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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23 - 평지에 서다

말보다 깊은 시선, 혁명은 거기서 시작되었다

by 나그네 한

그날의 이야기로 나를 이끈 이는 유다 땅 베레아에서 만난 한 남자였다. 거칠게 벗겨진 나무판 위에 두 손을 얹고 있던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분은, 산에서 내려오셨지요.”


그 말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산에서. 하지만 그 이야기는 끝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을 알리는 신호 같았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열두 사람을 뽑으신 후였어요. 모두가 말했어요. 이제 본격적으로 뭔가를 시작하시겠다고. 그런데, 그분은 바로 아래로 내려가셨어요.”


산에서 내려온 예수는 곧바로 평지로 향했다. 그는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무리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산 아래, 평지에는 이미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유다 전역에서 왔죠. 예루살렘도 있었고… 두로와 시돈 해안에서도 왔습니다.”

내가 눈을 추켜올리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그 사람들이요. 이방인들이요. 오랜 원수들이요.”


두로와 시돈.


그 이름만으로도, 유다 땅의 사람들에겐 오랜 기억이 떠올랐다. 아득한 옛날부터 이스라엘과는 마주하지 않은 방향으로 살아온 땅. 때로는 무역의 우군이었고, 때로는 신앙의 적이었으며, 대개는 이스라엘 신앙의 변절을 유혹하던 도시.


나는 에스겔의 오래된 예언을 떠올렸다.

“시돈은 이스라엘 족속에게 찌르는 가시다.”

거기엔 고통이 묻어 있었다. 단지 민족의 갈등이 아니라, 신앙과 신념 사이의 충돌. 두로와 시돈은 바알과 아세라의 뿌리를 품은 도시였다. 그리고 이방의 신들이 이스라엘 땅을 어지럽힐 때면, 언제나 그 출발점에 그 해안 도시들의 이름이 있었다.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이 그 땅 출신이라는 사실도,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 도시의 이미지를 굳혀 놓았다.


기름지고 풍요로운 땅. 그러나 혼합된 신앙과 교만의 도시.

그러니 그런 땅에서 온 사람들이 지금 예수를 만나러 유다 땅에 왔다는 건, 단순한 여행이 아니었다. 신념과 삶 전체를 흔드는 어떤 움직임, 혹은 절박함의 발현이었다.


“그들이 왜 왔을까요?”

내가 물었을 때, 한 노인이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그들에게도… 아픈 자식이 있었거든요.”


어떤 사람은 병든 손을 끌고 왔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귀신 들린 형제를 데리고 왔다 했다. 누군가는 맨몸으로 찾아왔지만, 눈빛만큼은 누구보다 절실했다고 했다.


“말씀을 듣고 싶었어요.”

어떤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우린 살고 싶어서 왔어요.”


병을 고치고 싶었고,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몸에 붙은 악한 기운을 떼어내고 싶었고, 아무리 돌봐도 나아지지 않는 아이를 어떻게든 살리고 싶었다. 모두가 믿음을 말했지만, 대부분은 절망을 품고 있었다.


시돈에서 왔던 한 여인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녀는 혼자였다. 짐이라곤 얇은 옷 하나와 작은 빵 덩이뿐이었다고 했다. 처음엔 그냥 멀찍이 서 있었다고 했다.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사람들은 왜 웃다가도 울고, 울다가도 소리치는지—그걸 보고 싶었다고 했다.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어요. 두려웠어요. 사람들 틈에 섞이면… 나 같은 사람은 들키거든요.”


그녀는 병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름 붙이기 애매한 병이었다고 했다. 겉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사람들의 눈은 그것을 먼저 알아봤고, 그 눈빛이 병보다 더 아팠다고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생긴 병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꼭 이유를 찾으려고 하죠. 무슨 죄를 지었냐고. 하느님이 벌을 주신 거라고.”


그 말은 내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하는 듯한 말투였다. 내게 그 이야기를 전해준 사람은, 그녀와 잠시 동행했던 여정 중 그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고 말했다고 했다. 조용히, 그러나 끊을 수 없는 말처럼. 그날 그녀는 멀찍이 서 있다가, 어느 순간 예수와 눈이 마주쳤다고 했다.


그의 시선은 아주 짧았고, 아무 말도 없었다. 하지만 그 침묵이 전한 것이, 그녀에겐 너무도 분명했다고 한다.


“그냥… 보셨어요. 이름도, 사정도 묻지 않으셨어요. 근데… 그게 다였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 한 번의 시선이, 사람들 틈에서 투명하게 지워져 살던 자신을 ‘존재하는 사람’으로 다시 꺼내준 것 같았다고. 무너지는 듯하면서도, 무섭지 않았다고 했다. 오히려… 참았던 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고 한다.


