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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오리 Oct 27. 2021

야간열차에서 일어나는 신비한 여행담

서평 <용의자의 야간열차> 다와다 요코 (문학동네, 2016)

코로나 시대의 큰 아쉬움 중 하나는 여행을 마음대로 갈 수 없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일상을 벗어나고 싶을 때 해외든 국내든 언제든 어디로든 떠날 수 있었던 이전과 달리, 사회적 거리두기 등으로 촘촘해진 방역수칙과 2주의 격리기간 등을 지켜야만 가능해진 여행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사치가 되어버렸다. 2016년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시리즈 중 한권으로 발표된 다와다 요코의 <용의자의 야간열차>는 여행에 목마른 독자에게 한줄기 서늘한 바람 같은 독서를 선물한다.     


일본어와 독일어로 작품을 발표하는 다와다 요코는 도쿄에서 태어나 와세다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전공하고 이후 독일로 건너가 시와 소설, 에세이 등을 꾸준히 발표해 ‘언어와 언어 사이를 줄타기하며 인식의 세계를 항상 낯설게 하는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소설적 서사구조보다는 다양한 층위의 화두에 중점을 두는 작가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 또한 서사의 큰 흐름을 따라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는다. 각 챕터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시간 또한 순차적이지 않다. 화자는 파리로, 그라츠로, 자그레브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뜻밖의 사건들을 마주하게 된다.      


소설은 흔치 않은 2인칭의 주어로 서술된다. ‘당신은’ 철도파업으로 기차를 중간에 내려야만 하기도 하고, 수상한 남자들의 의심쩍은 원두커피봉지를 배낭에 넣고 국경을 넘어야하는 상황에도 맞닥뜨린다. 무용수로서 도시를 건너다니며 공연에 참가하고, 때로는 학생 신분으로 배낭을 맨 채 기차 여행을 떠난다. 여행지의 수려한 풍경묘사는 간데없고, 때로 초현실적인 사건이 일어나기도 해 시베리아 한복판 기차에서 떨어지고, 양성구유로 변한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열차를 타고 여행하는 주인공을 따라가는 사이 독자는 어느새 화자에 의해 ‘당신’이 되고 이야기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화장실에 가고 싶은 인간과 잠이 깨버린 인간과 일어나기 싫은 인간을 다 더해도 결국은 단 한 사람이다. 자신이 혼자라고 이토록 절절히 느껴지는 순간은 없다.’(p.76) 여행 중 만나는 사람은 많아도 주인공은 언제나 혼자다. 뚜렷한 목적 없이 혼자 하는 기차여행은 인생의 모습과 비슷하다. ‘우리는 애당초 같은 공간에 있지 않아요. 보세요. 땅의 이름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침대 밑은 스쳐지나가는 소리가 들리잖아요? 한 사람 한 사람 다 달라요. 발밑에서 땅을 빼앗기는 속도가. 아무도 내릴 필요 없어요. 모두 여기 있으면서 여기 없는 채로 각자 뿔뿔이 흩어져 달려가는 거예요.’(p.140) 우리는 같은 시공간을 점유하더라도 각자의 길을 가고 있는 셈이다.     


혼자 하는 여행은 지금의 나를 벗고 익명의 사람이 되는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자신의 의지에 반해 겪게 되는 여러 소설속 상황들은 마치 무의식의 세계를 보는 것 같다. ‘이성의 목소리에 대항해서 융합의 매혹이 의지를 무디게 만들며 괜찮아, 괜찮아, 라고 속삭인다. 그대로 몸을 맡겨도 돼, 그대로 흘러가, 흘러가게 놔두고 가는 데까지 가버려, 어차피 자기 의지로는 어쩔 수 없으니까, 기분이 좋으면 그만이니까, 그냥 거스르지 말고 스르르.’(p.83) 작가는 신비롭게 느껴지는 기차여행의 에피소드를 통해 자아의 정체성마저 불분명하게 만들고 나와 세계가 섞여 들어가는 지점까지 독자를 이끈다.      


‘용의자의 야간열차’라는, 어쩌면 약간은 장르소설적인 제목으로 인해 흥미진진한 추리 소설류의 스토리를 기대한 독자라면 익숙치 않은 이야기의 전개 방식에 당혹스러운 독서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문득 훌쩍 떠나기 위해 기차에 몸을 맡기듯 소설 속으로 빠져든다면 여행이 주는 달콤한 고독과 낯선 즐거움을 책 속에서 맛보고, 기차표 예매 사이트를 열게 되는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이 여행이 끝나면, 곧바로 다음 여행이 찾아옵니다. 그게 끝나면 또 바로 다음 여행이 시작되죠. 그렇게 끝없이 여행이 계속되는 겁니다.’(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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