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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스턴, 문제가 생겼다 2

산 넘어 산, 또 다른 문제가 부상할 줄이야

by 곽뽕

편집장님은 여전히 만나기 힘들었다. 오히려 사무실보다 글라이드 미팅을 위해 찾은 판교나 클라이언트가 방문한 스튜디오 촬영 현장에서 뵐 때가 더 많았다. 분명 배 총괄과 편집장님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 분명한데, 어떤 일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안다고 달라질 건 없었지만, 계속해서 배 총괄이 자신과 모든 에디터를 내보내려 한다는 이야기만 앵무새처럼 늘어놔 진실이 알고 싶을 뿐이었다. 중간에 끼인 채 옴짝달싹 못 하는 형세가 스스로도 짠할 지경이었다.


출근하면 직접 내린 드립 커피로 산뜻하게 하루를 시작했다. 에디터로서 음식과 관련된 다양한 콘텐츠도 재미있게 만들었다. 월급도 매달 문제없이 통장에 따박따박 꽂혔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 불편함이 들어찼다. 평일이면, 특히 사무실에 있을 때면 늘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하루는 편집장님이 오후에 사무실로 출근해 방으로 호출했다. 본인이 결재 올린 법인카드 사용 내역을 배 총괄이 승인하지 않는다며 불평을 꺼내 놓았다.


안그라픽스는 가로수길로 이사를 앞둔 시점부터 개인형 법인카드를 도입했다. 결제일에 개인 통장에서 사용한 비용이 먼저 빠져나가고, 급여일에 회사가 결제 금액을 정산해 주는 방식이었다. 당시 매거진 사업부 에디터의 법인카드 한도는 대략 150만 원 내외. 내가 사용하는 비용은 매달 90만 원 정도였다. 편집장이라면 그보다 한도도 훨씬 높을 테고 사용하는 비용도 더 많을 테니 ‘단단히 짜증나셨겠구나’하고 생각하며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배 총괄은 6월 한 달만 편집장님의 법인카드 사용 내역을 승인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여태 사용한 법인카드 비용을 하나도 정산받지 못하고 계셨던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말이 되니? (배 총괄) 진짜 이상한 여자라니까.”

“저희보다 사용하는 비용도 많으시잖아요.”

“응응. 하여튼 그 여자랑은 얘기하고 싶지 않아서 신 부사장님한테 빨리 처리해 달라고 얘기해 놨어.”

“네.”

“나 없을 때 그 여자가 너희한테 다른 얘기는 안 했어?”

“별 얘기는 없었습니다.”

“무슨 말을 하든 믿으면 안 돼. <올리브> 매거진도 다 자기 사람으로 바꾸려고 했다니까. 너희 다 내보내고 다시 뽑으라고 했는데 내가 절대로 안 된다고 했어. 하림(글라이드)은 회장님이 <올리브> 매거진을 직접 선택한 거라 내가 아니면 못 해. 그리고 하림이 비용도 꽤 크거든. 안그라픽스 입장에서 굉장히 큰돈이라 배 총괄도 함부로 못 건드리는 거야. 그러니까 안심해도 돼(웃음).”


편집장님은 배 총괄이 의도적으로 법인카드 결제 내역을 승인하지 않는 거라고 덧붙였다. 이어서 자신이 엊그제 안미르 대표에게 메일을 하나 보냈다며, 다른 데 얘기하면 안 된다고 속삭였다. 한 번 보라며 PC에서 보낸 메일함을 열고 의자를 잠시 내주기까지 했다. 메일 내용은 사실상 협박과 다름없어 보였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편집장의 권한을 침해하지 말아라, <올리브> 매거진과 하림 프로젝트를 건들지 말아라, 배 총괄과 같이 일하지 않게 해 달라, 그렇지 않으면 그만두겠다. 참조에는 배 총괄과 신 부사장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괴랄한 정치 싸움으로 회사 분기가 어수선하던 중, 미쉐린 가이드 별 한 개를 획득하고 안국으로 자리를 옮긴 '묘미'에서 김정묵 셰프를 인터뷰했던 날.


