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폴로 13호가 아니라 내가 속한 조직에
새로운 공간에는 희망이 담기기 마련이다. 안상수 선생님의 취향이 반영돼 ‘안그라픽스 가가집’이라 명명된 새로운 일터에는 희망과 더불어 설렘과 기대라는 감정까지 묻어났다. 최소한의 리모델링으로 독특하게 연출한 분위기는 색다른 업무 환경을 제공하기에도 충분해 보였다. 좀처럼 적응하기 어려웠던 화장실 구조까지 색다를 필요는 없을 것 같았지만 말이다. 가가집은 지금도 가로수길 터줏대감 중 하나인 ‘르브런쉭’ 매장 옆에 위치해 있어 개인적으로는 익숙한 곳이었다. 작년에 다니던 디자인 21과 불과 100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아 조금 찜찜했던 것도 그래서다. 2층에 ‘콰이’라는 중식당이 있던 건물이었고, 3년간 가로수길로 출근하며 콰이에서 꽤 많은 점심과 저녁을 먹었다.
아시아나 매거진과 <올리브> 매거진 편집팀은 2층을 사용했다. 디자인 회사라는 본질로 인해 이번에도 디자인팀은 편집팀과 다른 3층을 사용했다. 가가집에는 평창동 사옥의 가건물에는 없던 회의실과 그럴싸한 탕비실도 마련됐다. 2층과 3층의 모든 공간이 개방돼 있다는 점은 조금 난해했다. 모든 회의실은 내부에 누가 있는지 훤히 들여다보이도록 시트지 하나 붙지 않은 투명 유리로 전체가 마감됐다. 디자인 팀장님들 방은 물론, <올리브> 매거진과 아시아나 매거진 편집장님 방 출입문은 한지가 발리지 않아 구멍이 숭숭 뚫린 한옥의 미닫이 ‘장지문’ 형태를 띠고 있었다. 누구의 취향인지는 몰라도 의아하긴 의아했다.
“이리로 가까이들 와 봐. 조용히 얘기해야 돼.”
“조용히 얘기해야 한다고요?”
“여기 내 방 도청당하는 걸 수도 있어.”
“도청이요? 누구한테요…?”
“배 총괄이랑 평 주간이라면 그럴 수 있어 충분히. 너희가 나한테 하는 거 못 봐서 그래.”
“설마요 편집장님…”
“이상하지 않아? 방음도 아예 안 되고 이게 뭐니. 진짜 찝찝하다니까. 앞으로 회의는 다른 데서 하자. 아예 나가서 카페에서 하든지.”
정체불명의 남자가 MBC 뉴스데스크 방송 중 난입해 ‘귓속에 도청 장치가 있다’고 말하는 장면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가가집에서 처음 하는 회의 자리에서 편집장님이 본인 방에 도청 장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해괴망측한 얘기를 꺼낼 줄 누가 알았겠느냔 말이다. 첩보 영화에나 등장할 도청 장치 때문에 모두가 소곤소곤 얘기하며 회의를 마쳐야 했다. 밖에 나와 담배를 태우며 방금 상황을 복기해 봤다. 편집장님은 어떤 억하심정을 가졌길래, 어떤 위기감을 느꼈길래, 배 총괄이라는 사람을 저렇게나 못된 사람으로 인식하는 걸까. 이후 편집장님이 얘기하자고 할 때마다 원치 않게 가로수길에서 한 시간 이상씩 걷기 운동을 해야만 했다.
새로운 사무실에서 제작한 <올리브> 매거진 7월 호는 ‘로컬’ 특집 기획을 다뤘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거리두기가 한창인 시절이었고 제주도가 여느 해외 여행지보다 각광받는 시기였다. 강원도도 양양과 강릉을 필두로 색다른 시선에서 주목받고 있었다. 편집팀은 음식과 관련해 ‘제주’와 ‘강원’이라는 두 지역을 대표하는 새로운 트렌드와 공간과 식재료를 조명하는 기획을 꾸렸다. 가가집에 오자마자 서령 선배와 지현이는 제주도로, 솔비는 강원도로 촬영팀을 대동해 출장을 떠났다. 나는 회사에 남아 로컬 식재료를 활용한 ‘집콕 레시피’ 화보와 고정 칼럼들을 제작하며 ‘글라이드’ 업무를 병행했다. 낮에는 매체 업무를, 밤늦게까지 스튜디오 촬영을 진행하며 출장 간 인원이 부럽기도 했다.
