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를 바라보던 세바스찬의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았어
참아야 했다. 이전 직장인 그룹 IDD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사수를 보며 ‘혐오’의 감정까지 느꼈던 내가 똑같이 화를 내버렸다. 적어도 10분이라도 참고서, 담배라도 태우며 어떻게 대응할지 고민해 보는 게 조금은 더 현명한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핑계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당시의 나는 다른 선택지를 볼 수 없을 만큼 임계점을 넘은 상태였다. 유치하지만 억울한 감정마저 들었다. “클라이언트도 충분히 만족하는 결과물을 내놓고, 업무는 항상 2인분 이상을 해 왔음에도 왜 자꾸 이런 상황에 놓이는 걸까”.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부동산을 ‘주거’라는 본질적 이상으로만 바라보려고 했던 문재인 정부의 패착과 무섭게 닮아 있었다. 부동산 가격을 잡겠다면서 ‘투자’와 ‘투기’라는 현실적 가치를 애써 무시한 것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2019년까지도 조직을 ‘업무’라는 이상적 기준으로만 바라봤다. 조직 내 모든 구성원의 최우선 가치가 업무에만 있지 않음을 다시 또 경험을 통해 배우고야 말았다. 물은 또 엎질러졌다. 대표님 방을 나오며 이미 결정을 내렸다. 진행 중인 업무만 마무리하고 디자인 21을 나오기로, 영영 작별을 고하기로. 다시 또 정 대리를 두둔하는 박 실장님의 태도를 보며 일말의 여지조차 깔끔하게 사라졌다.
상업 매거진에서 다시 내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꿈틀댔다. ‘대행’이라 불리는 업무에도 왠지모를 싫증이 났다. 남성 패션지 피처 에디터는 힘들지 몰라도 찾는다면 분명 다른 길이 있지 않을까? 기필코 이번에는 주도적으로 직장을 선택하겠다고 결심한 뒤 최소한의 기준도 정했다.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기준에 부합하는 곳이 아니라면 가지 않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그렇게 여행 전문 매거진 <에이비로드>와 음식 중심의 라이프스타일 매거진을 표방하던 <바앤다이닝>, 직장인 대상 온라인 강의 플랫폼 ‘패스트캠퍼스’와 위워크를 위시해 막 생겨난 국내 공유오피스 업체 ‘스파크플러스’에 면접을 보기 시작했다.
혜화동에 위치했던 <에이비로드>는 사무실에 들어서면서부터 무언가 꺼림칙했다. 연봉을 맞춰 주기도 힘들 만큼 영세해 보였다. 스파크플러스는 1차 면접을 보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불합격 소식을 통보받았다. 패스트캠퍼스는 최종 면접까지 봤지만 1차와 달리 2차 면접관들의 태도가 썩 나와는 맞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로수길 신사동 고개 부근에 위치했던 <바앤다이닝>은 무난하게 1차 면접을 통과했다. 매체 자체의 퀄리티는 마음에 들었으나, 대표와 편집장인 부부가 운영하는 소규모 가족 회사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예전부터 채용 사이트에 같은 공고가 수시로 올라오는 것도 봐 온 터였다. 때마침 <바앤다이닝> 2차 면접을 앞두고 <올리브> 매거진과도 면접이 잡혔다.
당시 <올리브> 매거진은 스타벅스와 커피빈에 비치돼 있어 익숙한 매체였다. BBC <탑기어> 매거진을 발행하는 영국 이메디에이트immediate 미디어가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도 얼추 알고 있었다. 그런데 국내 발행처는 이력서를 내며 처음 알았다. 1세대 그래픽 디자이너인 안상수 선생님의 안그라픽스에서 발행하고 있을 줄이야. 조금 특이하게도 안그라픽스의 단행본 출판사업부는 타이포그래피 학교가 위치한 파주 출판단지에 있었지만, <올리브> 매거진을 발행하는 매거진 사업부는 평창동 단독 주택가에 자리하고 있었다. 광화문 ‘서울 파이낸스 센터’에서 보자던 편집장님이 그래서 의아했지만 달리는 차 안에서 면접을 보는 것보다는 일견 합당하다고 느껴졌다. 비가 꽤 쏟아지던 2월 둘째 주 수요일이었다. 서울 파이낸스 센터 지하에 위치한 커피빈을 찾았다.
