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디서부터 다시 적어야 할까...
책상 위 촛불 하나가 흔들리고 있었다. 나, '누가(Luke)'는 오래된 종이를 펼쳐 놓은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은 없었지만, 뭔가 안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마음이었다. 며칠 전부터 쓰지 못한 글의 첫 문장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신도 궁금해하셨지요, 각하.”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데오필로.”
그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문장이 조심스러워진다. 예수를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이 때로는 너무 크고, 너무 빛나서 오히려 진실이 보이지 않는 순간들이 있었다. 나는 알았다. 데오필로가 혼란스러워했던 건 그런 부분이었다. 무엇을 믿어야 할지, 어떤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할지. 예수에 대해 들은 것들은 대부분 경이로웠지만, 동시에 그만큼 낯설었다.
“그 이야기가 정말 사실일까?”
“예수라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였을까?”
“왜 그토록 많은 이들이 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걸까?”
나는 알고 있었다. 그 질문들이 단지 호기심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는 것을. 데오필로는 교양 있는 인물이었고, 삶을 가볍게 소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예수의 이름 앞에서 잠시 멈춘 이유는, 그 이름이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진짜가, 자신의 삶에까지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기대가 동시에 있었을 것이다.
나는 다시 펜을 들었다. 이번에는 확신이 있었다. 나는 단지 기록을 남기려는 게 아니었다. 나 자신이 이 여정에 들어와 있었고, 데오필로를 그 안으로 초대하고 싶었다.
“존경하는 데오필로 각하, 우리들 사이에서 일어난 그 일들을 글로 엮으려 했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문장을 쓸 때, 나는 잠시 멈추었다.
‘우리들 사이에서 일어난 그 일들’ —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던가. 병자가 나았다는 이야기, 죽었던 이가 다시 일어났다는 이야기, 마음이 무너졌던 이가 다시 걸었다는 이야기. 나는 그런 이야기들을 처음에는 한 걸음 떨어져 들었다. 그저 환상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이야기들엔 무게가 있었다. 진실처럼 낡아 있는 이야기들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움직이는 이야기들이었다. 나는 이어서 썼다.
“그들이 쓴 것은 처음부터 직접 눈으로 보고 말씀을 전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사실 그대로입니다.”
직접 본 사람들. 현장에서 눈을 마주쳤던 이들. 나는 그들을 만났다. 어느 날, 나는 예수를 따라다녔던 노인을 만났다. 손이 떨리고 말도 느렸지만, 눈빛만큼은 살아 있었다.
“그분이 처음 병든 아이를 안아주셨을 때요,” 노인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숨죽이고 있었어요. 누구도 손대지 못하던 아이였으니까요. 그런데 그분은 그냥 웃으셨어요. 아주 작은 미소였지만… 그 순간 무언가가 변했어요.”
그 이야기는 간단했고, 설명도 부족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이 거짓일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말보다 오래 남는 건, 때로 눈빛과 침묵이었다.
“저 역시 이 모든 일들을 처음부터 자세히 조사해 둔 바 있으므로…”
나는 다시 써 내려갔다.
“… 그것을 순서대로 정리하여 각하께 써서 보내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순서대로. 그 단어에는 나의 고집이 담겨 있었다. 나는 의사였다. 흐트러진 증상에서 질병의 원인을 찾는 일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무작위로 엉킨 이야기들 속에서 맥락을 찾는 능력은 나의 전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하나하나 천천히 따라가기 시작했다.
이야기의 시작은 어디였을까?
언제, 어떤 순간부터,
이 ‘예수’라는 사람이 세상의 중심이 되어갔을까?
놀랍게도, 그 이야기는 광장도, 왕궁도 아닌 아주 소박한 가정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헤로데가 유다의 왕이었을 때,”
나는 그렇게 배경을 열며, 한 부부의 이름을 꺼냈다. 나는 이 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사람에게서 들었다. 처음엔 스쳐 지나가듯 언급된 이름들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주 등장했고, 그들의 삶에 담긴 고요한 진실이 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사람들이 말하길,
“즈가리야와 엘리사벳요? 조용한 분들이었어요. 하지만 그만큼 변함이 없었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라면, 끝까지 지키려 하셨던 분들이에요.”
나는 그 말들을 조심스레 모아 하나의 그림으로 엮었다. 겉으로 보기에 특별할 것 없는 부부였지만,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도 신앙과 일상을 함께 지켜낸 이들이었다. 나는 그 조용한 삶이야말로 더 큰 울림을 가진다고 느꼈다. 그런데 그들을 소개할 때, 늘 빠지지 않고 따라붙는 말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녀는 없으셨어요. 엘리사벳이 원래 아기를 못 가지셨거든요. 그리고 지금은… 두 분 다 많이 늙으셨어요.”
나는 그 말속에 담긴 깊은 침묵을 느꼈다. 아예 기대조차 하지 않는 오래된 상처 같은 문장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성경의 오래된 이야기들이 종종 그런 고요한 슬픔 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누군가는 끝이라 여기는 그 순간에, 하느님은 언제나 조용히 다음 장을 열어가셨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그 문장을 기록하며 펜을 오래 내려놓지 않았다.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펜을 잠시 내려놓고 숨을 내쉬었다. 이 기록이 어디로 향할지 나는 아직 다 알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확신했던 건 단 하나, 지금 내가 써 내려가는 이 첫 장면이 결코 작은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예수라는 이름으로 시작될 모든 흐름은 이 조용한 부부의 일상과 함께 시작되고 있었고, 바로 그 지점에 진실이 숨어 있다는 것을 나는 느끼고 있었다. 나는 종종, 질문 하나를 마음속에 오래 붙들고 있었다.
“왜 하느님은 이런 이들을 통해 시작하셨을까?”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늙고 자식을 갖지 못한 이 부부는 무엇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이 변화시킨 역사도 없고, 눈에 띄는 업적도 없다. 하지만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은 그들을 택하셨는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이루어서가 아니라,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 속에서도, 그분의 약속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 질문을 데오필로에게도 묻고 싶었다. 당신이라면,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믿고 싶겠느냐고. 반짝이는 사람의 말보다, 오랜 시간을 견뎌낸 사람의 말에 더 귀 기울이고 싶지 않으냐고. 진짜 이야기란, 그렇게 살아낸 사람들 속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믿었다. 그러니 이 부부의 이름을 적는 순간, 나는 잠시 문장을 멈추고 마음을 다잡았다. 이 이야기는 사건의 기록이 아니었다. 그보다 먼저, 사람의 기록이었다.
‘즈가리야’, ‘엘리사벳’—이 이름들을 쓴다는 건 단지 인물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품은 삶의 무게를 받아 적는 일이었다.
누군가는 물을지도 모른다.
“하느님은 왜 이런 이들을 주목하셨을까?”
나는 그 대답을 독자에게 넘긴다. 하지만 나는 암시한다. 이 부부의 삶에는 무언가 준비되어 있었다고. 조용한 사람들의, 꾸준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지금’ 속에 — 바로 그 믿음이 다음 장을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믿음은 언제나 미래를 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을 살아내는 힘이다. 하느님의 약속은 언젠가 이루어지지만, 그것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오늘, 이 순간을 묵묵히 지켜낸다. 나는 그것이 ‘믿을 만한 이야기’의 시작점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 이야기를 데오필로에게 — "그리고 당신에게" — 건네려 하고 있다.
위의 글은 신약 성경 "누가복음 1:1-7"을 각색해서 쓴 글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성경책을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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