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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디 Dec 20. 2020

9. 로컬 버스로 레를 올라가는 방법

101일간의 좌충우돌 인도 네팔 여행기

레는 여름에 인도를 여행하는 이들의 로망이었다. 레는 베스트셀러 ‘오래된 미래’의 배경으로 유명해진 곳이자 영화 ‘세 얼간이’에 나온 신비로운 호수 판공초가 있는 곳이다.


인도 최북단, 고산 지역에 위치한 레는 7~8월, 즉 여름에만 육로로 가는 길이 열렸는데 9월 중순까지 레로 가는 길이 열려 있다는 소식을 접한 나는 지금 아니면 레를 가보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주는 나와 동갑내기로 호주 워킹 홀리데이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인도를 여행하러 왔다고 했다. 그는 한 장의 종이를 들고 버스 스탠드를 찾아 헤맸다. 자기가 로컬 버스를 타고 가는 방법을 다 알아왔다며 득의양양했다. 킬킬거리는 웃음이 그닥 믿음직스럽지는 못했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이 정감이 갔다.



숙소에서 나오는데 약간 늦장을 부렸더니 버스 스탠드에 막 도착했을 때는 방금 버스가 출발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절망한 우리는 오늘 이대로 공치는 건가 실의에 빠진 것도 잠시, 운이 좋게도 바로 출발하는 다음 버스를 발견해 오래 기다리지 않고 버스에 탑승했다.


버스의 문이 열리자마자 현지인들은 재빨리 자리 차지하기 신공을 발휘했고 그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던 우리는 정신을 차려 버스의 남은 마지막 한 자리를 채웠다. 그 좌석은 두 명이 앉기는 살짝 여유롭고 세 명이 앉기에는 비좁은 크기의 좌석이었는데 먼저 앉은 인도인 할아버지가 우리가 함께 앉을 수 있도록 공간을 더 내어주셨다. 산뜻한 출발이었다.



어느새 비좁은 로컬 버스는 시커먼 얼굴의 현지인들로 가득찼다. 아마 여행자 하나 없는 이 버스를 혼자 타고 갔더라면 온종일 겁에 질린 상태로 가슴을 졸이며 타 있었겠지. 그런 나 자신을 상상하며 처음으로 동행이 주는 안도감에 행복감을 느꼈다.


버스가 출발하고 몇 분 뒤 한 남자가 사람들에게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는 인당 170루피 씩 걷고 있었고 양손에 지폐를 잔뜩 쥐고 있으면서도 균형감각을 잘 유지하며 거스름돈을 건네주었다.


'아 저 사람이 차장이구나!'



우리에게 설마 외국인 요금을 받는 거 아니겠지하는 걱정이 스쳐갔지만 그는 똑같이 170루피를 걷어갔다. 투어리스트 버스는 2,500루피는 줘야하는데 로컬 버스는 단돈 170루피라니! 가난한 배낭여행자에게 이보다 너무 큰 행복은 없었다.


그는 요금을 다 걷고는 자기 자리라는 듯 아무렇지 않게 하차문과 연결된 기둥에 걸터 앉았다. 우리나라의 70~80년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인도에는 아직 저런 사람이 있다니, 그를 보는 것만으로 내가 모르는 과거를 경험한 것 같은 기분에 흐뭇했다.



버스는 차근차근 구불거리는 산길을 올랐다. 올라갈수록 높게만 보였던 푸른 산들이 눈높이를 같이 하는게 느껴졌다. 푸른 녹음이 마날리 전체를 채우고 있는게 보였다. 상쾌했다. 왜 마날리를 인도의 스위스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레와 마날리는 인도가 아닌 인도라던데 진짜였다.


당연히 로컬 버스가 모든 게 좋은 건 아니었다. 더럽고 낡은 내부, 푹신한 쿠션이 아닌 딱딱한 철제 받침 의자에 인도인들과 부대껴 앉느냐 진땀을 뺐지만 이마저도 풍경의 일부로 녹아들었다. 차근차근 달리는 로컬버스의 속도, 목줄을 멘 염소와 함께 탄 아저씨 등은 내가 상상한 로컬의 느낌을 충분히 만족시켜줬다.


올라갈수록 녹음이 조금씩 벗겨지는 산들을 보며 새로운 세계로의 이동을 실감하게 했다. 버스는 중간 중간 사람이 살기는 할까 싶은 정류장인지도 모를 산한복판에 정차했고, 심지어 그곳에 온갖 짐을 가지고 내리는 아저씨, 짐을 받으며 누군가를 기다리며 마중 나와 있는 또 다른 이, 그리고 때때로 서프라이즈 선물처럼 양과 염소 떼와 이들을 이끄는 목동이 무심히 지나갔다.