편집장님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는 내용은 언제나 똑같았다. 참인지 거짓인지 판별할 수 없는 정보. 참이라고 해도 문제였고 거짓이라고 해도 문제인 정보. 백번 양보해 배 총괄이 모든 매체의 편집장을 자기 사람으로 교체하고 모든 에디터를 새로 뽑는다고 결정해도 이해 못 할 건 없었다. 정부가 바뀌면 대통령의 뜻을 받들 사람으로 내각의 수장이 교체되는 것과 같은 이치일 테니 말이다.


단편적이지만 직접 겪은 배 총괄에게서는 그런 의중이 느껴지지 않아 더 혼란스러웠다. 이번엔 배 총괄과도 면담이 잡혔다. 배 총괄은 마치 내가 이미 알고 있다는 걸 파악이라도 한 듯, 편집장님이 안미르 대표에게 메일로 요구했다는 내용을 면담 중 언급했다.


“저는 <올리브> 매거진 에디터들을 교체할 생각이 없어요. 같이 잘해 보고 싶다고 편집장님께 몇 번이나 말씀드렸어요. 그런데 편집장님은 왜 계속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정말. 안미르 대표에게 요구한 내용도 그래요. 대표가 해야 할 역할이 있고 총괄이 해야 할 역할이 있는 거잖아요.”


배 총괄은 “글라이드 프로젝트로 회사가 얻는 이익도 크지 않은데 왜 그걸 탐내겠느냐”라고 어깨를 으쓱였다. “신세계 매거진으로 벌어들이는 금액이 훨씬 큰데 뭐가 아쉬워서 그러겠느냐”라며 고개를 내둘렀다. "이미 촬영에 스태프 비용을 너무 많이 지출한 탓에 사실상 회사에 이득인 것도 없다"고도 하며 혀를 찼다. 이럴 땐 누구 하나를 지지해야 하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사내 정치는 질색이지만 차라리 노선을 택하면 편해질까 싶어 진중하게 고민도 해봤다. 그럼에도 딜레마를 벗어날 순 없었다. 나만 링 위에 오른 사람이었다.


당시 네이버 판 메인에 걸려 조회수가 폭발했던 '케토푸드' 칼럼 메인 이미지. 헬스 칼럼 이미지 촬영은 언제나 즐거웠다.


양쪽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 속에서 일이 또 터졌다. 출근해서 가가집 2층 자동문을 지나 사무실에 들어선 참이었다. 솔비가 자리에서 서럽게 울고 있었다. 어리둥절한 채 가방을 내려놓으며 솔비에게 무슨 일이냐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솔비는 “편집장님이 뒤에서 이상한 얘기를 하고 다닌다”라며 그냥은 못 넘어가겠다고, 고소할 거라며 알 수 없는 말을 토해냈다. 난처했다. 보는 눈이 많으니 진정하자고 달래고서는 일단 회의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2층 회의실은 전체가 투명 유리라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였지만 악에 받친 솔비의 목소리 정도는 감출 수 있었다.


솔비에게 무슨 일인지 자초지종을 듣는데 머리가 하얘졌다. 남자인 내가 들어도 아찔했다. 편집장님은 솔비의 개인사와 관련해 사실과 다른 본인의 지레짐작을 디자인팀 종필 차장님께 전했다. 일종의 뒷담화였다. 그런데 하필 종필 차장님은 눈치도 없이 인쇄소에 함께 감리를 보러 간 솔비에게 편집장님이 한 얘기를 무엇 때문인지 다시 또 꺼냈다. 솔비 입장에선 편집장님이 종필 차장님 한 사람에게만 그 얘길 했을 리 없다는 생각도 들만 했다. 단순한 가십으로 치부하기엔 도가 지나친 내용이었다. 솔비는 주말 내내 모욕을 견디고 출근한 상태였다.


“선배 진짜 이건 아니잖아요. 편집장님은 왜 그딴 소리를 뒤에서 하고 다니냐고요!”

“솔비야 일단 진정하고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생각해 보자.”

“어떡하긴 뭘 어떡해요. 뒤에서 그런 얘길 하고 다니는데 제가 어떻게 얼굴을 들고 회사를 다니냐고요!”

