 총괄님이 제게만 제안하는 거라고 하셨는데, 효진 선배는 본인이 가는 줄 알았다고 하니 ‘담당자가 바뀌었나?’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습니다. 효진 선배 말고도 다들 어디서 들었는지 제가 ‘한 달 살기’ 간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고요. 사실 총괄님이 제안하기 전부터 돌았던 얘기였습니다.”

“본인이 얘기하고 다니니까 다 아는 거겠지(웃음). 얘기하지 말아야 할 것도 있는 거예요. 광고주하고도 긴밀하게 소통해야 하는 거고, 다른 매체에서도 미리 알면 안 되는 건데 온 동네에 다 얘기하고 다니면 접을 수밖에 없지 나는.”

“……”

“한 달 살기는 안 하기로 했어요. 안 하는 게 낫겠어요. 굳이 뭐하러 해요.”


이어진 또 다른 지적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한 달 살기’는 이미 배 총괄에게 제안을 받기 전부터 회사 안에서 기정사실로 소비되던 내용이었다. 제안 자체가 비밀로 유지돼야 할 만큼 중요했다면, 왜 제안을 받기 전부터 모두가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내가 받은 제안은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느껴졌다. 긴가민가한 상태였지만 나름대로 기획을 구상해 보았으며, 궁금한 게 생겨 더 많은 정보를 가졌을 걸로 예상되는 사람에게 물어본 게 전부였다. 어느 틈에 ‘실수’나 ‘잘못’이란 단어가 끼어들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게다가 배 총괄의 ‘특별한 제안’은 1차 세계대전 당시 ‘맥마흔·후세인 협정’과 ‘벨푸어 선언’을 통해 아랍인들과 유대인들에게 이중계약을 저지른 ‘신사의 나라’의 행동과 별반 다를 것도 없었다. 특별히 좋은 제안을 내게만 하는 거라던 배 총괄의 말은 분명히 사실과 달랐다. <온 더 로드> ‘한 달 살기’ 기획은 나뿐만이 아니라 효진 선배에게도 당도한 제안이었다. 심지어 효진 선배도 처음엔 본인만 제안을 받은 걸로 알고 있었다. 우연한 계기였지만 나도 효진 선배도 단독으로 제안을 받은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인식했을 땐, 머릿속엔 아마도 같은 생각이 떠올랐을 터였다.


계략이었는지 실수였는지 아니면 배 총괄이 또 다른 꿍꿍이를 가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당시의 혼란스러웠던 안그라픽스 매거진 사업부에는 비밀이란 게 존재할 수 없는 분위기가 기저에 깔려 있었다.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어도 모두가 초조함과 불안감을 안고 출퇴근을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점심에 무엇을 먹었는지, 또 지난 저녁 팀 내부에 어떤 갈등이 있었는지, 직원 간 오고 가는 대화에는 사소한 정보라 할지라도 빠짐없이 담겼다. 단편적이고 일방적인 지적으로 점철된 면담을 마치고 나나집에서 나왔다. 가가집으로 걸어가며 여름에 편집장님이 했던 말이 불쑥 떠올랐다.


“<올리브> 매거진도 다 자기 사람으로 바꾸려고 했다니까. 너희 다 내보내고 다시 뽑으라고 했는데 내가 절대로 안 된다고 했어.”


박세리 감독과 LG 시그니처 키친 스위트 매장에서 진행한 <올리브> 매거진 촬영 현장의 모습.


신 부사장님 밑에서 기업 홍보물 제작을 담당하던 상현 팀장님과 안나 과장님이 독립하기 위해 퇴사하는 날이었다. 담배를 태우며 서로의 앞길에 대해 덕담을 나누는데 예상치 못한 새로운 사실을 또 한 번 전해 들었다. 대화를 마치고 헛움은만 나왔다. 배 총괄은 왜 실익도 없는 거짓말을 하는 걸까. 어느 조직이든 ‘빌런’은 있기 마련이고, 기존의 ‘빌런’이 사라져도 또 다른 누군가가 ‘빌런’의 자리를 차지하고 만다는 이야기는, 안그라픽스의 당시 상황과도 딱 들어맞았다.