출장 인원이 복귀하기가 무섭게 마감이 시작됐다. 7월 호 마감은 아무래도 이사한 사무실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돼 모두에게 조금씩은 더 버거웠다. 다들 출장지에서 취재해 온 내용을 정리하고 인터뷰한 녹취를 풀고 이미지를 수정하느라 정신없었다. 특히 서령 선배가 힘에 부치는 게 눈에 띄었다. 온라인 여행 매체에서 경력을 쌓아온 서령 선배는 <올리브> 매거진에서 처음으로 종이 매체를 제작하는 중이었다. 여행과 와인에 특화된 커리어를 자랑했지만 상대적으로 긴 호흡의 콘텐츠를 만들어야 하는 월간지가 버거울 터였다. 가장 고참이었지만, 평창동에서부터 마감 때면 원고와 씨름하느라 스트레스받으며 가장 늦게 퇴근하곤 했다.
출근하자마자 디자인이 완성된 대지를 돌려 보던 참이었다. 배 총괄이 갑자기 편집장님을 포함한 <올리브> 매거진 편집팀 전원을 3층으로 소집했다. 7월 호 콘텐츠와 진행 상황을 확인한다는 이유였다. 디자인팀 경 자리 앞에 놓인 하얀색 원형 테이블 두 개에 배 총괄과 라이선스 시계 전문지 <GMT> 편집장이던 평 주간과 편집팀 전원이 비좁게 둘러앉았다. 배 총괄이 프린트된 배열표를 들고 대지를 들춰가며 7월 호 콘텐츠 하나하나에 대한 자신의 피드백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타깃은 내가 제작한 ‘집콕 레시피’였다.
배 총괄의 지시로 특집 기획 주제가 ‘로컬’로 선정됐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사 오기 직전 평창동에서 편집장님을 통해 “배 총괄 때문에 갑자기 주제가 변경됐다”고 전해 들었다. 짧은 시간 안에 기획을 완성하느라 며칠간 분주했다. 편집장님은 특집 기획에 맞춰 코로나 시기에 집에서도 온라인으로 쉽게 주문할 수 있는 지역 특산품을 활용한 레시피 칼럼을 만들라는 지시도 내렸다. 이에 따라 나는 강원도의 반건조 피데기, 제주도의 옥돔, 영동 지방의 곤드레 나물을 활용한 세 가지 음식과 레시피를 소개하는 칼럼을 기획했다. 음식별로 테팔의 이모션 프라이팬, 독일 브랜드인 로버트허더의 주방용 칼, 스타우브의 라이스 꼬꼬떼 제품도 매칭했다.
기획부터 시안 제작, 촬영, 원고, 디자인까지 모두 편집장님께 컨펌을 마친 상태였다. 그렇지만 배 총괄은 혼자 사는 여성을 타깃으로 한 칼럼인데 음식의 양이 많아 보인다며, 10분 안에 조리하기에는 불가능한 레시피라며, 여름인데 왜 시원한 얼음 잔 하나 보이지 않느냐며 지적했다. 계절이 드러나게끔 기획하지는 않았다. 화보 톤을 여름에 맞추지 않았다는 지적은 그래서 납득할 수 있었지만 다른 내용은 금시초문이었다. 배 총괄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며 내 의견을 물었다. 어떤 의도로 ‘집콕 레시피’ 칼럼을 제작했는지 조심스럽지만 솔직하게 설명했다.
