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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오리 Jan 29. 2020

소설과 영화의 눈부신 콜라보레이션

서평 <세월> 마이클 커닝햄 (비채 ,2019)/<디아워스>(2002)

‘훌륭한 책을 읽는 경험은 첫 키스와 같다.’ 마이클 커닝햄의 <세월>(비채, 2012) 첫머리는 그의 독서경험에 대한 고백에서 출발한다. 작가가 열다섯 살 고등학교 시절에 읽은 <댈러웨이 부인>은 ‘어떤 책보다 농밀하고 내밀하게 다가’왔고 소설을 쓰게 된 계기가 되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을 모티브로 1998년에 발표된 <세월>은 1999년 퓰리처상과 펜 포크너 상을 수상하고 2002년에는 스티븐 달드리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한다.


이야기는 세 인물에 의해 시공간을 넘나들며 진행된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하는 ‘버지니아 울프’와 그 책을 읽는 독자 ‘로라 브라운’, 그리고 옛 연인인 시인에게 ‘댈러웨이 부인’이라 불리는 ‘클라리사 본’이 주인공이다.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지만 세 여자의 하루는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다. 1923년, 신경쇠약과 악화된 건강으로 영국 리치몬드에서 요양하는 버지니아는 남편 ‘레너드’의 보살핌을 받으며 소설을 집필한다. 그녀는 런던의 활력을 그리워하지만 건강을 걱정하는 레너드 탓에 런던 행을 쉽게 결정하지 못한다. 1949년의 로라는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남편의 생일을 준비한다. 전쟁영웅인 남편은 로라를 아끼고 사랑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수행해야만 하는 일상에 잠식되어있다. 20세기 말의 클라리사는 성공한 편집자로서 옛 연인 ‘리처드’의 문학상 수상 축하를 위한 파티를 준비한다. 그녀는 열과 성을 다해 파티를 준비하지만 정작 주인공인 리처드는 크게 관심이 없다.


영화 <디 아워스> 또한 2003년 골든글로브 최우수상을 수상하는 등 원작에 못지 않은 성취를 이룬다. 배우들의 호연과 각색의 충실함은 글에서 놓칠수 있는 감정의 흐름을 붙잡아준다. 챕터마다 달라지는 인물의 시점과 시대적 배경은 독자로 하여금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영화의 적절한 편집과 연출은 관객으로 하여금 오롯이 감정이입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준다. 세 인물을 엮어내는 절묘한 편집은 각각의 시간을 살아가는 세 여자를 하나로 묶어 그들이 겪고 있는 삶에 대한 애증이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는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는 주요 요소다. 버지니아 울프를 연기한 니콜 키드먼과 브라운 부인의 줄리안 무어, 클라리사 본의 메릴 스트립은 원작의 인물들이 가졌던 삶의 무게와 고뇌를 체화해 마치 등장인물 그 자체로 보인다. 53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세 여우는 나란히 주연여우상을 받기도 한다.


스티븐 달드리 감독은 원작의 미묘한 부분까지도 놓치지 않고 스크린에 담았다. 글로서 표현되는 내면의 독백들을 표현하기 위한 각색은 피할 수 없는 고민이었을 것이다. 각본을 쓴 데이빗 헤어와 감독은 등장인물의 대화를 통해 그들이 가질 수밖에 없었던 갈등과 고뇌를 시각화하는 데 성공한다. 버지니아가 런던에 가기위해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와 기차역에서 뒤쫓아 온 남편과 만나는 장면은 그 좋은 예다. 원작에서 그녀의 내면은 런던을 향한 강렬한 소망으로 가득차 있다. ‘바로 이 순간, 세상에는 끓인 쇠고기 요리와도, 장미 화관과도 전혀 관계없는 어떤 장소가 존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녀는 정원의 문을 지나서 좁은 골목을 빠져나와 도심으로 향한다.’(p.230) 영화에서는 기차역에서 버지니아와 레너드의 대화를 통해 그녀의 절박함 심정을 나타낸다. “리치몬드와 죽음 중에 하나를 택하라면 죽음을 택하겠어요.”


제목인 ‘The Hours’는 2012년판에서 <세월>로 번역되었는데 여기에는 누적되고 중첩된, 쌓여 온 시간이라는 뉘앙스가 있다. 하지만 원작이나 영화를 보면 <The Hours>라는 원제는 종적, 수직적 의미보다는 횡적, 수평적인 어감에 더 가깝다. 시대가 달라도 세 여자가 갖는 삶의 딜레마는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온전한 자유를 갖기 원하며 리치몬드를 벗어나려하고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로라는 자신을 옥죄는 일상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고, 상대적으로 훨씬 자유롭고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클라리사마저 그 굴레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녀는 옛 연인인 리처드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의 주변을 맴돈다. 마치 평행우주에서 같은 인물의 다른 시간대를 보는 것 같은 데자부는 반복되는 삶의 모습을 마주치는 것 같다. 2018년 개정판을 내면서 제목이 <디 아워스>로 바뀐 것은 그런 이유이지 않을까.


버지니아 울프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데, 그녀의 소설 속 댈러웨이 부인은 파티의 중심에서 삶을 영유한다. 마이클 커닝햄의 등장인물들도 삶과 죽음사이의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고뇌하지만 ‘그녀 앞에는 또 다른 시간이 놓여있다’(p.307). 버지니아는 언니 바네사와, 로라는 친구 키티와, 클라리사는 동거인 샐리와 키스를 나누는 장면은 동성애적인 코드보다는 그들의 삶에 대한 연민과 갈망을 나타내는 듯 보인다.  ‘우리는 파티를 연다. 우리는 재능과 무제한의 노력과 사치스러운 희망에도 결코 이 세상을 바꿔놓지는 못할 책들을 쓰려고 안간힘을 쏟는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내고, 할 일들을 하고 잠자리에 든다.’(p.305) 작가는 삶을 살아내는 의지는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음을 세 주인공의 하루를 통해 보여준다. 여성이기 때문에 갖게 되는 미묘한 내면을 남성 작가와 감독이 섬세하게 표현한 점도 눈여겨보자.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하지 않은 채 집요하고 세심하게 감정의 미세한 떨림까지도 잡아내며 예술적인 성취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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