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 용서, 그리고 깊은 뿌리의 이야기
그날, 나는 해안가 평지에 앉아 있던 한 노인을 만났다. 그는 모래에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그리며, 파도가 밀려와 그것을 지우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그는 물끄러미 바다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사람은... 참 쉽게 판단하더군요. 안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일이겠지요.”
나는 잠시 말을 아꼈다. 이 노인도 예수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을 것 같았다. 말투에는 오래된 체념 같은 것이 배어 있었고, 그 체념 위에는 어쩔 수 없이 품어낸 이해 같은 것이 앉아 있었다.
“그는요, 말보다 눈이 먼저였어요. 사람을 볼 줄 아는 분이었지요.”
그 말은 곧, 내가 찾던 질문의 실마리를 던져주었다. 평지로 내려온 예수가 사람들 앞에서 했던 이야기들. 거기엔 이상하리만큼 따뜻한 경고가 있었다. 단죄하지 마라. 비판하지 마라. 남의 눈에 든 티끌을 보려 하지 마라. 그 말들은, 그냥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을 따르겠다 말하는 이들에게 더 깊은 길을 요구했다. 용서하라고. 그냥 넘어가라는 게 아니었다. 그들이 자신을 해칠 때, 험담할 때, 침묵으로 그 고통을 감내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되묻는 식으로 덧붙였다.
“그런 사람에게, 하느님은 너그럽지 않겠느냐고.”
한 여인이 내게 말했던 적이 있다. 예수가 남긴 말 가운데 제일 어렵고도 무서운 것이 ‘용서하라’는 것이었다고. 왜냐하면, 그것은 마치 자신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잘못했다 말하며 끌어안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오래 생각했었다. 예수가 말한 ‘용서’는, 과연 무엇을 의미했을까.
예수는 사람들에게 그저 “착하게 살아라”라고 말하던 이가 아니었다. 그는 사람들이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그 안에서 무너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구체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좋은 나무에서는 좋은 열매가 맺히고, 나쁜 나무에서는 나쁜 열매가 맺힌다.” 누군가가 물었다.
“당신이 말하는 좋은 열매란 뭡니까?”
그는 잠시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입으로 나오는 말, 손으로 하는 행동, 남을 대하는 태도, 그런 것들 말이지. 그건 마음에 있는 게 흘러나오는 거니까.”
누군가 또 물었다.
“그럼 우리가 어떤 나무인지, 그 열매로 알 수 있다는 겁니까?”
예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시덤불에서는 포도가 나지 않고, 엉겅퀴에서는 무화과를 얻을 수 없지 않나. 입으로는 선한 말을 하지만, 마음에 미움이 쌓여 있다면 언젠가는 그것이 드러난다. 사람의 입은 마음의 창고에서 꺼내 쓰는 곳이다.”
그 말은 단순한 교훈이 아니었다. 그는, 단죄하고 정죄하는 이들의 말보다, 그것이 나온 마음의 상태를 보았다. 누군가를 쉽게 미워한다는 건, 이미 그 마음 안에 미움이 오래도록 자리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누군가를 가볍게 판단한다는 건, 그만큼 자기 눈이 흐려져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왜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은 그렇게 잘 보이면서, 너 자신에게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느냐?”
그 말에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말문을 막히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그는 다만, 그들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게 하려 했다. 자신도 모르게 쌓여온 비판과 미움, 교만과 우월감 같은 것들이 얼마나 쉽게 말로 흘러나오고 있는지를 깨닫게 하려 했던 것이다.
멀쩡한 얼굴을 하고 살아가지만, 그 마음속 어딘가에는 들보 하나쯤 안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 예수는 그것을 보았고, 말로 꺼내주었다. 그리고 사람들 스스로가 그걸 인식할 수 있도록 기다렸다. 그는 고쳐주려 들지 않았다. 스스로 꺼내보도록 질문만을 던졌다.
