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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13 - 조용한 혁명

그 누구도 명령하지 않았지만, 많은 이들이 방향을 바꿨다

by 나그네 한

세상이 돌아가는 건 결국 누구의 손에 권력이 쥐어졌느냐에 달려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황제가 누구냐에 따라 세금이 달라지고, 총독이 누구냐에 따라 칼날이 들이대는 방향도 바뀌니까. 유다 사람들은 점점 숨을 죽이고 살고 있었다.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가 다스린 지 십오 년, 유다에는 본티오 빌라도가 총독으로 내려왔고, 그는 율법보다도 빠른 검과 무거운 세금으로 사람들의 삶을 눌렀다. 갈릴래아에는 헤로데, 그 동생 필립보는 북동쪽의 변방을 지켰고, 아빌레네에는 리사니아가 있었다. 이름만 다를 뿐, 모두 황제의 개들이라 불렸다.


사람들은 겉으론 조용했지만, 속에서는 늘 뭔가가 끓고 있었다. 성전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하느님의 구원을 바랐지만, 돌아오는 건 로마 병사들의 감시와 성전세 독촉뿐이었다. 아이들조차 거리에서 돌멩이를 주워 들고 "로마 놈들"이라 중얼댔다. 어떤 이들은 성전 제사장을 욕했고, 어떤 이들은 하느님조차 침묵한다고 분노했다.


그 무렵, 나는 그런 분노와 불신이 뒤엉킨 유다 땅에서 이상한 소문 하나를 들었다. 누군가가 광야에서 외치고 있다는 말이었다. 신전도, 제사장도 아닌, 이름 없는 사내 하나가 사람들을 모아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 말에 마음이 끌렸다. 예루살렘이 아닌 광야에서 들린 소리.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 나섰다는 그 목소리. 왜 하필, 거기였을까?






사람들은 말하길, 하느님의 말씀이 예루살렘이 아닌 광야에서 울려 퍼졌다고 했다. 그것도 대제사장 안나스도, 가야바도 아닌, 전직 제사장 즈가리야의 아들이라는 이의 입을 통해서였다고 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중심에서 멀어진 그 광야에서, 어떻게 중심보다 더 깊은 울림이 시작될 수 있었을까?


그 사람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누군가는 그를 미쳤다고 말했고, 누군가는 예언자라고 불렀다. 나는 그를 만나본 적이 없다. 다만 그에 대해 들었을 뿐이다. 거친 옷을 걸치고, 꿀과 메뚜기를 먹으며, 요단강 근처를 떠돌던 사내. 사람들은 그를 보러 먼 길을 마다하지 않았고, 그가 외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람들은 말하길, 하느님의 말씀이 예루살렘이 아닌 광야에서 울려 퍼졌다고 했다. 그것도 현직 대제사장 안나스도, 가야바도 아닌, 은퇴한 제사장 즈가리야의 아들을 통해서 말이다. 한 노인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처음엔 다들 믿지 않았지. 아니, 믿고 싶지 않았던 거야. 하느님의 말씀이 왜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그런 먼 데서 터져 나와?”


나는 그 말을 노트에 받아 적었다. 사람들의 분노보다도, 그 말에 담긴 혼란과 상실감이 더 깊게 와닿았다. 하느님의 말씀이 사라졌다고는 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기대한 자리에서 들리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한 충격이었다.


“요한이라고? 그거 즈가리야의 아들이잖아.”

“그래, 맞아. 그 제사장이 성전에서 벙어리 되었을 때 애 낳았던 거 기억나지?”

“근데 지금은 광야를 떠돌면서 미친 사람처럼 외친다더라.”

“아니야, 내가 들은 건 달라. 진짜 뭔가 있어. 그 말엔 힘이 있어. 그냥 떠도는 말이 아니야.”


시장 한편에서 들은 그런 조용한 논쟁이, 어쩌면 그 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는 미쳤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예언자라고 말한다. 어느 쪽이든 확실한 건 하나였다. 그가 중심에서 멀어진 곳에서 중심을 흔들고 있다는 것.


나는 그를 만나본 적이 없다. 직접 본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말속에서 조각들을 모을 뿐이다. 그들은 말했다. 그는 낡고 거친 옷을 입었고, 마을로 들어오지도 않았으며, 요단강 근처의 바람과 돌, 모래 사이에서 머물렀다고. 먹는 것도 남들과 달랐다. 꿀과 메뚜기, 그리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눈빛.


“내가 요한을 본 건 딱 한 번이야,” 한 여인이 말했다. “사람들이 줄을 섰어. 그 말 좀 들어보겠다고. 그런데 무섭더라고. 그 눈빛이… 우리 마음속을 다 꿰뚫어 보는 것 같았거든.”


나는 물었다.


“그가 뭐라고 말했죠?”


