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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오리 Aug 30. 2021

집요한 자기탐구의 끝판왕

서평 <러시아 소설> by 엠마뉘엘 카레르 (2017, 열린책들)

소설은 픽션이고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다.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아무리 처절한 이야기라도 윤리적인 부채의식 없이 읽을 수 있다는 측면은 독자의 부담을 가볍게 한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작가의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면? 생살이 드러나 피를 흘리는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 준 것이라면? 현대 프랑스 작가로서 평단의 높은 지지를 받고 있는 엠마뉘엘 카레르는 자전적 소설인 <러시아 소설>(2017, 열린책들)에서 주저 없이 자신의 내면에 깃든 환상과 공포를 펼쳐 보인다. 


‘나’ 엠마뉘엘 카레르는 성공한 소설가이다. 그의 어머니 ‘엘렌 카레르 당코즈’는 프랑스 학술원 종신원장으로 입지전적인 인물이지만 카레르의 외조부는 전쟁 직후 독일 군을 위해 일했다는 혐의로 납치된 후 실종되었다. 어떤 헝가리인이 전쟁으로 인해 말도 통하지 않는 러시아 소도시 코텔니치에서 53년의 유배 끝에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뉴스를 보고 카레르는 외조부에 대한 두려움과 수치심을 정면으로 마주하기 위해 러시아로 향한다. 파리를 벗어난, 러시아에서의 잦은 체류는 열정적인 사랑을 나누는 연인 소피와의 사이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고, 자유분방한 그녀에 대한 카레르의 집착은 둘의 관계를 파국으로 치닫게 하는데...


카레르는 자신에게 내재된 어둠과 공포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가족에 드리워진 그림자에서 그 근원을 탐구해 나간다. ‘일상 잡사 위에 높직이 떠서 독수리처럼 유유히 선회하는 진짜배기 러시아 지식인’(p.88)이었던 외조부는 전쟁으로 인해 자신의 재능을 꽃피우지 못하고 실패한 낙오자의 신세가 된다. 독일 나치의 부역자로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린 그는 가족에게 있어 두려움과 수치심의 원천이었다. 불행한 가족사로 인한 어두운 영향은 대를 이어 계속되고 삶에 대한 공포와 고통은 카레르의 집안을 끊임없이 맴돈다. 침묵함으로서 살아남을 수밖에 없었던 그의 어머니는 뛰어난 능력으로 사회적 성공을 거두지만 ‘(외조부가 겪은) 고통에 대한 침묵은 그의 실종에 대한 침묵보다도 그를 모두의 삶을 짓누르는 망령으로 만드는 결과’(p.417)를 가져오게 된다. 카레르는 모든 가족이 회피하는 고통을 떠맡아 그것에 집요할 정도로 ‘목소리를 부여’ 함으로서 ‘계속해서 살아가고, 또 싸울 것’임을 천명한다. (P.419) 


작가의 집요한 자기 탐구는 자신의 성적 환상까지도 적나라하게 표출해낸다. 외조부로 인한 불행한 가족사로 내면의 공포와 두려움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면, 소피를 향한 집착은 현실의 미세한 균열에서 시작된 광기와 그에 따른 파국을 야기한다. 전체 7부로 이루어진 이야기 한 복판에 있는 3부는 소피에게 보내는 화끈한 공개 연서이자 ‘포르노그라피적 단편’이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같은 액자식 구성은 소설 후반의 흐름을 작가와 소피의 관계로 집중시킨다. 카레르는 그녀가 특정 시간과 장소에서 자신의 글을 읽기 바라지만 계획은 틀어지고, 작가는 끝없는 의심과 추궁으로 소피를 몰아붙인다. ‘얘기를 하면 할수록 내 확신은 굳어지고, 난 네가 갈수록 궁지에 빠지는 모습을 잔인하게 즐기지만. 공식적인 확인이 있기 전까지는 최후의 일격을 가하고 싶지 않다.’(p. 303)


모든 이야기의 원형은 어쩌면 자신에서 출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일반적인 경우 소설가는 작중 페르소나를 이용해 자신의 내면을 표출한다. 하지만 카레르는 스스로를 노출하고 자신의 고통을 글로 새겼다. 그의 무모할 정도의 솔직함은 독자로 하여금 이 이야기가 모두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궁금하게 만들기도 한다. (르 몽드에 게재됐다는 그의 단편은 실제로 신문에 실렸을까? 소피는 그의 소설을 정말로 읽지 않았을까? 아니, 소피라는 사람이 실존인물이긴 한 걸까??) 카레르의 글쓰기는 고통과 어두움을 정면으로 마주한 대장정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치부를 알게 된다면, 그래도 두려움이 없을 수 있을까? 저널리즘적인 글쓰기라는 그의 특기는 소설의 환상성을 배제하고 카레르라는 인물을 입체화한다. 극 중 실린 단편에 대한 ‘한 작가는 어느 정도까지 가까운 이들을 대중에게 먹잇감으로 던져 줄 수 있으며, 자신의 쾌락을 위해 그들을 희생시킬 수 있는가?’(p.337)라는 문제제기는 ‘한 작가는 어느 정도까지 자신의 고통을 대중에게 표출할 수 있으며, 자신의 정신적 해방을 위해 프라이버시를 희생시킬 수 있는가?’로 바꿔 표현할 수도 있겠다. 주변 실존인물과의 구체적인 사생활 묘사는 얼마 전 있었던 국내 작가의 사적 대화 무단 인용 사건을 떠 올리게 하며 독자로 하여금 불편함을 느끼게 할 수도 있겠지만 광기와 고통, 두려움과 공포를 정면으로 응시하고자 분투하는 한 인간의 열정에 초점을 맞춘다면 참으로 흥미로운 독서 경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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