“‘한 달 살기’는 어떻게 됐어요(웃음). 자리 비우는 게 쉽지 않을 텐데 어디로 가는지는 정해졌어요?”

“(웃음)취소됐습니다. 일단 러프하게나마 기획부터 잡고 있었는데 배 총괄이 불러서 왜 다른 데 얘기하고 다니냐고 뭐라고 하더라고요. 이러면 못 한다고 해서 엎질러졌어요.”

“응? 그게 무슨 얘기에요? 뭘 얘기하고 다녔는데요?”

한 달 살기’로 여행 다녀온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정보가 없어서 기업 팀장님이랑 평 주간한테 뭐 좀 더 아는 거 있느냐고 물어봤거든요. 그런데 저보고 비밀리에 진행하는 건데 왜 다른 사람한테 얘기하고 다니냐고 하네요. 무슨 일급 기밀도 아니고.”

“그게 뭐가 비밀이야. 그거 원래 신 부사장님이 우리한테 하라고 했던 거예요. 우리가 <온 더 로드> 기획 잡고서 기자님이 다녀오는 걸로 정해졌는데, 우리 퇴사 날짜가 정해지면서 못 하게 된 거고. 다 아는 건데 뭐가 비밀이래. 그게 비밀인 이유는 또 뭐고.”

“그건 처음 듣는 얘기인데요? 그래서 다들 내가 가는 걸로 알고 있었던 건가?”

“기자님도 우리가 추천한 거예요.”

“<GMT>에 효진 선배 아시죠? 배 총괄이 효진 선배한테는 효진 선배만 가는 거라고 얘기했더라고요. 그런데 얼마 전에 효진 선배랑 얘기하다가 ‘한 달 살기’ 얘기가 나왔는데 둘 다 자기만 가는 줄 알았던 거예요(웃음). 하여튼 왜 그러는 건지. 웃기지도 않네요.”

“남는 사람들도 고생 많겠어요


12월이 되자 배 총괄은 내년 1월 호부터 <올리브> 매거진의 분량을 기존 대비 절반으로 한 번 더 줄인다고 선언했다. 무엇 때문인지 편집장님 퇴사 이후 3층으로 옮긴 자리도 다시 2층으로 옮기라고 명령했다. 동시에 꾸준히 콘텐츠를 올려왔던 네이버 포스트와 달리 잘 관리되지 않던 인스타그램 운영 업무를 나와 솔비에게 부여했다. 나와 솔비가 디지털 콘텐츠를 전담하고, 유나 선배와 지현이는 지면 콘텐츠를 전담하라는 역할 분담도 함께 지시했다. 지시를 내리며 다시 한번 ‘기회’라는 표현을 사용해 디지털 콘텐츠 업무의 중요성을 설파했지만, 당시는 매체에서 지면과 별개인 디지털 콘텐츠를 활발히 제작하던 시기가 아니었다. 말이 디지털 업무이지 사실상 ‘업로드 업무’에 지나지 않았다.


언짢은 감정마저 들었다. 이미 제작된 <올리브> 매거진 콘텐츠 중에서 인스타그램에서 반응이 좋을 만한, 트렌디한 정보성 콘텐츠를 골라 일관된 형태를 갖춰 재발행하면 그만인 업무는 본래의 에디터 업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왜 나와 솔비만 콘텐츠 제작 업무에서 분리돼 떨어져 나온 건지, 왜 지현이가 유나 선배를 도와 푸드 화보 일색인 지면을 전담하게 된 건지 이유도 명확하지 않았다. 유나 선배는 이번에도 배 총괄로부터 지시를 받았다고만 대답했다. 텍스트가 필요한 인터뷰 기사나 외고 청탁과 관련된 업무는 여전히 내게 담당하라고 했다. 구체적인 물증은 없었지만 나와 솔비와 지현이가 같은 생각을 한 건 필연적이었다.