혼자 사는 여성이 타깃인 칼럼이라는 내용은 처음 들었다고. 코로나 시기라 최근에는 사람을 집으로 초대해 함께 식사하는 오히려 경우가 많다고. 그렇다면 집에서 해 먹는 음식이 꼭 1인분이어야 할 필요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고. 여름이라 얼음 잔이 등장하는 비주얼은 전형적으로 보일 수 있다고. 너무 솔직했나 싶어 후회의 감정이 생기려는 찰나 화제가 바뀌었다. 배 총괄은 편집장님이 있는 자리였지만 <올리브> 매거진 팀이 수준 높은 콘텐츠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며 직격했다. 서령 선배가 만든 ‘제주 오일장’ 콘텐츠를 예시로 들며 강도 높여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게 체험기로 나올 줄 몰랐어요. 이 기사의 목적은 그게 전혀 아닌데 지금 기자의 오일장 체험기가 나온 거잖아요. 그러니까 저는 아직 다들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어제 이걸 보고 서령 기자한테 묻고 싶었어요. 이게 왜 <올리브> 매거진 디렉터의 오일장 체험기가 됐는지.”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한 달간 열심히 만든 콘텐츠 전체를 부정당하는 기분까지 들었다. 에디터 모두가 지켜야 할 절차를 건너뛰거나 독단을 부린 적이 없었다. 모든 과정은 편집장님께 보고한 뒤 원칙대로 진행했다. 지금껏 해오던 방식대로 열심히 기획하고 취재하고 제작하고 편집했다. 그런데 배 총괄은 계속해서 처음 듣는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평 주간도 말을 덧붙였다.
“저희가 ‘집콕 레시피’도 기획을 줬죠? <올리브> 매거진 자체가 디지털 플랫폼에서 활성화되어 있지 않다 보니까 사람들이 많이 안 보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보면서 쉽게 따라하며 해 먹을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기획이었어요. 접점을 만들어 보려고 했어요. 혼자 사는 1인 여성들이 트렌디하다고 느낄 수 있는 콘텐츠를 통해 <올리브> 매거진이 입소문을 타게 하는 게 목적이었다고요. 여러분에게 기획을 받아서 만드는 게 아니었다고요.”
평 주간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그제서야 배 총괄이 지금 어떤 연유로 지적하고 있는지, 왜 우리가 열심히 만든 칼럼에 대해 지적을 받고 있는지 얼추 이해되기 시작했다. 내용이 합당하든 합당하지 않든, 상급자 입장에선 부하 직원이 본인 지시를 따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할 법도 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숨기지 못한 서령 선배의 흥분한 감정이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나왔다. 자신의 칼럼을 지적한 배 총괄의 말에 반박하고 나섰다.
“오일장의 주체가 왜 본인이 된 거예요? 여기에는 심도 있는 탐구가 없어요. <올리브>는 되게 수준이 높은 매체여야 할 텐데?”
“미식 여행 콘셉트잖아요. 여행자의 시선으로 오일장에 가보지 않은 사람에게 제주 오일장에 가면 어떤 식재료들을 접할 수 있고, 분위기는 어떤지 전달해 주는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작성했거든요. 어쨌든 쉽게 와닿고 잘 읽힐 수 있는 수준의 글이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건 지금 다른 기자들 의견과도 다르잖아요.”
“다른 기자들이 얘기한다고 매체의 타깃이 정해지는 건 아니죠.”
“모두가 똑같이 얘기한다는 건 <올리브> (매거진) 타깃에 대해 공통된 의견을 공유하고 있다는 건데?”
“개인의 생각을 물어보셨잖아요. 기자들이 개인 생각을 얘기한 거죠.”
“기자들도 얘기하고 편집장님도 얘기하셨잖아요.”
“(웃음)일반적인 사람들보다는 음식에 좀 더 관심 있는 사람들이 주요 타깃이라는 얘기였어요.”
“서령 기자한테 이걸 물어보면 안 되는 거였네요. 화가 많이 났어요. 이러면 기사에 대해서 피드백을 줄 수가 없어요.”
“아니, 얘기 다하셨는데요.”
분위기는 점점 더 이상한 방향으로 흘렀다. 두 사람 모두 브레이크가 고장 난 트럭을 몰며 질주하고 있었다. 솔비와 지현이 얼굴에도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름대로 고조되는 분위기를 완화해 보고자 대화에 끼어들어 봤지만 역부족이었다. 편집장님도 중간중간 양쪽을 진정시키려고 시도해 봤지만 걷잡을 수 없었다. 모두가 불편한 상황에 놓이고야 말았다.
“지금 싸우자고 하는 거 같아요.”
“싸우자는 건 아니고요. 저희한테 의견을 주시듯이 저도 제 의견을 말씀드린 거고요. 저도 말하다 보니까 말이 빨라지면서 목소리가 높아졌어요.”
“저랑 같아요? 저와 입장이 같아요?”
“어떤 입장이 다른 데요?”
