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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오리 Jan 28. 2022

칼비노가 구축한 가상의 세계

서평 <보이지 않는 도시들>(민음사, 2007)

사람들이 게임을 하는 데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는 배경이 되는 세계관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새로운 인물이 되어 이런 저런 사건 사고를 해결하고 악당을 물리치는 쾌감도 분명 있지만 가상의 세계 자체를 탐험하며 이국적인 풍경을 보는 것 또한 나름의 재미가 있다. 잘 만들어진 게임은 세계관의 설정 자체만으로도 이미 높은 평가를 받기도 해서 아트북같은 형태로 발매되기도 한다. 이탈리아의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민음사, 2007)은 마치 이런 게임 속 설정된 세계관 같은 신비롭고 환상적인 도시로 이루어진 세계를 구축한다. 독자는 칼비노의 소설을 통해 마법과 같은 몽환적인 도시의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현대 환상문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거장으로 알려진 칼비노는 이 작품에서도 그의 독특한 환상성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우화적 상상력으로 인물들의 서사를 엮었던 ‘우리의 선조들’ 시리즈와 달리 그의 후기 대표작이기도 한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는 특정한 사건이나 서사가 없다. 독자는 비선형적으로 펼쳐지는 상상속의 도시들로 세계를 구축해 가야만 한다. ‘머릿속으로 그 도시 한복판을 돌아다닐 수도 있었고 거기서 길을 잃기도 하고 걸음을 멈추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켤 수도, 혹은 달음박질로 달아날 수도 있었다.’(p.52) 


책은 모두 9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총 55개에 이르는 도시를 묘사한다. 수천 개의 샘으로 이뤄진 도시 이사우라, 높은 말뚝들 위에 솟아있는 제노비아, 담도 천장도 바닥도 없이 수도관으로만 이루어진 아르밀라 등등 칼비노의 도시들은 하나같이 기상천외하다. 중국 대륙을 통일한 황제 쿠빌라이 칸에게  베네치아의 상인 마르코 폴로는 자신이 여행했던 도시들에 대한 이야기를 펼치고 황제와 상인은 대화를 통해 제국의 모습을 만들어간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도시는 상상 속에서 형상을 갖는 가상의 세계다. 칼비노는 다양한 도시의 모습을 통해 현실의 모습을 비춰보는 거울로 삼는다. ‘폐하의 주위가 얼마나 어두운지 알고 싶으시다면 멀리 보이는 희미한 불빛 쪽을 뚫어지게 바라보셔야 합니다.’(p.76) 가상의 도시를 읽어내며 그들은 지금 여기의 모습을 다시금 곱씹는다. 칸이 가지고 있던 제국의 지도는 모든 도시가 담겨 있으며 앞으로 존재하게 될 도시까지도 드러낸다. 도시들은 어떤 연관성도 없이 각각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듯 보이지만 ‘다리는 어떤 한 개의 돌이 아니라 그 돌들이 만들어내는 아치의 선에 지탱되듯’ 전체를 이룬다. ‘돌이 없으면 아치도 없습니다’(p.107) 


황제는 마르코 폴로에게 도시의 이야기를 들으며 제국에 대한 자부심을 갖지만, 기억으로 존재하는 도시에 대한 공허감과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를 느끼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의 대화는 쿠빌라이 칸과 마르코 폴로라는 별명을 가진 두 거지들이 하는 대화인지도 모르네... 싸구로 포도주 몇 모금에 취한 두 사람이 동방의 보석들로 주위가 눈부시게 빛나는 것을 보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p.134) 도시의 가상성은 존재의 가상성으로까지 전이된다. 칸의 정복이 체스판 위에서 의미를 잃어갈 때, 작가는 오히려 눈 앞에 존재하는 실물의 체스판을 묘사하며 존재 의미를 찾는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지옥은 미래의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지옥에서 살고 있고 함께 지옥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p. 207) 칼비노의 지옥은 현재진행형이다. 작가는 마르코 폴로의 입을 통해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일부분이 되던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해 공간을 부여할지에 대한 선택지를 내민다. 하지만 이미 어떤 것을 선택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칼비노는 도시와 기억, 욕망, 기호, 이름, 죽은 자들을 연결시켰고 이를 공간으로 형상화시켰다. 결국 남는 것은 의미가 부여된 공간이고 이미지다. 글로 표현되었지만 어떤 그림보다도 강렬한 이미지를 남기고 있는.


선형적인 구조의 소설을 기대한 독자에게는 지금껏 이야기의 배경으로만 등장했던 도시가 전면에 등장하는 이 작품이 당황스러운 조우가 될 수 있겠다. 그가 묘사하는 이국적인 도시를 머릿속으로 상상해가며 감상해 보자. 작가는 이 작품을 마치 시를 쓰듯 여러 가지 영감에 따라 썼다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엄격한 수열과 기하학적이라고 불려도 좋을 만큼 정확한 규칙에 의해 구성했다. 타로카드를 중요한 텍스트 기호로 사용한 <교차된 운명의 성>, 다양한 요소의 결합으로 텍스트가 확장되는 ‘하이퍼 소설’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 등과 함께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새로운 글쓰기의 형식을 실험했던 칼비노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좋은 독서경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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