“조금만 흥분을 가라앉히고 잠깐만 고민해 보자. 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

“저 진짜 편집장님이 시키는 대로 다 했어요. 심지어 주말에는 편집장님 태우고 제 차로 제가 운전해서 전주에 와인 셀러까지 다녀왔다고요. 7시간이나요. 그런데 뒤에서 그렇게 말하고 다닌다고요?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요 진짜!”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솔비가 고소하도록 내버려 두거나, 조직 체계상 더 상급자에게 지금의 상황을 전달하고 해결을 요청하거나. 편집장님께 따로 연락해 대화의 자리를 만드는 방법도 떠올려봤지만 최악의 선택이 될 것만 같았다. 나로서는 배 총괄에게 도움을 구하는 게 최선이자 유일한 방법으로 보였다. 물론 그 선택이 가져올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그렇지만 자초지종을 들은 선배이자 양심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 대기업이나 공공기관의 누구처럼 조직 논리를 앞세워 후배에게 참고 넘기자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3층으로 올라갔다. 마침 배 총괄이 회의실에서 다른 사람과 얘기하는 중이었다. 실례를 무릅쓰고 회의실 문을 두드려 긴급히 면담을 요청했다. 출근해서 솔비에게 들은 얘기를 사실만 추려 배 총괄에게 빠르게 설명했다. 편집장님과 지현이는 글라이드 촬영 때문에 스튜디오에 있고, 사무실에는 나와 솔비밖에 없는 상황인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직접 말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양심이 어떠하든 한국이란 사회의 조직에서 3자의 일에 개입했기 때문이다. 내 선택은 어떠한 형태로든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게 분명할 터였다.


“솔비가 울고 있어서 일단 달래 놓긴 했습니다.

“안 되겠네요. 파주에 있는 황 이사님이 인사 담당이시니까 지금 들어오시라고 할게요. 편집장님도 불러서 제가 황 이사님하고 얘기할게요.”

“네.”

“솔비 기자는 지금 밑에 있죠? 여기로 좀 올라와 달라고 얘기해 줄래요?”

“알겠습니다.”


배 총괄은 솔비에게 한 번 더 사실관계를 확인했다. 편집장님과 마주치지 않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며, 솔비를 먼저 퇴근시키라고 지시했다. 얼이 나간 채 책상에 앉아 있던 솔비를 추슬려 얼른 집으로 보냈다. 편집장님과 함께 촬영하고 있을 지현이에게도 카톡을 보냈다. 귀띔이라도 미리 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오전에 벌어진 일은 회사 안에서 금세 퍼져 나갈 테지만, 같은 팀 선배에게 직접 듣는 게 더 나을 거란 판단이었다. 조금 지나 지현이가 먼저 사무실로 복귀했다.


편집장님을 피해 지현이와 대피한 옥상에서 <올리브> 매거진의 향방에 대한 다양한 가정을 세워 봤더랬다.


황 이사님이 점심도 건너뛰고 파주 출판단지에서부터 달려왔다. 배 총괄과 함께 오전에 솔비와 대화를 나눴던 2층 회의실로 들어갔다. 오전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나누며 대책을 세우는 듯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죄지은 것도 없었지만 곧 있으면 도착할 편집장님과는 마주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지현이를 데리고 편집장님을 피해 옥상으로 대피했다. 옥상에서 클라이언트와 미팅을 마친 편집장님이 가가집에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배 총괄이 편집장님과 대화를 마쳤다며 호출했다.


“편집장님은 오늘부로 매거진 업무에서 완전히 손 뗄 거예요. 앞으로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재택으로 하림 업무만 처리하기로 했어요.”

“음… 그럼 편집장을 새로 뽑으실 건가요?”

“신 부사장님하고도 한 번 논의해 봐야 하는데 아마 하림 업무 때문에 당분간은 힘들지 않을까 싶어요. 하림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는 판권에 편집장님 이름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고 하네요. 대신 유나 기자가 디렉터로 합류할 거예요. 유나 기자 알죠? 옆에서 도와주면서 같이 해보면 좋을 거 같아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편집장님은 글라이드 업무에 봉석 기자가 꼭 필요하다고 하는데 본인은 어때요? 아무래도 밖에서 편집장님이랑 계속 만날 일이 생길 거 같은데. 괜찮겠어요? 힘들다고 하면 프리랜서든 누구든 다른 사람을 붙일게요.”