그 웃음은 병이 나아서 웃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스스로를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서 나오는 웃음이었다. 그 이야기를 내게 전해준 사람은, 그녀가 돌아가는 길에서 말했다고 했다.


“몸은 그대로였지만, 이제는 괜찮을 것 같다고. 그리고 안 나아도 괜찮을 것 같다고.”


그녀는 다시 시돈으로 돌아갔다. 병을 이고, 기억 하나를 등에 진 채. 하지만 자신을 비추던 그 눈빛 하나로, 그녀는 오래도록 잊었던 자신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다시 불러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걸 들은 사람도, 묻지 않았다고 했다.


나 역시 그러했다.


나는 그 장면을 오래도록 떠올리곤 한다. 소란한 무리 속에서 조용히 누군가를 바라보던 한 사람과, 그 시선을 받아 울음을 멈춘 한 사람. 말은 없었지만, 모든 것이 오갔다. 이름도, 병의 사연도 없이도

단지 ‘보았다는 것’ 하나로 건너간 위로.


그 둘 사이의 말없는 인사가
어쩌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었을지 모른다.







사람들은 예수를 둘러쌌다. 한 사람이 그의 옷자락을 살짝 만졌고, 누군가는 그의 손등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병이 나았다. 그 광경은 마치 물속에서 돌을 떨어뜨렸을 때 생기는 동심원 같았다. 중앙에 예수가 있었고, 그를 중심으로 물결이 퍼져갔다. 사람들은 그를 만지려 했고, 다가가려 했다. 심지어 그를 보기만 해도 나아지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무슨 힘이 나오는 듯했어요. 설명할 수 없는 기운이 있었어요.”

한 젊은 남자는 마치 빛을 본 사람처럼 말했다.

“내 안에 있었던 어두운 것이, 갑자기 그를 보자 사라진 것 같았어요.”


그때까지 나는 단지 병 낫는 이야기인 줄 알았다. 고통과 증상, 회복이라는 흐름 속에서 벌어지는 익숙한 장면들. 나에게 치유란, 이유를 찾아내고 증상을 완화하고, 눈에 보이는 회복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나는 그런 방식으로 많은 사람들을 도왔고, 그래서 나는 병이 낫는다는 말의 무게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그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은 뭔가 달랐다.

그들은 단지 낫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를 통해, 마치 삶의 무게 자체가 바뀌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통증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고통을 안고도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숨이 트인 것이 아니라, 다시 숨을 쉬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그런 말들을 처음 들었다. 의사로서가 아니라, 사람으로서도 낯선 표현들이었다. 상처가 아물었다는 말보다,


“내 이름을 다시 불릴 수 있게 됐다”는 말이 훨씬 깊고, 낯설게 다가왔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 치유는, 내 손끝으로 측정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열도, 맥도, 상처의 깊이도 아닌, 존재의 회복, 그리고 사라졌던 자신을 되찾는 일.


그들은 예수를 통해 단지 병을 고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열었다.


그날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은, 대부분이 가난한 이들이었다. 손에 잡을 것이 없는 이들, 누군가에게서 위로 한 마디 들을 수도 없는 자들, 그리고 그런 현실에서 아무것도 바랄 수 없게 된 사람들이었다. 그 중심에서 예수는 말했다.


“가난한 사람들이여, 너희는 복되다.”


가난이 복이라니.
누가 봐도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배를 곯고, 날마다 땀으로 하루를 덮으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예수는 말한다. 그들 것이 하느님의 나라라고.


“굶주린 이들이여, 울고 있는 이들이여, 너희는 복되다.”

그의 말은 현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현실 한복판에서 위로를 건넸다. 그 현실이 바뀔 것이라 했고, 그들이 웃게 될 날이 올 것이라 했다. 그 자리에 있던 제자들도 그 말을 들었다. 그들은 스스로 가난을 택한 자들이었다. 가진 것을 놓고 따라나선 자들이었다. 예수는 그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같은 약속을 받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예수는 그저 약한 이들에게만 말을 하진 않았다. 그는 평지에서, 아직 오지 않은 자들, 그러나 듣게 될 이들에게도 말을 던졌다.


“부요한 사람들이여, 너희는 불행하다.”


이 말은 조용한 침묵을 낳았다.

지금 배부르고 웃는 이들, 사람들의 칭찬을 한 몸에 받는 이들에게 경고가 주어진 것이다.


“이미 너희는 받을 위로를 다 받았다.”


그의 말은 단호했다. 이 세상의 위로로 가득 찬 자는, 하늘의 위로를 담을 그릇이 없다는 듯 말했다. 지금 웃고 있는 이들에게는 울 날이, 배부른 이들에게는 굶주릴 날이 올 거라고.


어떤 이는 말했다.