“<모터트렌드>에 있었으면 태영이 알겠네?”
“김태영 선배 말씀하시는 거죠? 인턴 할 때 태영 선배 옆자리에 있었습니다.”
“어머. (웃음)나 태영이랑 친한데. 태영이한테 어떤 친구였는지 물어보면 되겠다.”
“아… 네네(웃음).”
“포트폴리오 보니까 잘할 거 같아. 이전에는 연봉이 얼마였어?”
“3,300이었습니다.”
“희망하는 건?”
“3,600 희망합니다.”
“음. 가능할 거 같은데 혹시 모르니까 회사에는 한 번 물어볼게(웃음). 조금 변동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건, 알지?”
“네!”
“참 우리 사무실에 상주하는 진돗개가 두 마리 있어. 동해랑 서해라고. 혹시 털 알레르기 있나 해서.”
“(웃음)강아지 좋아합니다.”
“사무실은 이사할 예정이고 정확한 위치는 안 정해졌지만 신사동과 논현동 일대일 것 같다”는 얘기까지 듣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번 더 보자는 <올리브> 매거진 편집장님의 연락을 받고 이번엔 사무실이 있는 평창동으로 향했다. ‘김종영 미술관’이 문을 닫아 ‘수에뇨’ 카페에서 연봉과 출근 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확정된 출근 날짜는 3월 2일. 연봉은 희망한 금액보다 100만 원 적었다. 편집장님이 4월 호 기획안을 준비해 하루만 회의에 먼저 참여해 달라고 정식으로 요청한 만큼, 최종 합격 연락을 받은 <바앤다이닝>에는 입사 포기 의사를 전달했다. 안그라픽스가 좋은 회사일 거라는 확신은 없었지만, 앞서 마음속으로 정한 기준에 따르자면 적어도 <바앤다이닝> 보다는 나은 선택지로 보였다.
편집장님이 챙겨 준 과월호 <올리브> 매거진을 분석하며 도파민이 솟았다. ‘해야 하는 기획’도 분명 있었지만 상업 매체에 다시 오니 ‘하고 싶은 기획’을 보다 마음껏 구상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올리브> 매거진 음식을 다룬다. 음식은 음식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음식을 만드는 사람, 음식을 소비하는 공간, 음식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탄생하는 트렌드와 다양한 물건 등 ‘음식’으로부터 파생되는 주제가 무수히 많다. 그중 내가 잘 다룰 수 있고, 새롭게 다뤄 보고 싶은 주제들로 첫 번째 <올리브> 매거진 기획안을 채웠다. 경쾌한 발걸음으로 평창동 <올리브> 매거진 편집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올리브> 매거진 편집팀 TO는 편집장님을 포함해 총 다섯이었다. 처음 입사했을 땐 기석 선배와 서령 선배와 나와 솔비가 한 팀이었다. 기석 선배가 한 달 뒤 퇴사하며 지현이가 새로 입사했다. 편집장님을 제외한 모든 에디터가 <올리브> 매거진에 온 지 얼마 안 된 ‘뉴비Newbie’인 셈이었다. 기획 회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편집장님의 팀 소개를 들으며 고개가 살짝 갸우뚱해졌지만 크게 문제 될 것 같진 않았다. 후배를 쥐 잡듯 잡는 사람이든, ‘뺀질나게’ 게으른 사람이든, 법인카드를 개인적으로 유용하는 사람이든 모름지기 매거진 에디터라면, 자신이 만드는 콘텐츠에 있어서 만큼은 누구보다 애정을 가질 테니 말이다.
