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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오리 Jan 27. 2020

책으로 부터 시작된,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서평 <건지감자껍질파이 북클럽> 메리 앤 섀퍼,애니 배로스/신선해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채널제도에 위치한 건지 섬은 세계 제 2차대전시기 독일 군에게 점령된 유일한 영국 영토다. 나치에 의해 영국 점령을 위한 교두보로 사용된 이 섬은 5년이라는 기간 동안 독일의 수탈을 견뎌내야했다. 1980년 미국 작가 메리 앤 섀퍼는 건지 섬의 공항 서점에서 바로 이 독일군 점령기에 관한 책들을 발견한다. ‘누군가가 출판하고 싶어하는 책’을 쓰고 싶었던 그녀는 20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이덴슬리벨, 2010)을 집필하기 시작하지만 완성의 목전에서 그만 병을 얻는다. 조카인 동화작가 애니 배로스가 마무리를 맡아 탄생된 이 작품은 전 세계 30여국에서 베스트셀러로 사랑받게 된다.


1946년 전쟁이 끝난 후 후유증으로 피폐해진 영국은 전쟁의 상처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충만해있다. <이지 비커스태프, 전장에 가다>라는 책으로 인기를 누리던 ‘줄리엣 애슈턴’은 다음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구상하던 중 건지 섬의 ‘도시 애덤스’에게서 편지 한통을 받는다. 한때 줄리엣의 소유였던 책을 손에 넣은 도시는 책에 쓰여진 그녀의 주소를 보고 런던에 있는 서점의 이름과 주소를 부탁하기 위해서 생면부지의 줄리엣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다. 책을 계기로 시작 된 이들의 편지 왕래는 횟수를 더해가며 서로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책과 상관없는 희한한 이름의 북클럽은 전쟁의 상흔에서 비롯되었다. 모든 물자를 수탈해 간 독일 군을 피해 돼지고기 파티를 연 건지 섬의 사람들은 멤버 중 하나인 ‘엘리자베스’의 기지로 위기를 모면한다. 검문검색을 피하기 위해 임기응변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북클럽은 클럽 멤버들에게 공동체의 온기를 느끼게 해 주고 엄혹한 현실 앞에서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던 책은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매개가 된다. ‘아마도 책들은 저마다 일종의 은밀한 귀소본능이 있어서 자기한테 어울리는 독자를 찾아가는 모양이에요.’(p.20) 도시의 주머니에 있던 <엘리아 수필집>은 독일군 ‘크리스티안’과 우정을 나누게 된 계기가 되었고 귀족의 시종으로 건지 섬에 남은 ‘존 부커’는 <세네카 서간집>과 문학회 모임으로 점령기 시절을 견딜 힘을 얻는다. 타인에 대한 사랑을 몸소 실천했던 엘리자베스와 그녀가 만든 건지 감자껍질 파이 북클럽은 전쟁 속에서도 포기할 수 없었던 인간성의 상징이다.


이 책의 특별한 점은 이야기의 진행이 편지글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줄리엣과 출판사 대표 시드니, 건지 섬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편지들은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고색창연하게 느껴지는 동시에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손으로 직접 쓴 편지가 오가던 시대라니, 너무나 멀게 느껴질 수 있겠다. 하지만 그래서 전해지는 따뜻함과 인간적인 향기기 있다. 마치 실제 인물이 쓴 듯 편지를 쓴 사람의 숨소리마저 느껴진다. 이 책이 발표된 것은 2008년이지만 1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랑받고 있다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2018년 헐리웃이 동명의 영화를 만든 것은 식지 않는 인기의 증거다. 현재 넷플릭스에서 방영중인 이 영화는 주인공 남녀의 사랑 이야기에 좀 더 초점이 맞춰져 있고, 그만큼 책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생략 된 점은 아쉽다.


책을 사랑했던 작가는 평생 도서관과 서점에서 일했고 글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환갑이 훌쩍 넘어서야 생애 최초로 이 책을 집필한 메리 앤 섀퍼는 안타깝게도 작품이 세상에 나오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책에 대한 사랑과 작가로서의 고민, 공동체 안에서 북클럽의 역할 등등 책에 대한 지은이의 다양한 생각을 접할 수 있다. 이야기의 큰 틀은 도시와 줄리엣의 러브스토리라고 볼 수 있겠지만 책이 어떻게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인간성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고 사람들을 이어주는지도 보여준다. ‘책 속의 작은 것 하나가 관심을 끌고, 그 작은 것이 다른 책으로 이어지고, 거기서 발견한 또 하나의 단편으로 다시 새로운 책을 찾는 거죠…….여기엔 가시적인 한계도 없고, 순수한 즐거움 외에는 다른 목적도 없어요.’(p.22) 독서의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한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극중 ‘이솔라’가 <폭풍의 언덕>을 볼 때 느낀 것처럼 ‘멱살이 잡힌 것처럼 빠져나오기 힘든’맛을 볼 수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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