누구를 인터뷰해도 사진은 잘 찍지 않는 편이었지만, 박세리 감독과는 찍어 두고 싶었다.


<올리브> 매거진에서의 업무 자체는 나무랄 게 없었다. 다시금 상업 매체의 에디터로 일하며 ‘내’ 콘텐츠를 만든다는 자부심과 재미, 열정을 느꼈다. ‘덴비’의 오프라인 캠페인과 모바일 커머스 플랫폼 ‘글라이드’의 론칭 작업에 참여하며 시대의 요구에 발맞춘 콘텐츠 제작 역량도 쌓았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반토막 난 지면의 일부 업무와 책에 이미 발행된 콘텐츠를 인스타그램에 재발행하는 업무만이 내 역할이었다. 배 총괄이 미더운 사람이 아니란 건 확실해졌지만, 결정을 내리진 못했다. 상황이 반전될 또 다른 어떤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뭉뚱그린 낙관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단 하루만 공유되는 세로형 포맷의 ‘스토리’ 기능이 ‘게시물’과 함께 인스타그램에 새로운 활기를 마구 불어넣기 시작한 시기였다. 나와 솔비의 역할은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활용해 <올리브> 매거진에서 취재하고 발굴한 정보성 콘텐츠를 널리 알리는 것. 예를 들면 새로 오픈한 식당의 색다른 메뉴랄지, 주목받는 셰프가 새로운 공간을 오픈한 이야기를 다룬 인터뷰랄지. 단독으로 결정해 콘텐츠를 올릴 순 없었고, (일면식이 전혀 없던) 유진 팀장이라는 분께 메일로 컨펌을 받고 업무를 진행해야 했다. 배 총괄은 신세계 매거진에서 개인 사정으로 휴가를 내고 몇몇 업무를 재택으로 처리하던 유진 팀장에게 <올리브> 매거진의 디지털 콘텐츠 운영 권한을 위임해 둔 상태였다.


배 총괄은 디자이너의 도움 없이 디지털 콘텐츠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이는 레퍼런스를 찾아 스토리 콘텐츠의 디자인을 직접 잡아야 함을 의미했다. 어도비 프로그램과 같은 이미지 제작에 필요한 어떤 툴도 없던 윈도우 PC에서 활용할 방법이라고는 ‘파워포인트’뿐이었다. 아쉽지만 혼자서 파워포인트를 붙잡고 지지고 볶은 다음 디자인팀 경에게 몰래 피드백을 받아 스토리 디자인을 완성했다. 간단한 영상은 비타Vita나 캡컷Capcut 앱을 활용했다. 유진 팀장은 인스타그램 발행주기를 좀 더 타이트하게 가져가는 게 좋겠다고 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디자이너가 아닌 사람에게는 한계가 분명했다.


배 총괄의 지시대로 디지털 업무를 전담하는 건, 이런 콘텐츠를 만들 일이 없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충분히 좌천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스토리용 콘텐츠의 디자인을 잡는 작업 외에는 크게 어려울 건 없었다. 디자인팀에 요청해 책에 실린 콘텐츠의 이미지 에셋만 미리 정리해 두면 그만이었다. 한 달 치라고 해도, 인스타그램 게시물에 들어갈 본문 텍스트와 해시태그를 짜고, PDF에서 원고를 긁어와 네이버 포스트에 예약 발행으로 업로드해 두는 일은 하루이틀이면 충분했다. 발행할 수 있는 범위의 스케줄을 짜고, 엑셀로 스케줄에 맞춰 발행할 콘텐츠별 이미지와 텍스트를 정리하고, 스토리용 디자인을 만든 다음 유진 팀장에게 컨펌 요청을 보내며 참조에는 배 총괄을 넣었다.