그것들은 모두 내가 살아온 세계에서는 목격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오후 세시 쯤 킬롱이라는 곳에 버스가 멈췄다.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이곳에서 내렸다. 여기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오전 5시에 다시 출발한다고 했다.


킬롱은 숙소와 식당도 다섯 손가락에 꼽고 인터넷도 터지지 않는 작고 열악한 마을이었다. 그 마을에서 제일 좋아보이는 식당엘 들어갔지만 시키는 요리마다 불가능하다고 빠꾸를 먹었고 우리는 결국 주문이 가능한 메뉴를 물어 피자와 콜라를 먹었다. 다행히 이 식당에서 와이파이 연결이 되어서 다음날 떠나기 직전에 부모님께 안부를 전할 수 있었다.


'누가 레 가는 게 힘들대? 나 정말 여행자 체질인가봐.'


휴게소에 정차한 것을 빼곤 6시간을 내리 달렸지만 힘들기는 커녕 새로운 풍경과 정겨운 사람들의 모습에 힘이 샘솟았다. 내일은 정말 레에 도착하는 건가? 다음날의 여정에 대한 기대가 부풀어올랐다.



새벽 5시 킬롱에서 레로 가는 버스를 탔다. 어제의 경험으로 의기양양해진 나는 한껏 들떠 있었다. 오늘은 어떤 풍경을 마주하게 될까. 생각보다 나는 여행을 잘 하는 여행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해발고도가 높아지기 시작하면서 고산증을 거의 겪지 않는 나도 점점 힘이 들었다. 속이 울렁거려 입에 아무 대지 못했고 관자놀이도 점점 조여왔다. 


비포장도로의 승차감은 정말이지 이건 승차감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엉덩이가 튕겨졌다 안착했다를 반복했다. 내가 지금 버스를 타고 있는 것인지 디스코팡팡을 타고 있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중국 쓰촨성, 동티벳 등 해발고도 4~5천에 이르는 곳을 다 여행을 해보았지만 레는 내 인생 최악의 이동 구간이었다.


게다가 도로 옆은 어떤가! 한 길 낭떠러지였다. 아 낭떠러지 옆을 달리는 기분은 이런 기분이구나. 맞은 편에 차가 오면 어떡하지? 부딪힐 거 같은 좁고 높은 도로 위를 버스는 줄곧 아무렇지 않게 달렸다. 그리고 낭떠러지 아래에는 아주 가끔 폭삭 망가진 차의 형태가 일그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남일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인도에서 사고란 흔했고 설사 일어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위태로워 보였으니까.



나중에 레에서 만난 요셉 오빠는 로컬 버스 안전론을 설파했다. 그 이유는 로컬 버스 기사들은 몇 십 년간 매일

같이 그 험한 구간을 왕복하기 때문에 오히려 운전 베테랑들이라는 것이다. 반면 시즌 때만 확 당겨서 돈을 버는 지프가 가장 위험하다고 했다. 게다가 단시간에 가기 위해서 지프 운전사는 밤새 달리기 때문에 더더욱. 실제로 절벽 아래로 떨어진 차량의 사체들이 지프가 많은 것 같아보이긴 했다. 투어리스트 버스보다 세 배나 저렴하면서 안전한 로컬 버스를 타지 못한 것을 그는 두고 두고 후회했다.


킬롱에서 16시간을 거쳐 레에 도착했다. 정말 다시 하라고 하면 절대 하지 못할 경험. 그래도 막상 레에 도착하니 마치 무언가를 해낸 것 같은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레에 도착하자마자 승주와 나는 한국인들이 많이 머문다는 숙소 올뷰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고 늦은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놀랍게도 이 척박한 오지 레에도 한식당이 있었다. 델리에서 한식이 마지막일까 싶어 엄청 먹고 왔는데…



뜨끈한 국물로 지친 속을 달래기 위해 미역국을 주문했다. 잘 들어가진 않았지만 그래도 한식으로 입맛을 다시 돋꿀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인도는 정말 한국인이 여행하기 좋은 나라였다. 배를 채우고 숙소에 돌아오니 그제서야 레에 왔다는 안도감이 다시 들었다. 


신이시여 레에 무사히 도착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나마스떼.



* 정보 (2017년 기준)


<로컬버스>

출발 : 마날리 바자르 앞 버스 스탠드

마날리-킬롱(6시간) 170루피 / 오전 9시 쯤 출발

킬롱-레(15시간) 540루피 / 오전 5시 출발


<투어리스트 버스>

마날리-레 2,500루피(숙박비 별도)

킬롱에서 똑같이 숙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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