“그러니까 지금 싸우자는 거예요?”
“어떤 입장이 다른지 궁금해서 여쭤본 거예요.”
“저는 전체적인 걸 다 봐야 하는 사람이고, 본인은 본인 업무만 하면 되는 기자인 거고요.”
“그래서 제가 만든 기사에 대해 물어보셨길래 제 의견을 말씀드린 거예요.”
“내려가세요.”
서령 선배가 ‘똥 씹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편집장님도 서령 선배에게 “내려가 있으라”고 지시했다. 나와 솔비와 지현이는 머뭇거리다 ‘방금 발발한 상황을 본인이 정리하겠다’는 편집장님의 눈빛을 확인하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가가집은 규모가 작고 층당 면적이 그리 넓지 않았다. 3층을 빠져나오기 직전, 배 총괄이 “이래서는 같이 일 못하죠”라고 말하자 편집장님이 “제가 잘 정리하겠습니다”라고 답하는 것까지 들렸다. 이제 빤히 예상되는 상황은 둘 중 하나였다. 선배가 해고되거나 그만두거나. 3자의 입장에서 보면 두 사람 모두 선을 넘은 듯했지만, 회사라는 위계 구조 안에서는 서령 선배가 질 수밖에 없는 게임이었다.
사실 제주 오일장 콘텐츠는 미흡한 부분이 있었다. 나 역시 제주 곳곳에서 열리는 오일장에 대한 정보가 핵심인 칼럼으로 알고 있었다. 에디터가 직접 눈으로 보고 느낀, 다른 지역의 오일장과는 차별화된 제주 오일장만의 숨은 이야기나 매력을 전달해야 했다. 그렇지만 서령 선배가 만들어온 콘텐츠는 제주도에 거주하는 스타일리스트와 동행해 오일장에 다녀온 에디터 개인의 감상에 더 가까웠다. 분위기는 느껴졌지만 제주 오일장이 궁금한 사람에게 도움이 될 만한 실질적인 정보가 하나도 담기지 않았다. 앞서 대지를 돌려보며 든 생각이지만 나는 편집장이 아니었고 관여할 부분도 아니었다. 제주도에 같이 다녀온 지현이에게 아쉽다는 얘기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한들 배 총괄의 행동이 이해되는 건 아니었다. 총괄이라는 자리는 매거진 사업부라는 조직 전체를 이끄는 자리다. 굳이 다른 팀 사람들도 있는 개방된 업무 공간 한복판에서, 게다가 후배들 바로 앞에서 선배 에디터 한 명에게 집중해 면박을 줄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와 지현이와 솔비는 지금 누구보다 기분이 안 좋을 선배에게 자리를 피해주기 위해 옥상으로 향했다. 옥상에서 다 같이 담배를 태우며 앞날을 걱정하고 있는데 디자인팀 경이 옥상으로 올라왔다. ‘이제 출근했느냐’며 놀리려고 말을 꺼내려는 찰나, 경이 담배에 불을 붙이자마자 생각지도 못한 울분을 토하기 시작했다.
“서령 선배한테 들이받으라고 가스라이팅은 다 해놓고 이제는 자기가 정리하겠데. 맨날 저렇다니까.”
“응? 경 지금 출근한 거 아니었어?”
“선배, 저 아이맥 뒤에서 다 듣고 있었어요… 회의 시작할 때부터.”
“(웃음)웬일로 일찍 출근했데? 그런데 가스라이팅은 무슨 얘기야?”
“아까 3층에 다 모이기 전에 편집장님이 서령 선배랑 먼저 와서 배 총괄이 뭐라고 하면 들이받으라고 계속 가스라이팅했다니까요. 자기가 옆에서 도와주겠다면서. 그래 놓고 상황 심각해지니까 배 총괄한테 자기가 먼저 내보내겠다고 얘기한 거라고 방금. <론리플래닛> 편집장님한테도 저 지랄 떨었다니까요.”
“그 얘기는 또 뭐야?”
“자세히 설명하려면 긴데, 평창동에 있을 때 배 총괄이 불러서 양쪽에 시킨 게 있어요. 그런데 편집장님이 <론리플래닛> 편집장님한테는 같이 하지 말자고, 저 여자 얘기 들어줄 필요 없다고 해놓고 본인은 했다니까. 그래서 배 총괄한테 <론리플래닛>만 찍혀서 전부 퇴사한 거잖아.”
