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라고 못할 게 뭐 있어
집 근처에 폴댄스 학원이 생겼다.
운동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던 어느 날, 애인이 집 근처에 폴댄스 학원이 생겼다고 말했다. 들어온 매장도 별로 없는 신도시에 폴댄스 학원이라니. 믿어지지 않았지만 찾아보니 정말이었다. 산책할 때마다 그 건물 앞을 지나쳤는데, 7층 유리 너머로 폴대가 보이곤 했다.
폴댄스는 7년 전, 대학생 시절에 6개월 정도 다녀본 경험이 있었다. 정적이거나 느끼기에 힘들기만 하면 꾸준히 못 하는 성격인데, 폴댄스는 자진해서 6개월이나 다녔다. 나날이 늘어가는 게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성취감이 엄청났다. 공부 이외에 성취감을 느낀 게 오랜만이라 정말 재미있게 다녔다. 근력도 많이 늘어서 내 몸 들어 올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교환학생 준비를 하느라 어쩔 수 없이 그만두게 되었다. 그때의 미련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백수 신분.
'백수 주제에 무슨 폴댄스야... 수강료도 비쌀 텐데, 그냥 집에서 운동하고 나중에 돈 벌면 그때 다니자.'
불이 켜져 있는 폴 학원을 볼 때마다 애써 스스로를 달랬다. 물론 집에서 운동이라고는 숨 쉬기 운동 정도가 다였다. 매일 애인과 천천히 산책하는 게 내 운동의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씻고 나와 거울을 봤는데, 배 둘레에 한가득 크림빵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날이 추워지니 원래도 약했던 허리가 비명을 질렀다. 이러다가 체력과 건강을 다 잃겠구나 싶었다.
발레를 알아봤다. 도보로 30분 거리인 데다 버스도 없어서 탈락. 가까워도 재미없으면 안 가는 게 운동인데, 한 달 정도 했다가 유연성에 대한 회의감이 들고 아프기만 해서 재미없었던 기억까지 있다.
집 근처에는 필라테스와 헬스가 많았다. 둘 다 해봤지만 재미없어서 지속하지 못했던 경험이 있기에 찾다가 그만뒀다. 끊어놔도 안 갈 것 같았다.
결국 돌고 돌아 답은 폴댄스였다.
수강료를 감당하고 건강과 활력을 찾을 것이냐, 그냥 집에서 칩거하며 돈을 아낄 것이냐. 아무리 생각해도 집에만 있으면 절대 운동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운동 가기 위해 억지로라도 집 밖에 나오면 겨울마다 찾아오는 무기력증이 좀 낫지 않을까? 돈을 좀 내더라도 삶에 대한 활력도 얻고, 생산성도 올라가고 완전 이득 아닌가?
합리화가 끝나자마자 결론이 났다. 이건 다녀야 한다.
문의 연락을 보낸 당일 저녁으로 체험 수업을 예약했다. 펑퍼짐한 추리닝과 티셔츠 속에 짧은 러닝용 반바지와 반팔티를 챙겨 입고 패딩을 껴입은 뒤 폴댄스 학원으로 향했다.
이전에 다녔던 폴댄스 학원은 완전 구축 건물 지하에 있었는데, 새로 생긴 폴댄스 학원은 반짝반짝 깨끗한 신축 건물 7층에 있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백수 생활이 길어지다 보니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이 정말 오랜만이라 긴장감이 올라왔다.
학원에 들어가자마자 강사님이 환하게 웃으면서 맞이해 주셨다.
"안녕하세요~ 요기 탈의실에서 옷 갈아입고 나오시면 돼요^^"
뚝딱거리며 옷을 갈아입고 나왔더니 바로 수업이 시작됐다. 일단 부상을 방지하기 위한 워밍업 운동 시간. 미리 깔아둔 매트 위에서 밴드로 팔과 어깨 운동을 하고, 전신을 쫙쫙 늘리는 스트레칭을 하는데 나의 뻣뻣함에 속으로 탄식했다.
'이래서 폴댄스 할 수 있나…?'
오랜만의 운동에 놀란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후반으로 갈수록 근력 운동이 되어 갔는데, 이미 평소 하는 운동량을 한참 넘어서서 근육이 버티질 못했다. 플랭크를 하다가 매트 위에 엎어져 버렸다. 선생님은 조금 쉬었다가 하면 된다며 나를 토닥여 주었다.
엎드려 다리를 들어 올리는 동작에서 내 다리 한 짝이 얼마나 무거운지 실감해야 했다. 스스로의 게으름에 대한 원망이 들었으나 이미 벌어진 일. 소용없었다.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었기 때문에 묵묵히 마지막까지 동작을 따라했다.
20시간 같았던 20분의 기초 운동이 끝났다.
양손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그립제를 바르고, 본격적인 폴 운동에 들어갔다. 강사님한테 6개월 정도 배운 적이 있다고 얘기해 뒀는데, '하나도 기억 안 나고 매달리는 것조차 못 하면 어쩌지?' 약간 후회가 되었다.
그런데 몸이 생각보다 기초 동작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손으로 잡고 폴에 매달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진도가 쭉쭉 나갔다. 다만 손만으로 나의 몸뚱아리를 지탱해야 하니 손바닥에 불이 나는 기분이 들었다.
7년 만에 하는 거라 전처럼 쉽게 되지는 않았다. 후들후들거리며 하나씩 동작을 완성해 나갔다. 한 번 동작을 하고 내려올 때마다 근육의 효율이 점점 줄어드는 느낌이 들었다. 저질 몸뚱아리에서 어디까지 할 수 있나 시험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지막에 영상 찍는 시간까지 있어서 쉬었다가 있는 힘 없는 힘 다 짜내 동작을 완성했다. 못할 것 같았던 동작들을 해냈다는 성취감이 엄청났다. 역시 폴댄스를 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어 수강 신청을 하기로 결심했다.
온몸의 힘이 다 빠진 채 후들거리며 옷을 껴입었다. 그리고 탈의실에서 나와 두 달 치를 결제했다.
집에 오는 길, 학원에서 미처 확인하지 못한 영상을 봤다. 뿌듯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내내 영상을 보고 또 봤다.
다음 날, 갑작스런 운동에 온몸이 놀랐는지 전신에 근육통이 왔다. 허리도 괜히 더 아파진 것 같고, 팔, 옆구리, 등, 다리 안 아픈 곳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음 수업이 기다려졌다. 이 작은 시작이 겨울을 버틸 힘이 되어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