그가 스승이라면, 우리 같은 사람도 따라갈 수 있느냐고 묻는 이가 있었다. 낮은 목소리였지만 그 말엔 두려움과 기대가 함께 실려 있었다. 자신 같은 사람이 과연 그를 따를 자격이 있는지, 아니, 따를 수는 있기는 한 것인지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그가 말한 ‘따른다’는 말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를 다시 생각해야 했다. 예수는 그저 자기 뒤를 따르라고 말하진 않았다. 그의 말은 언제나 ‘나처럼 살아라’는 쪽에 가까웠다. 길을 걷는 것보다, 삶을 바꾸는 쪽으로. 말의 흉내가 아니라, 마음의 결단으로.
그래서였을까. 그는 따르겠다고 말만 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조용히 물었다. “왜 내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느냐?”
그 말을 들은 이는 말문이 막혔을 것이다. 말은 했다. 감동도 받았다. 고개도 끄덕였다. 하지만 일상이 되지는 못했다. 그는 그 지점을 정확히 짚었다. 따르는 건 결심이 아니라 실천이라는 것을. 듣는다는 건 흘려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이 새겨지는 일이라는 것을.
그런 사람에게 예수는 이렇게 덧붙였다.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기초 없이 집을 짓는 이와 같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 그 집은 한순간에 무너질 것이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반대로,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마음 한쪽이 천천히 무너져 내리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무언가를 감동적으로 듣는 일과, 그것을 살아내는 일 사이엔 큰 거리가 있다는 걸,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말의 무게는 귀로 듣는 데서 생기지 않는다. 그 말을 따라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비로소 삶에 실려서 드러난다.
그날 나에게 그런 말을 전한 이는, 손에 못자국처럼 깊게 갈라진 흔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삶이 말보다 깊어 보였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듣고 감동받은 적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감동이 지나고 나면, 원래 살던 대로 돌아가더군요. 그래서 이제는… 그 말을 살기 전까진, 감동도 조심하려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동은 때로 그 자체로 우리를 속이기도 한다. 다 들은 것 같지만, 실은 살아본 적은 없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그렇게 조심스럽고도 단호하게 말했다.
“실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 말은 회초리 같지 않았다. 오히려 깊은 울림이었다. 말과 행동이 갈라져 있는 우리 안의 틈을 꿰뚫는 듯한 침묵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대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그 마음 안을 들여다보게 했다.
내가 만난 또 한 남자는, 평생을 배 밑창에서 고기 그물을 손질하며 살아온 이였다. 그에게 예수의 말 중 기억에 남는 게 있느냐고 묻자, 그는 대답 대신 손바닥을 펴 보였다. 손가락 마디마디에 굳은살이 박여 있었고, 몇몇 상처는 아직 덜 아물어 있었다.
“그분은요…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고 하셨죠.”
“그게 무슨 뜻이었을까요?”
내가 묻자 그는 천천히 대답했다.
“그냥 아무 데나 짓는 사람도 있거든요. 모래 위에. 겉은 그럴싸하지요. 기초는 없고요. 비 오고 바람 불면, 한순간이더라고요. 무너져요.”
그는 한참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덧붙였다.
“근데… 반석은 깊이 파야 나와요. 웬만한 마음으로는 못 짓지요.”
그 말이 마음에 박혔다. ‘깊이 파야 한다.’ 그의 말은 곧 예수의 말이기도 했다. 그는 단지 건물을 말한 것이 아니었다. 마음을 짓는 일이었다. 관계를 세우는 일이었다. 어떤 말보다 중요한 건 그 안에 숨은 진심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말했다. ‘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예수를 따르겠다는 사람들은 많았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듣고 마음 깊이 뿌리내리기 위해 자신을 판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사람들은 종종 외면을 꾸미는 데 익숙했고, 말로 사람을 설득하려 들었다. 그러나 예수는 달랐다. 그는 말보다 행동을 먼저 두었고, 눈보다 마음을 먼저 보았다.