기획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데 안도감이 들었다. 더 이상 <라라랜드>의 마지막 장면에서 미아를 바라보던 세바스찬의 감정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구나 싶었다. <라라랜드>는 내게 ‘새드 엔딩’인 영화다. 세바스찬과 미아는 꿈은 이뤘지만 사랑에는 실패했다. 세바스찬의 재즈바에 찾아온 미아는 이루지 못한 현실에 대한 상상을 머릿속에 그리다 이내 곧 진짜 현실로 돌아온다. 그 자체로 미련이고 후회이며 반성이다. 내게 있어 미련과 후회와 반성이란 단어는 행복이란 단어와 짝을 이루지 못한다. 4년 전 <모터매거진>을 나온 뒤부터 줄곧 미아를 바라보던 세바스찬(혹은 세바스찬을 바라보던 미아)의 감정을 느껴왔다. 더는 매체에서 콘텐츠를 만들 수 없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리브> 매거진의 출근을 확정 짓는 순간부터는 아니었다.
단독 주택을 개조해 사용했던 안그라픽스 평창동 사옥은 <올리브> 매거진과 <론리플래닛>이 가건물로 지은 별관을, 아시아나 매거진과 기업 홍보물 제작팀과 디자인팀이 본관인 주택 건물을 사용했다.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짖는 탓에 출근할 때마다 달래야 했던 ‘동해’와 ‘서해’를 만나는 아침으로 평창동의 하루가 시작됐다. 대중교통이 불편해 자차를 이용했던 것과 점심 먹을 곳이 많지 않았다는 것, 외근 나갈 때 택시가 잘 안 잡히는 것만 제외하면 의외로 만족스러웠다. 이색적이고 쾌적했다. 새가 지저귀는 한적한 평창동으로 출근하는 직장인의 삶. 점심을 먹고 소화 시킬 요량으로 동네를 산책하기에도 좋았다.
‘발품 팔아 찾은 맛집’ 취재로 본격적인 마감 업무를 시작했다. 매달 한 가지 음식을 집중해 조명하는 ‘원 푸드’ 칼럼과 이색적인 식재료를 레시피와 함께 소개하는 ‘인그리디언트’ 칼럼도 담당했다. 특히 내가 전담했던 ‘헬스’ 칼럼은 <올리브> 매거진 피처 콘텐츠의 꽃이었다. 각광받는 음식 트렌드나 주목해야 할 식습관처럼 전문 지식이 필요한 이슈를 선별했다. 어려운 의학 지식도 음식을 매개로 재미있게 들려주던 정재훈 약사에게 외고를 청탁한 뒤 그달 주제를 시각적으로 표현할 이미지를 제작했다. 한 장의 이미지로 주제를 적확히 표현할 방법을 고민하고, 스튜디오에서 촬영하는 과정을 즐기면서 다시금 매거진 에디터가 됐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체감했다.
‘바터Barter’ 형태로 브랜드로부터 물건을 제공받고 새로 출시된 주방용품을 지면에 소개하는 ‘툴’ 칼럼도 전담했다. 잡지의 영향력이 날이 갈수록 줄어드는 터라 제품과 지면을 등가로 교환하는 과정은 험난했다. 제안서를 작성하고 10개 브랜드에 연락을 돌려도 긍정적인 회신이 오는 곳은 1~2곳 남짓. 성공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필수적이었다. 꾸준히 브랜드에 연락을 돌리며 지속적으로 담당자를 설득하는 것만이 정공법이었다. 다만 긍정적으로 회신한 브랜드도 꼭 제품 수량을 조절하길 원했다. 과거 잡지 업계의 전성기 시절을 거쳐 온 편집장님은 결코 양보하는 법이 없었기에, 매번 내부 설득에 애를 먹었다. 합리적인 수준에서 설득에 성공하고 제품을 받아볼 때면 휘파람이 절로 나왔다.
“편집장님, 바터 금액 조정 가능하냐고 브랜드에서 연락이 왔는데요.”
“얼마나?”
“20개 정도로도 가능하냐고요. 정가가 8만 원짜리 제품이니까 원래는 35개 정도는 돼야 합니다.”
“알잖아~ 우리 금액이 정해져 있어서 안 된다고 해.”
“25개 정도면 바로 승낙할 것도 같은데 조정해서 한번 얘기해 볼까요?”