“그걸 경은 도대체 어떻게 다 아는 건데?”
“선배보다 안그라픽스에 오래 다녔잖아요… 평창동에서도 본관에 있었고. 들리는 게 얼마나 많은데. 가가집에서도 나만 3층이니까 배 총괄이랑 얘기할 기회가 좀 있었어요. 들어보면 배 총괄이 잘못한 게 없어. 편집장님이 이상한 거야. 배 총괄이 시키면 뭉개다가 나중에 발등에 불 떨어지니까 맨날 에디터랑 우리(디자인팀)만 쪼아대고. 완전 사이코라니까.”
“아… 경… 알고 있었으면 얘기 좀 해주지. 우리는 맨날 편집장님이 배 총괄 욕하는 것만 듣고 왜 저러나 싶었다니까. 이사 와서는 심지어 본인 방에 도청 장치가 달린 거 같데. 나 편집장님이 부르면 맨날 나가서 산책하면서 얘기한다니까? 미친 거 아니냐고.”
“아… (웃음)다들 왜 이렇게 순진해? 나는 어느 정도 아는 줄 알았지. <올리브> 에디터들이 왜 전부 그만뒀겠냐고요!”
테트리스 게임을 하다가 죽기 직전에 작대기 블록을 끼워 살아난 기분이었다. 경의 이야기를 듣고서 지금껏 이해할 수 없었던 상황의 파편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평창동에서부터 배 총괄이 갑자기 시켰다면서 편집장님이 급하게 지시하는 업무가 많았던 이유를 비롯해 도통 설명하기 힘들었던 일련의 상황들이 말이다.
이사하기 열흘 전쯤 편집장님은 웹사이트와 네이버 포스트에 2년 치 <올리브> 매거진 콘텐츠를 업로드해야 한다며, 급한 건 아니라면서 나와 지현이에게 업무를 배당했다. 업로드 스케줄을 만들어 보고한 후 승낙까지 받았는데, 이사하기 이틀 전에 대뜸 배 총괄이 다음날까지 전부 올리라고 말을 바꿨다면서 쪼기 시작했다. 결국 지현이와 나는 이사하는 날에도 콘텐츠를 올리며 틈틈이 이삿짐을 날라야 했다. <올리브> 매거진 편집팀 사무실의 이삿짐까지 대신 날라 주던 다른 팀 사람들에게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른다.
사건이 발생하고 서령 선배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가가집을 떠났다. 편집장님이 말하길 서령 선배가 먼저 그만두겠다고 했다지만 이제는 믿을 수 없었다. 배 총괄이 에디터 전부를 내보내라고 했는데 본인이 막았다는 얘기도 마찬가지였다. 신뢰가 깨져버렸다. 지금까지의 편집장님의 모든 행동은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라지만 내가 모시는 편집장님이 이해되지 않는 사람일 줄은 몰랐다. 다 알게 된 마당에 모르는 척 웃어야 한다는 사실도 불편했다. 이후로도 새롭게 찾아낸 퍼즐 조각 또한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7월 호 ‘로컬’ 특집도 배 총괄은 이미 석 달 전에 여름에 맞춰 기획하라고 편집장님께 지시한 내용이었다. 편집장님이 뒤늦게 전달하는 바람에 에디터들이 이틀 만에 기획안을 짜내야 했던 거였다.
‘집콕 레시피’ 화보에 왜 여름 느낌을 담지 않았냐고 받았던 지적도 불필요했다. 지시 사항만 제대로 전달됐다면 말이다. ‘집콕 레시피’가 원래 서령 선배가 담당했던 칼럼이었는데 갑자기 내게 넘어온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편집장님은 배 총괄의 요구를 서령 선배에게 온전히 전달하지 않았다. 배 총괄은 서령 선배가 만들어온 6월 호 ‘집콕 레시피’ 칼럼의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7월 호부터 ‘집콕 레시피’ 칼럼이 내게 배당됐지만, 나 역시 배 총괄의 요구대로 만들지 않은 꼴이 됐다. 매번 같은 식이었다. 배 총괄의 지시와 요구는 편집장님을 거치며 항상 휘발됐다. 그 이유가 무엇일지 수없이 고민해 봐도 언어로 정리하는 건 매번 실패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서령 선배 퇴사 이후 사무실에서 편집장님을 보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배 총괄과 평 주간은 편집장님이 아닌 내게 지시 사항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콘텐츠 제작과 관련해 솔비와 지현이도 편집장님이 없으니 내게 컨펌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회사 안에서 <올리브> 매거진과 관련해 발생하는 모든 사항이 나를 거쳐 가기 시작했다.
