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엄마오리 Jun 22. 2021

많은 순자씨들의 삶을 톺아보다.

서평 <연년세세> 황정은 연작소설 (창비, 2020)

<연년세세(年年歲歲)>(창비, 2020)는 황정은 작가의 연작소설집으로 교보문고에서 진행하는 ‘소설가 50인이 뽑은 2020 올해의 소설’에서 1위를 차지한 작품이다. 2년 연속 ‘소설가들의 소설가’라는 타이틀의 주인공이 된  황정은은 꾸준한 작품 발표로 한국 문단에서 중견의 위치에 올랐다. 2019년 1위였던 <디디의 우산>이 1996년 연세대학교 사태에서 촛불혁명까지 이르는 시간축 속에서의 개인의 이야기를 다루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한국 근현대시기를 통과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사는 동안 순자, 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자주 만났다. 순자가 왜 이렇게 많을까?’(작가의 말)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이 책은 엄마 이순일과 딸 한영진, 한세진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1946년생 이순일은 ‘순자’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가족을 위해 헌신한다. 한영진은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유통회사에 취직해서 경제적으로 가족들을 부양한다. 한세진은 희곡과 시나리오를 쓰며 하미영과 산다. 


소설속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존재한다. 관계에서 비롯되는 호칭을 배제한 주어는 ‘누구의 무엇’이 아닌, 독립적인 주체로 독자에게 다가온다. 이순일은 전쟁 중에 부모를 잃고 할아버지의 집을 거쳐 고모의 대가족을 건사한다. 집안일로 잔뼈가 굵은 순일은 딸인 한영진이 결혼 후 아이를 가지게 되자 두 집의 살림을 돌보게 된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순일의 어깨에 얹혀진 집안일의 무게는 너무 무겁지만 그녀의 희생으로 두 가정은 일상을 영위한다. ‘아이들은 어릴 때만큼 자주 다투지는 않았지만 훨씬 신랄하고 내밀한 것을 두고 다투었다. 그게 무엇이든 이순일은 가책을 느꼈다. 그게 무엇이든, 자기 손으로 건넨 것이 그 아이들의 손으로 넘어가 쪼개졌고 그 파편을 쥐고 있느라 아이들이 피를 흘리는 거라고 이순일은 생각했다.’(p.109) 순일은 자식들이 잘 살기를 바라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잘 알지 못한다. 자신이 가져보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한영진 또한 ‘없는 집 기둥’(p.49)으로 가정의 경제를 책임진다. 이순일은 한영진의 뒷바라지를 하며 일하는 사람에 대한 마음을 새 밥과 새 국으로 표시한다. ‘한영진은 밤마다 꾸벅꾸벅 졸며 그 밥을 먹었고 월급을 받으면 그 상에 월급봉투를 딱 붙이듯 내려놓았다. 그 상을 향한 자부와 경멸과 환멸과 분노를 견디면서’(p. 80) 한영진은 아들에게만 ‘너 살기 좋은데 있으라’고 말하는 이순일에게 ‘왜 나를 당신의 밥상 앞에 붙들어두었는가’(p.83) 물어보고 싶어하지만, 이미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수는 없다’는 말은 그녀에게 내면화 되어 있다. 


이순일의 성묘에 동행하는 사람은 언제나 한세진이다. 자신을 거두었던 외조부의 산소를 파묘하기 위한 길에도 함께 했던 한세진은 ‘너무 효도하려고 무리할 필요 없’다고 말하는 동생에게 의무에서 비롯된 행동이 아니라 엄마에게 공감하고 엄마의 아픔을 함께 느끼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나쁜 걸 나쁘다고 말하고 싶을 뿐인데 애를 써야 하고, 애쓸수록 형편없이 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p.168)다고 생각하는 그녀는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다시 말해 사랑하면서’(p.182) 살아가는 것은 삶이 다가오기 때문이라는 하미영의 말에 동조한다. 그녀는 이순일과 한영진과는 달리 자신이 하고싶은 것을 하는 인생을 산다.


가부장제로 대표되는 가족의 굴레는 이순일과 한영진의 삶을 굴절시킨다. 한세진이 이순일의 일에 마음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이성간의 결혼으로 발생되는 불평등의 영향권에 들지 않아서 였을까? 작가는 이 소설이 가족서사로 읽힐 것인지 궁금하다는 작가 후기를 남겼다. 어떻게 읽어내느냐는 독자의 몫이겠지만 우리 곁에 있는 많은 ‘순자’들이 황정은 작가를 통해 이 책에서 소환되었다. 가족의 일원으로서가 아니라 온전히 한 개인으로서의 순자로.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 아닐 수 없다. 

작가의 이전글 대체할 수 없는, 아무도 아닌 바로 ‘나’ 자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