단순노동을 두 달 남짓 반복하며 새해를 맞았다. 기획하느라 머리를 싸매는 일, 직접 발로 뛰며 취재하거나 촬영을 나가는 일, 엉덩이를 붙이고 장시간 고민하며 원고를 작성하는 일처럼 매거진 에디터의 본래 업무에 동반되는 그 어떤 생산적인 활동도 없이 1월을 보내는 중이었다. 겉으론 매일이 평온한 듯 보였지만 실상은 달랐다. <올리브> 매거진뿐만 아니라 군데군데에서 일어나는 균열이 느껴졌다. 모든 조직이 나사가 서너 개는 빠진 것처럼 삐걱댔다. 선장이 제 역할을 못 했기 때문이라는 것 말고 다른 요인은 없어 보였다. 선장이 제 역할을 못 하는 배에 승선한 선원들이 맞이할 운명이라고는, 느리든 빠르든 하나로 귀결될 게 분명해 보였다.


<GMT> 매거진 신영 선배는 중구난방 업무 지시에 물려 해가 바뀌기 전 애저녁에 다른 매체로 이직했다. 아시아나 매거진과 <론리플래닛> 디자인팀을 동시에 이끌던 기업 팀장님은 불합리한 업무 배당으로 팀원들의 신뢰를 잃었으며, 그 여파로 팀 내 갈등도 심화됐다. 아시아나 매거진이 2020년 12월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됨에 따라 편집장 없이도 묵묵히 책을 만들던 성화 에디터와 남주 에디터, 디자이너 연지가 자연스럽게 퇴사했다. <올리브> 매거진 디자인팀의 종필 차장님은 마감 때만 출근한 지 오래였다.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양육과 집안일을 담당하기 위해 퇴사를 결정했지만, 신 부사장님의 독특한 배려로 특이하게 회사에는 소속된 상태였다.


운전면허가 있다는 이유로 당일치기 일정으로 경남 하동까지 내려가 촬영하는 일도 얼마든지 즐길 수 있었다. 인터뷰를 하고 촬영을 하는, 에디터 본래의 업무였으니까.


존경하는 팀장은 마감 때만 볼 수 있고 분량도 줄어버린 매체의 디자인팀에서 사실상 혼자가 된 경까지 회사에서 마음이 떴다. 경은 웹 디자인을 새로 배우고 싶다는 욕심과 낮은 연봉으로 고민을 이어오고 있었는데, 배 총괄과의 연봉 협상에서 마음에 드는 인상률을 받아 들지 못했다. 결국 이별을 결심했고 퇴사 날짜까지 확정지었다. <론리플래닛>에서 디자인을 담당했던 다정 또한 조직의 혼란과 기업 팀장님과의 갈등으로 안그라픽스와 작별하기로 결정했다. 경이 퇴사하는 날 매거진 사업부는 회식 자리를 가졌다. 이미 퇴사한 사람들과, 퇴사가 확정된 사람들과, 퇴사가 그리 멀지 않을 것만 같은 사람들이 한데 모여 웃고 떠들었다. 모두의 송별회와 다름없었다.


다음날 평소대로 출근했지만 어제의 시끌벅적함 때문인지 사무실 분위기가 왠지 낯설었다. 송별회에 참석한 사람들 대부분이 이제는 출근할 필요가 없다는 걸 차치하고서도 고요했다. 디자인팀의 연수가 출근하긴 했으나,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자리에 없었다. 유나 선배 역시 출근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보이지 않았다. 단톡방에 따로 연차를 냈다거나 어떤 사정이 있다고 공유해 준 내용도 없었다. “연락해 봤는데 유나 선배는 오늘 개인 사정이 있어서 연차 내셨데”라며 지현이가 사유를 직접 확인하고서야 그 연유를 알게 됐다. 그런데 유나 선배는 어제의 송별회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비가 과음으로 술병이 나 연차를 내고 집에 간 탓에 사무실은 더 썰렁해졌다.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출근하지 않는 상황. 석연찮았다. 연수도 원래 평 주간으로부터 연차를 내고 쉬라는 연락을 받았지만, 집이 인천이고 이미 대중교통에 올라탄 김에 출근한 상태였다.