“안 돼~”
“네. 다시 얘기하겠습니다.”
인물 섭외 역시 지난했지만 성공했을 때의 쾌감은 특히 짜릿했다. 레스토랑과 셰프 섭외는 비교적 수월했다. 장소와 인물이 푸드 전문지에 소개된다는 이점이 있었으니까. 셀러브리티가 자신의 단골집에 방문하는 형태로 식당을 소개하는 ‘페이보릿 테이블’ 칼럼 섭외가 고역이었다. 유명 패션지라면 그 자체로 영향력이 크다. 더욱이 영화 개봉이나 드라마 방영 시기가 맞물린다면 매체와 인물이 원하는 지점이 일치할 때도 많았지만 푸드 전문지는 아니었다. ‘페이보릿 테이블’은 스튜디오에서 진행하는 촬영도 아니었고, 패션 스타일링이나 헤어 메이크업을 제공할 수도 없었다. 음식을 좋아하거나, 음식으로 부업을 하거나, 어찌 됐든 음식과 관련 있는 사람을 찾아 ‘악바리’처럼 공략하는 방법뿐이었다. 그래도 부단히 노력한 끝에 매달 실패 없이 섭외에 성공할 수 있었다.
게임을 좋아하는 털털한 여동생 이미지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기상캐스터 김민아 섭외가 첫 번째 성공이었다. 당시 김민아는 소속사가 없었던 탓에 무작정 인스타그램 DM으로 연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남북엇국’이 단골집이라기에 사장님께 사정한 끝에 간신히 브레이크 타임을 이용해 촬영을 진행했다. 다음 달엔 해방촌에 ‘린자면옥’이라는 국숫집을 오픈한 가수 정엽을 섭외하고 싶어 일주일 넘게 매일 가게로 전화했다. 긍정적이긴 했지만 확답을 주지 않아 린자면옥에 ‘쳐들어’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사무실을 나오는데 마침내 승낙 연락을 받았다. 그 다음 달엔 <최자로드>의 새로운 시즌 방영을 앞둔 ‘먹잘알’ 다이나믹 듀오의 최자를, 또 그 다음 달엔 개그맨 유세윤을 섭외하려다 거절당하고 역으로 소개받은 배우 송진우 섭외에 성공했다.
마감 업무와는 별개인 사이드 프로젝트도 도맡았다. 식품 플랫폼 ‘글라이드’ 론칭 업무에는 입사와 동시에 투입됐다. 글라이드는 닭고기 유통으로 국내 시장을 장악한 하림그룹이 ‘펫 푸드’에 이어 새롭게 공략하려던 가정간편식HMR 기반의 신사업이었다. 당시 하림그룹은 유통기업에서 생산기업으로의 전환을 꿈꿨다. 농심, CJ, 오뚜기 등과 경쟁할 제품군을 기획하고 전북 익산에 생산 설비를 갖추던 참이었다. 직접 생산한 제품은 오프라인 마트와 ‘컬리’를 위시한 모바일 플랫폼 글라이드라는 투트랙 전략으로 유통할 계획이었다. <올리브> 매거진은 글라이드 브랜드의 론칭 과정을 포함해, 100여 가지 초기 판매 상품의 상세 페이지와 각종 영상과 이미지 등 비주얼을 제작까지 모두 담당했다. 그 일의 PM 역할이 내게 주어졌다.
처음엔 의아했다. 내 위로 서령 선배도 있는데 편집장님은 왜 나한테 일을 줬을까. 브랜드와의 민감한 소통은 편집장님이 담당했지만 PM으로서 챙겨야 할 세부적인 사항이 한둘이 아니었다. 매주 문인영 실장님 스튜디오에 방문해 비주얼을 제작하고, 매주 글라이드 사업부가 위치한 판교 NS 홈쇼핑에 방문해 회의에 참여하는 일도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다. 다만 시간이 지나며 생각이 바뀌었다. 시대가 변했는데 지면 콘텐츠만 계속 만들어서는 승산이 없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거진 에디터로 IT 기반의 모바일 플랫폼 콘텐츠까지 제작해 봤다는 건 충분한 무기가 될 수 있겠다는 판단도 들었다. 나로서는 더없이 좋은 기회를 잡은 셈이었다.