“음… 저는… 크게 상관은 없을 것 같습니다. 글라이드 업무가 몇 달 안 남기도 했고요.”

“이런 말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마지막까지 잘 좀 부탁할게요. <올리브>에 글라이드 업무까지 하느라 고생하는 건 어떤 식으로든 회사가 챙겨줄 거고요. 후배들까지 신경 써야 하느라 힘들 텐데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얘기해요.”


결국 다시 2층으로 원상복귀 했지만, <올리브> 매거진 업무에서 편집장님이 배재된 이후 편집팀은 3층으로 자리를 옮겼다.


가가집으로 이사 오기 전부터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을 겪었다. 먼저 <론리플래닛> 팀이 해체되는 걸 목격했다. 또 사무실 위치가 바뀌었고 팀 내에서 바로 위에 있던 서령 선배가 불명예스럽게 퇴사했다. 매체를 이끌어야 하는 편집장님까지 불미스러운 일로 업무에서 배제됐다. 연달아 벌어진 사건들 한복판에서 회의감마저 들었다. 누구나 회사에 다니다 보면 자의든 타의든 겪어야 하는 일을 나 역시 겪는 것뿐일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들인 걸까? 마침표가 찍히지 않는 의문은 여전했지만 일단은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지시에 따라 편집장님 책상의 PC와 모니터와 개인 물품들은 전부 박스에 담아 퀵으로 보냈다. <올리브> 매거진 편집팀은 디자인팀이 있는 3층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전에는 몇몇 칼럼에만 도움을 줬던 유나 선배가 신세계 매거진 팀이 새로 둥지를 튼 ‘나나집’에서 가가집으로 자리를 옮기며 디렉터로 합류했다. 이제부턴 배 총괄과 평 주간의 지시는 내가 아닌 유나 선배에게 전달될 터였다. ‘에디터스 레터’에 편집장님 글이 실리지 않을 9월 호 특집 기획은 전부 뒤엎어 ‘반려동물’로 선정됐다. 나와 솔비와 지현이 그리고 유나 선배는 서로 살짝은 거리감을 유지한 채 팀으로서 합을 맞춰 나가기 시작했다.


<올리브> 매거진의 편집장 자리까지 공석이 되며 안그라픽스 매거진 사업부의 모든 매체가 온전하지 못한 상태가 됐다. <론리플래닛>은 평창동에서 모든 에디터가 퇴사했지만 본지 기사를 번역해 싣는 형태로 계속 발행됐다. 아시아나 매거진만큼은 풍파 없이 멀쩡하나 싶었지만 면중 편집장님도 배 총괄과의 트러블로 퇴사를 결정했다. 매체에 남은 세 명의 에디터가 같은 해 12월 호까지 편집장 없이 책을 만들어야 했다. <GMT> 매거진에 에디터로 합류한 효진 선배와 디지털 담당으로 합류한 신영 선배가 본래의 직무와 무관하게 <론리플래닛>과 아시아나 매거진 제작까지 도와야 했다. 이에 대한 불만 역시 흡연장의 단골 대화 주제 중 하나였다.


'류니끄' 류태환 세프님이 준비 중이던 '서천 인스터레이션' 다이닝 코스 개발 과정을 르포 형태로 취재했다. 충남 서천 지역을 돌며 로컬 식재료를 직접 확인했던 현장.


배 총괄이 미더운 사람인지는 그래서 확신할 수 없었다. 사람은 계속 퇴사하는 데도, 책임자로서 조직의 명확한 방향이나 목적을 제시하지 않았다. 팀이 해체된 <론리플래닛>을 무의미하게 발행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모든 매체를 편집장 없이 본인이 주도해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왔으며, 잡지가 사양 산업으로 접어든 마당에 라이선스 럭셔리 시계 매거진을 창간해 돈을 벌 수 있다는 계산은 어디에 근거했는지 모든 게 의문이었다. 게다가 당장은 매출이 높다고 해도, 신세계 매거진은 본질적으로 대행 비즈니스였다. 그런데도 배 총괄은 백년해로라도 가능할 듯 마냥 어깨에 힘을 줬다.