“별로 많은 말은 없었어. 그냥 ‘회개하라’고 했어. 그게 다였는데… 근데… 이상하게 눈물이 나더라.”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성전 안에서 드리는 수많은 기도보다도, 그 광야에서 들려오는 한마디가 사람들의 마음을 더 깊이 건드렸다는 것.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중심에서 멀어진 그 광야에서, 어떻게 중심보다 더 깊은 울림이 시작될 수 있었을까?







요한이 했던 말 가운데 하나는 아직도 내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 있다.


“회개하라. 세례를 받으라. 그러면 너희의 잘못이 씻길 것이다.”

그는 회개의 시작을 마음에서 찾지 않았다. 삶에서 찾았다. 말이 아니라 손으로 드러나는 변화, 삶의 결을 바꾸는 선택에서 말이다.


어느 날, 요단강 근처에 있었던 한 노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날따라 이상하게 사람이 많이 몰렸고, 군인들과 세리들까지 줄을 서 있었다고 했다. 처음엔 요한이 그들을 반겼을 것 같았는데, 정반대였다고 한다. 그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이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올 재앙을 피하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놀랍게도 그 말에 사람들은 뒤돌아가지 않았다. 돌아서기보다는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말은 너무 간단했다.


“회개하라. 세례를 받으라. 그러면 너희의 잘못이 씻길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 단순함 때문에 무거웠다. 그는 회개의 시작을 마음이 아닌, 삶에서 찾았다. 말보다 행동, 결심보다 변화의 실천에서 말이다. 그는 회개의 시작을 단지 마음속에서 찾지 않았다. 삶에서, 손으로 드러나는 변화와 삶의 결을 바꾸는 선택에서 그 의미를 찾았다.


하지만 모든 이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것은 아니었다. 요단강 근처에서 직접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모아보니,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한 남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에는 그가 외치는 ‘회개하라’라는 말이 마치 선고처럼 들렸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정확히 모르겠는데, 그 한마디에 마음 한편이 쓸쓸해졌지.”


또 다른 이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덧붙였다.


“나 같은 경우, 이미 내 몫의 세금을 내고, 정해진 일상을 살아왔는데, 갑자기 내 잘못을 씻으라니… 어찌 그리 갑작스러운가.”


반면, 한 여인은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그 말이 왠지 내 안 깊숙이 숨겨진 상처를 건드린 것 같았어요. 평소 감추던 허탈함과 불안을 마주하게 되었으니까.”


그렇게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요한의 말에 반응했다. 그리고 그날, 군인들과 세리들까지 줄을 선 채 모여있던 요단강 근처에서, 또 다른 대화가 오갔다. 그때, 요한은 사람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이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올 재앙을 피하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그 말이 퍼지자, 처음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이내 누군가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물음이 내 마음을 붙잡았다. 만약 나였다면, 그 모욕적인 말 한마디에 자리를 박차고 떠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요한의 거친 말속에 숨은 진심과 가르침을 구했다. 어쩌면 그들 안에도 오랜 세월 쌓인 무언가가 무너져 내리고, 다시 일어서고픈 간절한 마음이 있었던 것 아닐까. 신념이든 도덕이든, 양심이든 말이다. 그들은 이미 속 깊은 곳에서 갈라진 틈을 메우고자 하는, 작지만 강한 의지를 품고 있었기에, 요한의 외침은 단순한 비난이 아니라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된 듯했다.


한 병사는 여전히 멍한 눈빛으로 말했다.


“내겐 그 말이, 마치 내가 잊고 있던 진실을 끄집어내는 듯했어. 어쩌면 우리 모두가 어딘가에서 잃어버린 걸 찾으려 했던 게 아닐까.”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노트에 기록하며, 요한이라는 인물이 단순한 외부인의 목소리가 아니라, 중심에서 멀어져 있던 이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닿은 어떤 소리였음을 느꼈다. 누구도 단 한마디 ‘확신’의 표현을 내뱉지는 않았지만, 그 자리에는 모두가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는, 묵묵한 공감과 깨달음이 흐르고 있었다.


내가 그 모든 이야기를 모으는 이유는, 단순히 전해 들은 소문을 기록하기 위함이 아니다. 조용한 관찰자로서, 사람들의 말 한마디, 눈빛, 그리고 그 속에 담긴 갈망을 기록함으로써, 이 땅에서 무너진 것들을 다시 세우려는 의지를 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요한의 말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삶 속에서 작은 반향을 일으키며, 그들의 고요한 각성을 불러일으켰다.






요한은 그들에게 무슨 놀라운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위대한 교리나 낯선 계시도 아니었다. 그는 다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속옷이 두 벌 있는 사람은 한 벌을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이 있는 사람도 그렇게 하라.”

“세금은 정해진 만큼만 걷고, 그 이상은 받지 마라.”