영국 테이블웨더 브랜드인 ‘덴비’와 <올리브> 매거진이 협업한 오프라인 캠페인도 내 담당이었다. ‘플레이스 바이 덴비’ 캠페인은 서울의 주요 레스토랑과 협업을 맺고 2주간 스탬프 미식 투어 콘셉트 형태로 진행됐다. 캠페인 기간 동안 협업을 맺은 14곳의 레스토랑에 방문하면 매장별 메인 메뉴를 덴비의 테이블웨어 제품과 함께 즐길 수 있었다. 캠페인에 참여할 대표 레스토랑 다섯 곳을 섭외하는 일부터, 레스토랑에 제공할 덴비 테이블웨어를 셰프님들과 협의하는 과정 모두를 솔비와 지현이를 이끌고 진행했다. 캠페인 메인 비주얼을 기획하고 레스토랑을 돌며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홍보에 사용할 영상을 제작하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두 달간 평창동에서 삼청동과 서대문과 장충동과 청담동을 수시로 오갔다. 캠페인 시작 직전까지 이태리재, 파스토, 카페 바이 농축원, 독립밀방, 만가타 셰프님들을 말 그대로 지겹도록 만나며 진행 상황을 조율했다. 물론 캠페인이 종료되는 시점에 <올리브> 매거진에 실을 기사도 작성해야 했다. 캠페인 홍보용 아크릴 테이블 메뉴판과 황동으로 제작한 명패를 마지막으로 레스토랑 다섯 곳에 전달하며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메인 담당자로서 오프라인 캠페인을 오롯이 이끌어 본 업무 역시 지면 콘텐츠만 제작했다면 갖지 못할 소중한 자산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팀만 그랬지만) 업무 중 지출하는 비용을 꼭 현금으로 써야 했던 것만 제외하면 <올리브> 매거진의 모든 업무가 만족스러웠다. 매달 2~30만 원씩 현금을 뽑아두고 사용하는 모양새가 조금 웃기긴 했어도 사람이 주는 스트레스와 팀 내부의 갈등이 없었다. 업무에만 즐겁게 집중할 수 있었다. 한 권의 잡지를 만드는 것 이상의 역량도 키울 수 있었다. 대행 업무로서 클라이언트 매거진을 만들며 만났던 즐거움과는 또 다른 결의 즐거움이 매달 펼쳐졌다. 단, 모든 건 평창동 사옥이 가로수길로 이전하기 전까지만 해당되는 얘기였다. 편집장님 말만 곧이곧대로 믿었던 탓일지도 모른다. 나도, 서령 선배도, 솔비도, 지현이도 앞으로 마주하게 될 혼돈의 징조를 눈치채지 못했다.
어찌 보면 4월 호 마감을 마치고 기석 선배가 퇴사한 일이 발단이었다. 기석 선배는 안그라픽스 매거진 사업부 김 대표님의 아들이다. 김 대표님도 아들의 퇴사와 비슷한 시기에 자리에서 내려왔다. 안상수 선생님과 안그라픽스라는 회사를 함께 만들고 매거진 사업부를 담당해 왔는데,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사회에서 해임됐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남의 일인 것 같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개인적으로 대표님과 대화를 해본 적도 몇 번 없었다. 동해와 서해를 산책시키던 때를 제외하면 대표님과 마주칠 일 자체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편집장님 역시 대표님이 자리에서 내려왔다는 사실이 매체에 별다른 영향을 주진 않을 거라며 에디터들을 안심시켰다.
<올리브> 매거진 편집팀과 가건물을 함께 사용했던 위층의 <론리플래닛> 팀 전원이 퇴사한다는 소식이 들리며 평창동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돌았다. 폐간 이야기까지 나오자 모두가 심적으로 뒤숭숭했다. <론리플래닛> 사람들과 친분은 없었지만 오며 가며 매일 인사를 나눴던 터라 괜히 안타까웠다. 당사자가 아니라서 벌어진 일들의 속내를 정확히 알 순 없었지만, 온전히 자발적인 퇴사가 아니라는 후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유사한 상황에 놓였을 때의 심정을 앞서 경험해 본 터였다. <론리플래닛> 사람들을 마주칠 때마다 ‘나도 그 마음을 이해하고 있다’는 시그널을 눈빛에 담아 소심한 위로를 전했다.