무수한 이야기가 양산됐다. 하루하루 이야기에 살이 붙으며 매거진 사업부의 갈피는 오리무중에 빠져갔다. 신세계 매거진과 <GMT> 매거진을 제외한 모든 매체를 폐간할 계획이라는 ‘썰’이 가장 먼저 나돌았다. 사업이 아니라 건물로 수익을 내려한다는 소문도 뒤따랐다. 안그라픽스는 가로수길에 ‘가가집’과 ‘나나집’ 두 채의 건물을 대출받아 구입했는데, 이를 팔아 시세 차익을 볼 심산이라는 내용이었다. 대출을 받으려면 구색이 필요했고, 구색을 맞추기 위해 적자인 매체도 폐간하지 않고 발행하고 있다는 현실의 상황이 소문의 근거였다. 심지어 건물의 등기부등본을 떼 건물을 구입할 때의 대출 비율이 얼마인지 확인해 봤다는 사람까지 등장했다.


배 총괄은 <올리브> 매거진의 분량마저 축소시켰다. 표면상으로는 제작비를 절감한다는 이유였지만 매체의 리뉴얼을 고려하지 않은 조치였다. 이 역시 소문에 힘을 싣는 또 하나의 소재로 작용했다. 성장은 둘째치고 생존을 위해 조직 내에 공유되는 전략 자체가 전무했기에 인과관계마저 충분해 보였다. 시그널로까지 느껴졌다. 이유가 어떠하든 편집장이 공석인 상황에서 책의 볼륨이 작아졌기 때문이다. 볼륨이 작아졌다는 건 매달 제작해야 할 콘텐츠가 줄어든다는 걸 의미했다. 제작해야 할 콘텐츠가 줄었다는 건, 콘텐츠를 만드는 에디터의 존재 이유 또한 줄어든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서천 인스퍼레이션'으로 코스가 꾸려진 기간 동안 '류니끄'에선 내가 만든 <올리브> 매거진 화보가 매장 입구에 전시됐다.


소문은 언제나 실제보다 빨랐다. 유명무실해진 <론리플래닛> 팀을 다시 꾸린다는 이야기도 매거진 사업부 안에 돌기 시작했다. 곧이어 내가 <올리브> 매거진에서 <론리플래닛>으로 자리를 옮긴다는, 나도 모르는 나와 관련된 이야기가 피어올랐다. 게다가 구체적이었다. <론리플래닛>의 여행 가이드북이던 <온 더 로드>를 메인 매체로 격상시킬 계획이며, <온 더 로드>에 코로나19로 부상한 여행 방식인 ‘한 달 살기’를 적용한다는 내용이었다. 다들 나를 볼 때마다 팀을 옮기냐며, “‘한 달 살기’로 출장을 가서 좋겠다”라는 말을 인사처럼 건넸다. 예상대로 소문은 사실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여행이 다시 주목받잖아요. 그래서 <론리플래닛>을 살리고 싶은데 영국 본지가 폐간했어요. 혹시 별책으로 발행했던 <온 더 로드>라고 알아요?”

“여행 관련 브랜드를 붙여서 <론리플래닛>에서 부록 형태로 발행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론리플래닛> 라이선스 재계약이 힘들 것 같아요. <론리플래닛>은 타이틀로만 작게 활용하고 <온 더 로드를> 메인 매체로 키워보면 어떨까 싶거든요?”

“아... 네.”

“여행 트렌드가 바뀌면서 한 달 살기가 요즘 유행이잖아요. 코로나 때문에. 한 달 살기를 <온 더 로드>의 메인 콘텐츠로 가져가면 어떨까 싶거든요. 평소 한 달 살기에 관심이 좀 있었어요?”

“큰 관심까지는 아니지만 기회가 된다면 한 번 경험해 보고 싶다는 생각은 해봤습니다.”

“(평) 주간님이랑 신 부사장님하고도 얘기해 봤는데 다들 봉석 기자를 보내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아무래도 한 달 동안 출장을 가야 하니까 위험할 수도 있잖아요(웃음). 그래서 여자 기자보다는 남자 기자가 적합한 것도 있고, 기혼인 사람보다는 미혼인 사람이 나을 거고. 면허도 있으니까 이동하기에도 수월하고. 자동차나 렌터카 브랜드를 붙일 수도 있고. 신세계 기자들도 가고 싶다고 난리인데 나는 봉석 기자를 보내고 싶거든요? 칼럼을 읽을 때마다 기자님만의 독특한 시선이 마음에 들더라고요. 현지에서 생활하면서 직접 보고 경험한 것들을 콘텐츠로 풀어보는 거예요.”