“힘이 있다고 협박하거나 남의 것을 빼앗지 말고, 받은 월급으로 만족하여라.”


그 자리에 있었던 어떤 이는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처음엔 실망했어요. 뭔가 더 대단한 말씀을 하실 줄 알았거든요. 근데 그냥... 상식이더라고요.”


하지만 곁에 있던 또 다른 이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근데 그 상식을 내가 안 지키고 살았다는 걸 그제야 알았지. 머리는 알고 있었는데, 손은 아니었거든.”


나는 그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특별하지 않아서 오히려 무거운 말. 누구나 알고 있으나 쉽게 행하지 못하는 말. 사실 나조차도 ‘나눠라’, ‘만족하라’는 말보다 ‘조금만 더 가지라’는 말에 더 익숙했던 사람이다.


사람들이 요한의 말에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어떤 이들은 속으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지금 가진 것도 빠듯한데, 무슨 나눔이냐.”


“만족하라니, 그건 가진 자가 하는 소리지.”


요한이 그렇게까지 강하게 외친 까닭을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한 노인은 당시를 떠올리며 내게 말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걸 왜 그리 못 믿겠다는 건지… 그건 우리 정체성인데… 그는 그걸 아주 송두리째 부정하듯 말했지.”


(그들은 자신이 아브라함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믿었고, 그것이 곧 하느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증명해 주는 것이라 여겼다. 일종의 민족적 자부심이자 영적인 자격처럼 여긴 것이다.)


요한은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하느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다.”


그 말이 가슴을 후벼 팠다는 이들도 있었다. 신분, 족보, 조상의 이름. 우리가 붙들고 살아온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눈에는 아무 증거도 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요한이 보려 한 건 단 하나였다. 지금 이 순간, 그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 그의 말을 들은 군인 중 한 사람은, 그날의 말을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고 했다. 몇 년 뒤, 그는 나를 조용히 불러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이 그러더군요. 가진 것에 만족하라. 난 그 말 처음 들었을 땐, 솔직히 화가 났어요. 무언가를 더 갖고 싶다는 건 죄도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자꾸 그 말이 맴돌더라고요. 아무도 나한테 그런 말 해준 적이 없었거든. 모두 다 더 가지라고만 했지.”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웃으며 말했다.


“처음엔 그 말이 비겁해 보였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그게 제일 어려운 일이더라고요. 그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나는 그의 말 하나하나를 받아 적었다. 요한의 말이 어떻게 한 사람의 마음을 파고들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마음이 다시 삶의 방향을 조금씩 바꾸게 되었는지. 그것이 내가 기록하려는 이야기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날 요단강 물가에서 들린 목소리는 바람 속에 퍼져 나갔고, 사람들은 그 말을 저마다 다르게 들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자리를 그냥 지나친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상처로, 누군가는 부끄러움으로, 누군가는 위안으로. 그리고 그들의 속삭임은, 지금도 내가 길 위에서 듣고 있는 이야기들 속에 살아 있다.







나는 그 말을 조용히 노트에 적어 두었다.

말보다도, 그 말이 사람들의 삶에 스며든 방식이 내게는 더 중요했다. 그들의 말과 삶의 틈새에서 무언가 빛나는 진실이 떠오를 때가 있다. 진실은 늘 큰 목소리로 오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히, 낡은 옷자락 사이로, 흔들리는 눈빛 사이로 스며드는 것이었다.


요한의 말은 혁명이 아니었다. 피 흘리는 반란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말은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많은 이들이 그날 이후 무언가를 버렸고, 다시 시작했다. 속옷을 나누어주고, 욕심을 거두고, 권력을 내려놓았다. 말하자면, 자신을 다시 빚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외적인 변화보다 더 깊은 내면의 반응이었다. 마치 어둡던 방 안에 조용히 불이 켜지는 순간처럼.


그가 외쳤던 광야의 소리, 요단강 물가에 서서 사람들과 나눈 그 짧은 대화들, 그것들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흔들었는지를 나는 보고, 듣고, 적고 있다. 어떤 날은 내가 그 이야기의 바깥에 서 있는 듯했고, 또 어떤 날은 나 역시 그 물가의 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기록하는 자로서, 나 또한 그 물결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의 말을 따라 걸으며, 나도 내 삶을 조금씩 돌아보게 되었다. 이 기록이 단순한 연대기가 아닌, 누군가의 마음에 머물 수 있는 이야기이기를 바란다. 회개는 그저 죄를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보려는 의지라는 걸 — 나는 요단강 근처의 이야기들을 통해 배웠다.


그 모든 이야기가 모이고 나면, 나는 아마 이렇게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길을 닦고 있었노라. 그 길은 어느 누구도 아닌, 하느님의 길이었다고.”



위의 글은 신약 성경 "누가복음 3:1-14"을 각색해서 쓴 글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성경책을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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