의도치 않게 디렉터 역할을 맡아야 했다. 더욱이 편집장님은 편집장님대로 ‘글라이드’ 업무와 관련된 지시를 전화와 카톡으로 전달했다. 낮이고 밤이고 새벽이고 전화해서 배 총괄에 대한 험담도 계속해 늘어놨다. 솔비와 지현이는 이런 상황을 골리려는지 나를 볼 때마다 부편집장이라며 “부편~”하고 불러댔다. 모든 상황이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예민해지는 상황도 잦아졌다.
한 번은 솔비와 대판 싸웠다. 솔비는 <올리브> 매거진에서 에디터로 일한다는 사실에 굉장한 자긍심을 느끼는 친구였다. 음식 스타일링에는 소질이 뛰어났지만 콘텐츠 만드는 일 자체에 있어서는 부족한 부분이 적지 않았다. 에디터였지만 ‘잡지’라는 책을 많이 읽지 않았다는 것부터 눈에 띄었다. 게다가 경력상 <올리브> 매거진이 첫 번째 매체였지만 나이가 한 살 많다는 이유로 지현이보다 선배였다. 길지는 않아도 지현이는 <밀크>, <나일론>, 매거진 <F> 등에서 경력을 쌓아 왔음에도 말이다. 마감 때면 정신없던 서령 선배를 대신해 내가 솔비와 지현이에게 피드백을 주어야 할 때가 많았는데, 둘은 피드백을 받아들이는 자세에서부터 차이를 보였다.
지현이는 먼저 물어도 보러 오고 피드백을 주면 다음 업무부터는 착실하게 반영하는 모습을 명확히 보였지만 솔비는 달랐다. 듣는 둥 마는 둥, 원고를 고쳐줘도 반영하는 둥 마는 둥 할 때가 많았다. 내 업무에 피해를 주진 않았기에 몇 번은 그냥 넘겼지만 본인이 급하면 자기 원고를 빨리 봐 달라고 징징대는 모습마저 보였다. 솔비의 태도와 업무 방식에 대해 한 번은 확실히 단도리하고 넘어가는 게 맞지 않나 싶었다. 다만 내 딴에는 직접 지적하는 것보다 지현이를 통해 슬쩍 의사를 전달하는 게 더 나을 거라 생각했다. 헌데 명백한 착오였다.
악감정은 없었다. 차별하려던 것도 아니었다. 좀 더 조심해야 했지만 나도 모르게 솔비보다 지현이에게 더 살갑게 대한 모양이었다. <올리브> 매거진에서 디자인팀 경과 더불어 지현이는 흡연자라 같이 대화할 일도 더 많았는데, 솔비가 보기에는 그 모습이 내가 자신을 차별한다고 생각하게 만든 원인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한 살 터울이고 막역한 사이라고 생각했지만 솔비는 지현이를 완전한 아랫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후배의 입을 통해 내가 전한 자신의 이야기를 듣던 솔비가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며 지현이가 SOS를 요청했다. 급하게 옥상으로 올라갔다. 나를 보자마자 성질부터 내는 솔비를 보자 최근 상황에 예민해진 나까지 곧장 뚜껑이 열렸다.
“선배, 미친 거 아니에요? 지현이가 나보다 후배잖아요.”
“뭐라고? 너한테 바로 얘기하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거 같아서 그렇게 했다.”
“아무리 선배가 전하라고 시켰다지만 후배한테 지적받는 게 말이 돼요?”
“지적하라고 시킨 게 아니라니까?”
“그럼 이게 뭐냐고요. 내 입장은 생각 안 해요?”
“내가 몇 번이나 좋게 얘기했지. 그런데 안 들어 먹었지. 그래서 지현이한테 자연스럽게 한번 얘기해 보라고 했다.”
“맨날 지현이만 데리고 담배 피우러 옥상 올라가고. 나만 따돌린 거 아니냐고요. 가뜩이나 저도 편집장님 때문에 힘들어 죽겠는데!.”