“사무실이 왜 이렇게 조용해. 다들 술병 났나(웃음).”

“아침에 버스 탔는데 주간님이 연락해서 오늘 특별한 일 없으면 연차 내고 쉬라고 하더라고요. 두 분은 연락 못 받으셨어요?”

“아침에 그렇게 연락이 왔다고? 왜?”

“이유는 모르겠어요. 제가 집이 좀 멀잖아요. 버스는 이미 탔는데 바로 집으로 되돌아가기도 애매해서 일단 출근하긴 했어요. 그런데 사람들도 없고, 사실 할 일이 없네요(웃음). 그냥 집에 갈 걸 그랬나?”

“(웃음)별일 없으면 집에 가지 왜 왔어.”

“아까도 주간님이 일 없으면 집에 가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선배랑 지현 씨랑 점심 먹고 퇴근하려고요.”


연수는 점심을 먹고 퇴근했고 나와 지현이는 커피를 사 들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지현이가 자리에서 메일을 확인하더니, <올리브> 매거진 3월 호에 아직 직장 업무와 유튜브 콘텐츠 제작을 병행하던 ‘육식맨’ 섭외에 성공했다며 기분 좋은 소식을 전할 때였다. 전화가 걸려 왔다. 배 총괄이었다.


배 총괄은 대뜸 나와 솔비와 지현이 셋 모두 나나집으로 올 수 있느냐고 물었다. 기시감부터 들었다. 유나 선배가 출근하지 않았는데 고아 삼남매만 따로 부른다고? 의도가 다분해 보였다. 이상할 만큼 회사에 출근하지 않은 사람이 많은 것도 배 총괄이 만든 그림이지 않을까, 하는 예상까지 가능했다. 배 총괄에게 솔비는 몸이 안 좋아서 연차를 내고 집에 갔다고 말하고 나와 지현이만 나나집으로 향했다.


나나집에서 배 총괄 혼자서 일방적으로 떠든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은 말 그대로 엉망이었다. 배 총괄이 호출한 목적은 나와 솔비와 지현이 모두 회사에서 나가달라는 ‘권고사직’에 있었지만 ‘사직을 권고하는 이유’는 불분명했다. 고아 삼남매를 내쫓고 싶지만 배 총괄 자신도 명분이 부족하단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듯했다. 확증편향에 빠진 사람처럼, 자기 결정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실과 다른 내용과 논점에 맞지 않는 내용을 ‘짜집기’해 늘어만 놓았기 때문이다. 중구난방으로 쏟아진 주장은 얼마든지 반박할 수 있었지만, 지현이와 나는 듣는 것만으로도 지쳐 포기했다. 예상은 하고 있었다. 방향이 없는 조직은 붕괴될 뿐이라고. 다만 그게 오늘일 줄은 몰랐던 탓에 한 시간 동안 표정에서 당혹스러움을 감추진 못했다.


“어제 솔비가 유나한테 디지털 말고 지면을 하고 싶다고 얘기했다고 들었는데, <올리브>(매거진)를 디지털로 전환하는 것 때문에 다들 불만이 많은가 봐. 저는 디지털로 전환해서 새롭게 키워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저번에 봉석한테도 얘기했지만 다들 의견이 너무 많은 것 같아. 시대적인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는 거잖아. 지금은 기자들한테 디지털이 너무나 당연히 요구되는 자질이거든. 솔직히 모두가 디지털 업무를 하는 게 매체에 있어 요즘은 더 지속 가능한 방법이라고 보기 때문에 업무 분장과 관련해서 내가 기자들을 설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디지털 업무’ 역량이 레거시 미디어의 에디터에게도 피할 수 없는 숙명이란 건 익히 체감하던 바였다. 배 총괄의 말 대로 설득할 필요도 없을 만큼, 콘텐츠를 제작하는 사람이 모바일 플랫폼을 활용해 자신이 만든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유통시키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던 터였다. 그럼에도 불만이 생긴 건 <올리브> 매거진의 디지털 업무 분담이 논의나 조정으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와 솔비를 지면 업무에서 일방적으로 배제하는 차원에서 부여됐기 때문이다. 지현이 조차, 왜 음식 화보만 고집하던 유나 선배를 따라 자신이 지면 업무를 전담하게 됐는지 이유를 알고 싶어했다. 명분부터 실익까지 모두 불투명했다.