“그분의 말은 불편했어요. 부자들에게만 한 말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한 말 같았거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가 문제가 아니라, 그 부에 안주하는 마음이 문제였으니까. 예수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이제, 내 말을 듣는 사람들아.”


그는 원수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사랑하라고 했다.
저주하는 이들을 축복하라고 했고, 학대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했다. 처음엔 다들 얼어붙었다. 하지만 이내 그 말의 무게가 마음 깊이 스며들었다.


“다른 쪽 뺨을 돌려대라.”
“겉옷을 빼앗거든, 속옷도 내어주어라.”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빼앗는 자에게는 되돌려 받으려 하지 마라.”


그 말들이 입에서 떨어질 때, 평지에 모여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순간 정적이 흘렀다. 공기가 묘하게 떨렸고, 누군가는 잠깐 숨을 멈추기도 했다. 하지만 곧, 그 고요함을 깨뜨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퍼져나갔다.


“그건… 말이 안 되잖아.”
“속옷까지 내어주라고? 그럼 뭐 입고 다니라고?”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시는 거 아냐?”


곳곳에서 작은 웃음이 터졌고, 그중 몇은 조롱에 가까웠다. 고개를 가로젓는 이들, 서로 눈을 마주치며 헛웃음을 터뜨리는 이들, 심지어 뒤를 돌아보며 자리를 벗어나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식이면, 약한 자는 평생 당하란 얘기 아닌가.”

한 남자가 땅에 꿇고 앉아 투덜대듯 말했다. 그의 손은 거칠었고, 목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땀자국이 선명했다. 삶을 버텨야만 했던 사람, 벗겨진 뺨의 기억이 아직 따가운 사람이었다. 그에게 예수의 말은, 견디기 힘든 이상주의처럼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 웅성거림 속에서도, 어떤 이들은 조용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말이 마음을 건드린 듯, 눈을 떼지 못하고 입술을 질끈 다문 사람들이 있었다.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그 자리에 머무는 이도 있었다.


“그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근데…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라면…”

이해와 순종 사이에서 흔들리던 마음들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예수는 한 단어도 덧붙이지 않았다. 말의 여운은 사람들 사이를 천천히 흘렀고, 각자의 마음에 다른 무게로 내려앉았다. 누군가에게는 어리석음으로, 누군가에게는 무모함으로, 그리고 또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삶의 문턱처럼.


그 말은 율법처럼 날카롭지도 않았고,
권위자의 명령처럼 무겁지도 않았다.
오히려 너무도 단순해서 믿기 어려웠고,
너무도 맑아서 붙잡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순간을 기억한다.
그 자리에 있던 어떤 이들은 처음으로 ‘사랑’이 거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시 받지 못해도 주는 것,
이해받지 못해도 품는 것,
바뀌지 않을 사람 앞에서도 시선을 거두지 않는 것— 그 말들이 불가능한 이상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에게도 길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날, 그 말이 처음으로 그렇게 들렸다. 예수는 말했다. 되돌아올 것을 기대하지 말라고.

대갚음을 바라지 말라고.

그저, 주라고.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자녀라고.


그 말은 그날 누구에게나 들렸지만, 정말로 ‘들린 사람’은, 자신의 손을 천천히 가슴 위에 올려본 이들이었다.







그날 예수는, 그렇게 평지에 서 있었다. 높은 곳에서 군림하지 않았고, 안전한 거리를 두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과 함께 서 있었다. 병든 이들과, 가난한 이들과, 눈물 흘리는 이들과, 무시받는 이들 곁에.


그리고 말없이, 그러나 단단하게 이렇게 선언했다.


“하느님은 은혜를 모르는 자에게도 인자하시다. 그러니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나는 그 말을 지금도 곱씹는다. 그때 사람들의 얼굴, 말없이 걸어 나가던 뒷모습, 주저앉아 한참을 떠나지 못하던 이들의 등을 떠올리며, 그 말의 무게를 다시 되씹는다. 그분은 능력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세상의 상식이나 칭찬을 좇지 않았다. 오히려 자격 없어 보이는 사람들, 사랑받을 이유를 스스로도 잃어버린 사람들, 그들을 품어 안으며, “너희가 하느님의 자녀다”라고 말하였다.


그 말은, 사람을 살리는 말이었다. 내가 의사로서 몸의 상처를 치료해 왔다면, 그는 사람의 존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이였다. 나는 오래도록 이 이야기를 남기고 싶었다. 상처 입은 사람들 사이에 서 계셨던 한 사람, 그 손끝에 닿기만 해도 안심하던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자비를 명령하셨던 단 하나의 목소리.


그 말이야말로,
평지 위에 피어난 가장 고요한 혁명이었다.



위의 글은 신약 성경 "누가복음 6:17-36"을 각색해서 쓴 글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성경책을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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