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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오리 Mar 17. 2021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밝힌 횃불

서평 <전태일평전> 조영래지음/아름다운 전태일,2020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재단사로 일하던 한 청년이 근로기준법 책을 부둥켜안은 채 몸에 불을 붙였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스스로를 불태운 전태일의 이야기는 1983년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돌베개 출판사에서 발행되었다. 이후 1991년, 2001년 두 번의 개정판(돌베개)을 거쳐 세 번째 개정판이 전태일 기념사업회를 통해 출간되었다. 2020년 전태일 50주기를 맞아 <전태일 평전>은 네 번째 개정판으로 다시 한 번 우리 곁에 돌아왔다.


저자 조영래(1947~1990)는 인권변호사로 사회개혁과 민주화운동에 큰 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중 전태일의 분신항거 사건을 접한다. 1971년 사법연수원에서 연수 중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되어 1년 6개월 투옥된 후 다시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6년 동안 수배 생활을 겪었다. <전태일 평전>은 그 수배기간동안 3년여에 걸쳐 집필한 역작이다. 1976년에 완성된 원고는 여러 해 동안 출판되지 못하고 필사본 또는 복사 본으로 전해지다가 저자의 이름을 숨긴 채 초판이 발간된다. 책은 그의 죽음 이후 1991년 개정판에서야 비로소 ‘조영래 지음’이라는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오게 된다. 전태일이 생전에 남긴 일기와 수필 등을 기초로 구성된 일대기와 그의 사상 등을 망라한 이 책은 출간 이후 한국 노동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하게 된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p.134) 


어려운 가정환경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던 전태일은 재단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1965년 15세 때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일자리를 얻는다. 미싱사를 거쳐 재단사가 되지만 배움에의 갈증과 노동현장의 부조리함은 전태일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른다. 피를 토하며 죽어나가는 여공들을 보며 충격을 받은 그는 평화시장의 근로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며 근로기준법을 구해 읽기 시작한다. 전태일은 노동청과 신문기자들에게 열악한 노동현실을 알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부와 권력의 결합체가 지배하는 전체 사회현실의 거대한 덩어리가 인간성을 파괴하는 야수적인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p.319)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결국 22세의 전태일은 무관심으로 얼어버린 세상의 마음들을 깨기 위해 온 몸에 석유를 끼얹은 채 불을 붙인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입장에 설 줄 알아야 하고 그 사람과 똑같이 되지는 못할지라도 그 사람과 비슷하게는 되어야 한다.’ (p.369) 평화시장 어린 노동자들의 참혹한 현실에 아파하고 분노하던 전태일의 마음은 조영래 변호사에게서도 볼 수 있다. 평화시장의 노동환경을 세밀하게 묘사한 대목은 저자의 타인에 대한 이해의 마음에서 비롯된다. ‘미싱사들의 경우 종일 허리를 꾸부리고 앉아서 행여 1밀리미터라도 착오가 생길세라 신경을 곤두세우고 눈의 초점을 재봉바늘 끝에 고정시킨 채로 손가락에 뻣뻣이 힘을 주어 옷감을 누르고 발로는 쉴 새 없이 재봉틀을 박는다... 어깨를 통하여 온몸으로 힘이 가고 입매까지 굳어져버린다’(p.114) 작가가 묘사하는 노동하는 일터의 현장감은 50년 전 실밥날리는 평화시장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망원동 수해사건’, ‘부천서 성고문 사건’, ‘여성조기정년제 철폐 소송’,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 에서 힘없는 서민과 여성, 인권의 사각지대를 위한 변론을 자처했던 조영래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의 설립을 제안하며 노동자와 민중의 인권을 위한 노력을 계속 이어갔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불 시대. 먹을 것이 없었던 전태일의 어린 시절에 비해 지금은 상대적으로 부유한 환경이 되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아직도 열악한 환경에서 인간적인 노동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도처에 있으며 간접고용과 비정규직, 위험의 외주화와 직장 내 갑질 등 타인을 수단화하는 사회현상은 지금도 우리 곁을 맴돈다. ‘약한 자도, 강한 자도, 가난한 자도, 부유한 자도, 귀한 자도, 천한 자도, 모든 구별이 없는 평등한 인간들의 ‘서로간의 사랑’이라는 참된 기쁨을 맛보며 살아가는 세상, ‘덩어리가 없기 때문에 부스러기가 존재할 수 없는’사회, ‘서로가 다 용해되어 있는 상태’(p.314)를 바랬던 전태일과 조영래의 염원은 현재진행형이다. 함께 하는 세상을 추구했던 이들의 사랑에 의해 노동환경은 조금이나마 변화했고 그만큼 지금의 우리는 그들에게 빚을 진 셈이다. 전태일이 가고 50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우리가 그의 평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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