“음… 재미는 있을 것 같습니다(웃음). 그런데 당장 확답을 드려야 하는 걸까요? 아직 구체적인 기획이 없는 상황이라… 어느 지역으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고요. 한 달씩 떠나는 거면 준비해야 할 것도 많을 거잖아요.”

“기획도 직접 해 봐요. 어느 지역이 좋을지, 가서 어떤 콘텐츠를 다루면 좋을지. 최소한 2주 정도는 직접 살아보면서 콘텐츠를 만들 수 있도록 숙소를 포함해 생활하는 데 드는 모든 비용은 회사에서 지원해 줄 거예요.”

“고민해 보겠습니다.”

“(웃음)다들 가고 싶어서 난리라니까요? 내가 기자였으면 이런 기회는 바로 잡았지. 지금 기자님한테 가장 먼저 제안하는 거예요.”


뜻밖의 행운일까. 아니면 독이든 성배일까. 기회일 수 있는 제안으로 볼 수도 있었지만 좌천일 수 있는 명령으로도 느껴졌다. 음식을 다루는 에디터에서 여행을 다루는 에디터로 역할이 변경됐을 때 얻게 될 득과 실을 명확히 따져볼 필요가 있어 보였다.


‘한 달 살기’라는 여행 방식을 통해 <온 더 로드>가 어떤 포지션에서 무엇을 보여줄 것이며, 어떤 톤앤매너로 이야기를 전달할지 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정해진 바가 없었다. 기존 <온 더 로드>는 롯데렌터카와 같은 브랜드가 제작비를 지원하는 형태로 제작됐기에, 내가 브랜드 섭외까지 담당해야 하는지도 궁금했다. 기획이 먼저라고 판단했다. 배 총괄에게 대략적인 기획을 잡아보겠다고 얘기하고는, 일단은 반만 승낙한 형태로 미팅을 마쳤다.


2020년 12월 호 <올리브> 매거진 '헬스' 칼럼. 내년부터 바뀔 원고 마감 일정에 대해 정재훈 작가님과 이야기하던 중 지현이와 솔비에게 전화 세례가 쏟아졌다.


<올리브> 매거진 ‘헬스’ 칼럼의 원고를 담당하는 정재훈 약사님과 이재훈 셰프의 도산공원 ‘있을 재’에서 점심을 먹던 중이었다. 내년부터 책 분량이 더욱 대폭 줄어들 예정이라 변경될 마감 일정과 원고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참이었다. 지현이한테 전화가 걸려 왔다. 점심 미팅에 대해서는 공유해 둔 터라 볼륨 버튼을 눌러 거절했는데, 얼마 안 가 솔비한테도 전화가 왔다. 이번에도 받지 않았더니 지현이에게서 카톡이 왔다. 솔비한테도 연달아 왔다. 약사님께 잠시 양해를 구하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선배 전화를 왜 안 받아요. 배 총괄이 선배 찾는다고!”

“나를? 나 오늘 정재훈 작가(약사)님하고 점심 먹는다고 했잖아.”

“저도 그렇게 얘기하긴 했는데 뭔가 급하게 찾는 거 같아요.”

“이유는 말 안 하고?”

“따로 말은 없었는데, 뭔가 또 일이 터진 게 아닌가 싶은데.”


일단은 미팅을 마치고 식당에서 나와 곧장 택시부터 불렀다. 부랴부랴 가가집으로 향했다. 사무실에 도착해 전화를 왜 안 받느냐며 솔비에게 한 소리를 듣고, 배 총괄에게 전화를 걸었다. 배 총괄은 면담을 하자고 했다. 나나집으로 지금 올 수 있냐고 물었다. 배 총괄이 찾는 이유에 대해 몇 가지 짐작되는 부분을 떠올려봤다. 앞서 솔비가 배 총괄에게 질책을 받은 이야기가 가장 먼저 머리를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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