당시에는 지면처럼 편집을 적용한 스토리도 하나의 방향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보를 구체적으로 전달해야 한다는 강박에 빠졌던 것 같긴 하지만.


“봉석이 유진(팀장)한테 보낸 그 메일들을 저도 봤잖아요. 디자이너가 없는 상황에서 이렇게 하는 건 무리고, 교육도 받지 않았다고 얘기하니까 유진 입장에서는 너무 황당한 거야. 유진도 저한테 불만을 얘기했어요. 그걸 왜 자기가 알아야 하는 거냐고. 아무도 그런 거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거든. 디자이너 없이도 그냥 제시간에 포스팅만 올리면 되는 건데? 제가 SNS 운영하는 방식이 그래요. 에디터 선에서 끝내게 하지, 디자이너가 붙어서 손이 타면 오히려 촌스러워지고 속도감도 떨어져요.”


<올리브> 매거진 콘텐츠의 확실한 장점이라면 음식과 관련된 확실한 내러티브였다. 인스타그램에서 패션을 다루는 매체들과 같이 비주얼만 내세울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내러티브를 담지 못하면 <올리브> 매거진의 특색을 보여주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특히 노출 영역이 좀 더 넓은 스토리 기능을 활용한다면, 콘텐츠가 보여지는 방식에도 더 깊은 고민이 필요했다. 배 총괄 지시에 따라 디자이너 없이 혼자서 고민하고 혼자서 결과물을 완성해야 했기에, 유진 팀장이 요구한 ‘데일리’ 발행은 불가능했다. 이 내용을 일정 관련 메일에 회신하며 이야기한 게 전부였다. 심지어 나중에 확인한 바로 유진 팀장은 배 총괄에게 불만을 이야기한 적이 없다고 했다.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온 더 로드>로 ‘한 달 살기’를 시키려고 했는데 그걸 온 동네에 떠들고 다녔잖아요. 다들 봉석의 미래를 걱정해(웃음). 황당했다니까? 내가 데리고 있는 기자한테 내가 뭘 시키든 무슨 상관이야. 결정은 내가 하는 거야. 내가 지시한 업무인데 나한테 디렉션이 들어오니까 잘못됐다고 느끼는 거예요. 기자의 일이라는 건, 지키는 게 중요하거든요. 잘 묵혀 두다가 마지막에 기사로 터뜨리는 거지. 모든 걸 주변에 알릴 필요는 없어요. 운전을 할 수 있고 남자라는, 봉석이 가진 기본적인 요소가 장점으로 보여서 봉석을 중심으로 기획하고 봉석한테만 제안한 거란 말이야.”


배 총괄의 결정에 토를 달면서까지 걱정을 해줬다면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나를 중심으로 기획하고 나한테만 제안했다는 말부터가 거짓으로 판명이 났기에 그런 사람이 진짜로 있었는지는 믿을 수 없었다. 또 스스로를 기자라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기자였다고 한들 특종을 낚아챘거나 잠임 취재를 통해 ‘빌드업’을 하는 상황도 아니었다. 제안을 받았고, 제안을 실현하기 위해 기획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정보를 관련된 사람에게 물어본 게 다였지만 배 총괄은 권고사직의 이유 중 하나로 했던 이야기를 다시 또 꺼내 들었다. 떠들고 다니지 않았다고 수차례 말했어도 배 총괄에게 이미 나는 떠들고 다닌 사람이었다.