“배 총괄 그 여자가 지시한 걸 <론리플래닛>에서 못 하겠다고 했나 봐.”
“아… 네…”
“<올리브>에도 요구한 게 있었는데 내가 잘 넘겼어. 우린 걱정 안 해도 돼(웃음).”
“아… 네…”
“덴비는 이제 다 끝나가지?”
“아크릴 메뉴판이랑 인쇄물만 사무실에 도착하는 대로 레스토랑에 퀵으로 전달하면 됩니다.”
“응응. 고생 많아. 마무리 잘해줘~”
배 총괄이 업무적으로 무리한 지시를 내렸고, <론리플래닛> 편집장님이 지시에 따르지 않았고, 그 결과에 따라 경질이 결정됐고, 편집장이 나가면 에디터들도 함께 그만둔다고 했고, 결국 폐간 이야기까지 나오게 됐다는 게 편집장님께 전해 들은 이야기의 골자였다. 편집장님은 신 부사장님을 포함해 누군가와 회사와 관련된 대화를 나누고 오면 꼭 나를 불러 어떤 얘기를 나눴는지 전했다. 알고 싶지는 않았다. 전해 듣는 이야기로 내 머릿속엔 사실 관계를 확인할 수도 없는 온갖 불필요한 정보가 혼재되어 입력됐다. 게다가 전달받는 내용의 80~90%는 배 총괄에 대한 이야기였다.
입사할 때는 몰랐지만 안그라픽스는 파주와 평창동 외에 논현동에도 ‘안그라픽스 강남집’이라는 사옥을 가지고 있었다. 평창동과 마찬가지로 사옥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애매할 수도 있지만, 가수 이효리가 남편인 이상순과 제주도로 내려가기 전따지 살았던 단독주택을 구입한 뒤 사무실로 개조한 공간이었다. 강남집은 신세계 백화점 매거진 팀이 단독으로 사용했다. 강남집의 배 총괄은 ‘신세계 매거진’의 편집장이자 김 대표님이 물러나던 시기를 전후해 안그라픽스의 모든 매체를 총괄하게 된 인물이었다. 여기까지가 알고 있는 사실의 전부였다. 배 총괄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에디터들에게 지속적으로 전달하는 편집장님의 의중을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원래는 패션 디렉터였는데 신세계 매거진 편집장 역할을 하던 고 이사를 몰아내고 자리를 꿰찼다느니, <론리플래닛>에 이어 아시아나 매거진 편집장님도 찍혔다느니, 김 대표님을 몰아낸 것도 배 총괄의 계략이었다느니, 안그라픽스의 새로운 대표를 꼬드겼다느니 하는 식이었다. 그렇지만 <올리브> 매거진 편집팀 그 누구도 배 총괄이 실제로는 어떤 사람인지 몰랐다. 얼굴도 한 번 본 적이 없었다. 편집장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조지 오웰이 쓴 ≪1984≫ ‘빅 브라더’의 모습만 떠올랐다. 그만큼 외진 평창동에서 단방향 통신으로 전해 듣는 이야기의 위력은 무시무시했다.
5월 말이었다. 마침내 배 총괄과 대면할 기회가 생겼다. 편집팀과 디자인팀 모두가 ‘강남집’에 방문 가능한 일정을 알려 달라는 메일을 받았다. 새로운 사무실 위치가 가로수길로 확정됐고 이사를 앞둔 시점에서 모든 에디터의 고용계약서를 직접 만나 다시 작성한다는 이유였다. 메일에는 연봉계약서도 서명해야 해 한 명씩 방문하는 미팅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편집장님은 배 총괄이 의도를 가지고 <올리브> 매거진 팀을 한 번에 부르지 않는 거라고 말했다. <론리플래닛>처럼 단합해 한꺼번에 모두 그만둘 지도 모를까 봐 따로 부르는 거라고 덧붙였다. 배 총괄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미팅을 마치고 나오면 꼭 연락 달라고도 신신당부했다. 오전부터 ‘글라이드’ 촬영이 잡혀 있던 터라 나는 17시에 방문한다고 메일에 회신했다.