“야! 말은 똑바로 해. 따돌리긴 뭘 따돌려. 그리고 그 얘기가 왜 나오는데? 네가 힘든 데 뭐 어떡하라고. 너만 힘들어?”
“안 그래도 지난번에 서령 선배도 저한테 얘기해서 고치려 했다고요.”
“그럼 왜 안 고쳤냐? 경한테 하는 태도도 엉망이야. 교정 선생님 대하는 태도도 개판이고. 도대체 네 원고 봐 달라고 나한테는 왜 닦달하는 건데? 내가 편집장이야? 난 그냥 도와주는 거야. 그런데 너, 내가 네 원고 봐주면 뭘 고쳤는지 복습은 하냐?”
“한다고요 저도. 선배가 고쳐주면 저도 본다고요. 하… 진짜 나한테 왜들 그러냐고요!”
나름대로 고민한 끝에 조심스럽게 의견을 전달할 방법을 고안해 냈다고 생각했는데 충분하지 않았다.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 솔비를 보며 정나미가 뚝 떨어졌지만 내 잘못이 분명했다. 솔비와 관계가 틀어진 채라면 의도치 않게 맡은 ‘소년 가장’ 역할도 더 버거워질 터였다. 주말 내내 금요일에 벌어진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무엇일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뚜렷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내 잘못부터 인정하고 지적할 부분은 솔직하게 얘기하자. 당시의 나로선 그게 최선이었다. 그래야만 또 다른 오해를 만들어내지 않을 것 같았다. 메모 앱을 열고 사과할 내용과 바로잡을 내용과 원래 지적하려고 했던 내용에 대해 적어 내려갔다. 혹시 감정을 상하게 할 말은 없는지, 잘못 해석될 부분은 없는지 원고를 쓰듯 여러 차례 퇴고하며 글을 다듬었다.
하고 싶은 말을 입 밖으로 꺼내자니 또 다른 오해가 생길지 몰라 이렇게 말해.
우선 네가 선배고 지현이가 후배인데, 뒤늦게 지난주 일에 대해 생각해 보니 네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힌 것 같아 신경 쓰이네. 지현이 통해서 너한테 무언가를 얘기하고자 한 점은 실수였다는 거 인정해. 앞서 너한테 얘기한다고 얘기한다는 걸 돌려서 말하다 보니 네가 이해를 못 한 거 같아서, 그래서 나름대로 조심스럽게 전달할 방법에 대해 고민한다고 고민한 결과였어. 물론 이런 결과를 초래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 내 실수야.
(…)
지금 사실 <올리브> 만드는 게 어려울 건 없어. 기획도 많이 들어가지 않고 그냥 일손이 달리다보니 몸만 힘든 수준이라고 생각해. 그런데 이게 상황이 어떻게 바뀌어서 어떤 방식으로 운영될지는 모르는 일이겠지? 누가 됐든 내 위로 선배가 또 들어오겠지만 나는 나대로 힘닿는 선에서 알려주고 도와주고 끌어주고 할 테니까 잘만 따라주면 어떤 방향으로든 너 커리어에 나쁜 영향은 없을 거라고 봐.
이렇게 쓴 글을 읽고서 내가 꼰대라고 생각해도 하는 수는 없어. 다만 기분 나쁘지 않은 선에서 동의했다면 어색하겠지만 웃으며 인사 정돈 괜찮겠지? 참 글에 오탈 많다.
솔비에게 카톡으로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한동안 답이 없길래 헤어지자는 여자친구를 붙잡으려는 남자 친구처럼 초조한 감도 없지 않았다. 그래도 솔비가 ‘쪼다’는 아니었다. 일요일 밤늦게 답장이 도착했다. 솔비의 답장에는 자신도 반성한다며, 어시스턴트 경험과 다르게 에디터가 되니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 자신도 힘든 부분이 있었다며, 앞으로 주의하며 계속 배워나가겠다며, 죄송하고 감사하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진심이 전달된 거 같아 한시름 덜었다. 월요일부터 솔비와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마주했다. 그때부터 나와 솔비와 지현이는 돈독해졌다. 마치 하는 수 없이 우애가 끈끈해질 일밖에 없는 고아 삼남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