“사실 <올리브> 팀은 다들 조금씩 보완해야 하는 게 있었는데, 마지막까지 어우러지지 않은 것 같아. 디렉터가 바뀌었으면 무조건 디렉터한테 맞춰야 돼. 그건 어쩔 수가 없어. 내가 봉석한테도 얘기했어. 유나가 디렉터로 왔기 때문에 유나를 인정하고 유나랑 잘 지내야 하는 거야. 그런데 그 친구와 잘 지내고 있지 않잖아. 그렇다고 나는 막 서로 잘 지내라고 강요하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봉석이 잘 지내고 싶었으면 잘 지냈겠지. 그걸 내가 사람이 갖는 감정까지 이래라저래라 할 순 없는 거고. 나는 ‘누가 나를 존경해야 돼’ 이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디렉터인 선배의 지시에 토를 달 거나 지시를 따르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나와 솔비와 지현이 셋 모두 말이다. 배 총괄의 말대로 매체에서 디렉터의 말을 따르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선배가 서운함을 느꼈다고 한들, 도대체 어떤 지점에서 서운함을 느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던 이유다. 한두 번도 아니고 배 총괄이 이렇게까지 여러 번이나 유나 선배를 챙기며 고아 삼남매에게 지적을 하는 상황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누가 봐도 반어법인데, 본인은 잘 지내라고 강요하지 않는다는 말 역시도. 유나 선배가 고아 삼남매를 향한 불만을 수시로 배 총괄에게 털어놓은 걸까? 아니면 배 총괄이 유나 선배를 구실로 고아 삼남매를 내쫓으려 한 걸까.


아시아나 기내지는 안그라픽스에서 창간했고 안그라픽스에서 폐간했다. 무크지 형태로 꽤 값진 콘텐츠가 담겨온 매체였기에 폐간은 모두에게 아쉬움을 남겼다.


“제가 처음 맡았을 때 <올리브>가 4억 적자였고 <론리플래닛>이 2억 5천만 원 정도 적자였어요. 아시아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정도였고. 그래서 아시아나는 제작 부수를 3분의 1까지 줄였어요. 코로나가 3월부터 난리였고, 그때부터 면중 편집장님께 부수를 줄이자고 했어요. 무조건 줄여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대한항공이 먼저 부수를 줄였으니 아시아나 클라이언트를 설득하는 데도 문제가 없었는데 편집장님이 두 달을 끈 거죠. 편집장님이 클라이언트한테 부수 줄이는 얘기를 안 하겠다고 하셔서 그만두시게 된 건데, 사실 굉장히 간단한 일이었어요.”


의도가 뭘까. 여름이 끝나갈 무렵 본인과의 트러블로 퇴사한 아시아나 편집장님의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다시 들춰내 자리에 없는 사람을 비난하며 이번에도 권고사직을 꺼내든 자신의 무결함을 강조하려는 태도로보였다. 본인의 말이 사실인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양쪽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 없는 3자의 입장에선 무엇이 사실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아시아나 편집장님이 제작 부수를 줄이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고 해도, 나는 그 사실이 발생한 이유를 명확히 알지 못했다. 서로 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자리의 논점과도 무관했다. 듣는 내내 불쾌한 기분만 들었다.


“경한테 12월부터 연봉을 굉장히 많이 올려주겠다고 이미 개런티를 했어요. 나는 거절할 수준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는데 경은 아니더라고. 회사에서 올려줄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이었던 것 같은데도. 경은 더 받기를 원했는데, 경이 요구한 인상률은 상식적인 급여 인상률이 아니었어요. <올리브>가 돈도 못 버는 상황인데 경만 그렇게 올려주는 게 가능하겠어? 그러면 안 되는 거라니까. <올리브>도 누적 적자가 많아지고 있어서 어떻게든 자리 잡게 하려던 상황이었는데.”