“편집장님, 지금 막 강남집에서 미팅 마치고 나왔습니다.”
“얘기 잘했어?”
“아직 1년이 안 돼서 연봉 조정은 없었고요. 150만 원 한도로 개인별 법인 카드를 만들어 준다고 합니다. 교통비로 쓸 수 있는 건 20만 원이고요.”
“다른 얘기는 없었고?”
“고생이 많다, 뭐 그 정도? 매달 ‘페이보릿 테이블’에 연예인을 어떻게 섭외했냐면서 대단하다고 칭찬한 게 전부였습니다.”
“배 총괄이랑만 얘기했어?”
“처음에 배 총괄이 평 주간이랑 들어와서 같이 얘기 나눴고, 얘기 끝난 다음에 과장인가 차장인가 밑에 사람이 계약서 가져오길래 서명했습니다.”
“음… 그래?”
“회사 얘기 같은 건 따로 안 하던데요?”
“다른 아이들은?”
“솔비는 오전에 다녀간 거로 알고 있고, 제 뒤로 지현이가 들어갔습니다.”
“그래~ 고생했어. 지현이한테도 한번 물어봐야겠다.”
배 총괄의 이미지는 그간 상상했던 것보다는 나쁘지 않았다. 파마한 단발머리에 휘감은 명품이 더해져 실제보다 나이는 좀 더 들어 보였다. 톰 브라운 갤럭시 Z 플립을 사용하는 모습에서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이라기보다 사업하는 사람에 좀 더 가까운 뉘앙스가 풍겨 나왔다. 그게 전부였다. 말투나 단어 선택에도 딱히 거슬리는 부분은 없었다. 편집장님과 만났을 때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는 모른다. 경계하는 듯했어도 적어도 내 앞에선 적대감을 느끼게 할 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근거는 없었지만 막연히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은 남았다. 그때까진 자각하지 못한 채 편집장님을 좀 더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믿음 자체가 어떤 믿음인지도 모른 채로 말이다.
낮에는 반팔을 입어야 할 시기가 찾아오며 평창동을 떠날 준비로 분주해졌다. <올리브> 매거진과 아시아나 매거진 팀이 먼저 이사하고 신 부사장님이 이끌던 기업 홍보물 제작팀은 추후 이사할 예정이었다. <올리브> 매거진 편집팀 사무실에는 유독 짐이 많았다. 정리할 게 많은 탓에 짐을 싸면서 왠지 모를 기시감도 들었다. 이사하는 당일엔 모두가 일찍 출근해 도와야 한다는 얘길 편집장님이 전달해 주지 않아 디자인팀 경에게 짜증 섞인 전화를 받아야 했다. 부랴부랴 출근할 땐 잠시 화가 나기도 했지만 다 같이 복작복작하는 건 즐거웠다. 개인 짐은 솔비 차와 내 차에 나눠 실었다. 이제는 벗어나고 싶기도 했던 신사동 가로수길로 다시 향했다.
불과 4개월 남짓 근무한 공간이었지만 한적한 평창동 단독 주택가에서 보낸 시간은 제법 훌륭했다. 여름이 아닌데도 사무실 입구에 늘 쳐 두어야 했던 모기장도, 일하면서 과자를 먹고 있으면 귀신같이 달려와서 침을 흘리던 동해와 서해도, 점심을 사 먹기 힘들어 챙겨다녔던 도시락과 번거롭지만 편집장님과 함께 만들어 먹던 떡볶이도, 퇴근 후 찾을 수 있는 평창동의 거의 유일한 술집이던 ‘절벽’도 이젠 안녕이었다. 가로수길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일말도 예상하지 못한 채, 평창동을 떠나며 다 같이 감상에 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