연봉 협상과 관련된 이야기는 경에게 들어서 얼추 알고 있었지만, 이미 퇴사한 사람 이야기였다. 반박도 수긍도 하고 싶지 않았고 해서도 안 됐다. 테이블에 오른 주제인 고아 삼남매의 권고사직과도 전혀 무관한 이야기였다. 면중 편집장님 뒷담화에 이어 개별 직원의 험담까지 연달아 꺼내는 배 총괄의 모습에서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던 리더로서의 허울마저 무너져 내렸다. 리더는 제시하고 결정하고 책임지는 자리다. 리더에게 변명은 자신의 권위를 낮출 뿐이란 사실을, 그때 몸소 깨달았다.


“편집장 자리도 면접을 많이 봤지만 다들 멍청하게 일하려고만 하지 제대로 일하겠다는 사람이 없어. 제대로 역할을 할 사람이 진짜 ‘빵명’이었어 ‘빵명’. 우리가 먼저 연락했던 사람도 자기는 반은 다른 일을 하면서 책을 만들고 싶다고 하고. 그래서 편집장을 뽑지 못했던 거예요. 기자는 있는 사람들로 충분했어요. 솔비도 생각보다 음식에 전문적이고 봉석은 글을 쓸 수 있고, 유나랑 같이 일하는 지현에게서도 내가 그동안 모르던 면을 많이 봤고. 그리드 스튜디오는 사진을 너무 잘 찍기 때문에 의지할 수 있고. 경도 뭐, 저는 경한테 딱히 불만은 없었어요.”


분명 새로운 편집장님이 온다면 좋았을 일이었지만, 편집장을 뽑아달라는 이야기를 배 총괄에게 꺼낸 적은 없었다. 생각해 본 적도 몇 번 없었다. 결국 또 편집장이 안 구해졌다는 사실로 <올리브> 매거진의 발행을 중단하게 된 결정을 정당화하려는 걸로 보였지만, 인과관계가 터무니없이 빈약했다. 배 총괄은 매체별 편집장 없이도 본인이 모든 매체를 이끌 수 있다고 자진해 온 당사자였기에 더 그렇게 느껴졌다.


2021년 2월 호. 내 이름이 올라간 마지막 <올리브> 매거진.


“나는 기분 좋게 일했으면 좋겠어. 열심히 해서 디지털이든 뭐든 세상이 변하는 방향에 맞게. 그렇게 콘텐츠를 만드는 게 목표일 수밖에 없어. 그리고 계속 책을 내잖아? 그럼 영업을 해야 돼. 하지만 나는 기자들한테 절대로 영업을 시키지 않아요. 둘이 어디 가서 돈 벌어 올 거야? 존쿡 델리미트 같은 데는 사장님이 소리 지르고 이러는데 거기 가서 영업할 것도 아니잖아. 그래서 권고사직 얘기를 드리는 거고. 앞서 그만둔 다른 친구들은 사실 본인이 그만둔다고 그랬지 회사가 권고해 준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지금 상황은 책이 안 나오게 된 거니까 권고사직 처리를 안 해 줄 수도 없는 거잖아.”

“저희가 어떤 대답을 드리면 되는 거죠?”

“두 사람이 신세계(매거진)에 와서 일을 할 것도 아니고 디자인 G팀에 갈 것도 아니잖아요. 거기는 지금 에디터를 채용하고 있긴 해요. 그런데 절대 안 갈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굳이 얘기하지 않는 거고. 간다고 해도 신나게 일을 할 것도 아니고. 권고사직을 받고 싶은 건지 아니면 다른 팀에라도 남아서 일을 하고 싶은 건지. 그냥 내가 생각했을 때는 원하지 않는 일이지 않느냐는 거야. 현실적으로 책이 안 나오게 됐고 더 이상 취재가 진행되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하고 싶은지 의견을 주면 그에 따라서 고민해 보자는 거야. 지금부터 책을 만드는 일에 대해선 준비할 게 없다는 거지. 어쨌든 서로 얘기해 보고 월요일 편한 시간에 알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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