그날, 나는 평지에 앉아 있던 노인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당신은 예수의 말 중 무엇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까?”
그는 잠시 바다를 바라보더니,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비판하지 마라’는 말이지요. 그 말이 왜 이렇게 오래 남는지 모르겠네요. 살다 보니, 결국 그 말이 가장 어렵더라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예수의 가르침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그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단지, 더 깊은 마음을 요구했을 뿐이다. 남을 고치려 들기 전에, 내 안의 들보를 먼저 보는 일. 누군가를 판단하기 전에, 그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돌아보는 일. 그렇게 사는 것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일이라면, 그건 단순히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의 피난처가 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나는 천천히 노인 곁을 떠났다. 파도가 다시 밀려와, 그의 손가락으로 그린 무언가를 또 한 번 지우고 있었다. 지워진 자리에는 아무런 자국도 남지 않았지만, 그 마음은 어디 깊은 곳에 단단히 새겨졌으리라 믿고 싶었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고, 또 오래도록 기억했다. 하지만 그 말이 삶에까지 닿은 경우는 드물었다. 말은 머무르지 않는다. 들리는 순간 흩어지고,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진다. 그래서 그는 ‘듣는 일’에 그치지 말라고 했다. ‘살아내라’고 했다. 판단보다 먼저 긍휼을, 정죄보다 먼저 기다림을, 자기변호보다 먼저 자기를 살펴보는 일을 말이다.
나는 그날 들은 이야기들을 천천히 되새긴다. 비판하지 말라는 말이 단지 관용을 권하는 문장이 아니었다는 걸, 용서하라는 말이 단지 착한 사람처럼 보이라는 뜻이 아니었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사람의 마음을 알고 있었고,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 결국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꿰뚫어 보았다. 말은 마음의 창고에서 나온다고 했고, 그 창고에 무엇을 쌓느냐에 따라 삶의 향기가 달라진다고 했다. 결국, 누군가를 향한 말보다 중요한 건, 그 말이 어떤 마음에서 나왔느냐는 것이었다.
한 여인은 말없이 용서를 택했다. 한 남자는 반석을 찾기 위해 깊이 땅을 팠다. 그들의 선택이 다 옳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예수는 그런 이들의 마음을 귀하게 여겼을 것이다. 말보다 삶으로 믿음을 드러낸 사람들. 판단하지 않고 기다렸고, 미워하지 않고 품으려 했으며, 겉보다 속을 먼저 닦아낸 사람들이었다.
예수는 한 번도 자신을 따르라고 큰소리로 외친 적이 없다. 오히려 따르겠다고 말한 이들에게 더 조용히 물었다.
“왜 나의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느냐?”
그 말에는 나직한 슬픔과 함께, 여전히 열려 있는 문이 함께 담겨 있었다.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평지에서 사람들을 앉혀두고, 낮고 단단한 말들을 하나씩 꺼내놓았다. 사람들의 귀보다, 마음을 향해 던진 말들이었다.
나는 여전히, 그의 말들을 듣고 기록하는 사람일 뿐이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그 말들 중 어떤 것은 너무 이상적이고, 어떤 것은 너무 버겁다고. 나 역시 때때로 그렇게 느낀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는 삶의 기초를 어디에 둘 것인가를 물었던 사람이었다. 기초 없이 지어진 집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를, 잘 알고 있었던 이였다.
말보다 마음을, 감정보다 실천을, 그리고 심판보다 긍휼을 먼저 말했던 사람. 나는 그를 따르지는 않았지만, 그를 따랐던 이들의 삶을 따라가며, 그 말들이 어떻게 뿌리내리고 열매 맺었는지를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조용히 묻는다. 나는 지금, 어디에 내 마음의 집을 짓고 있는가.
위의 글은 신약 성경 "누가복음 6:37-49"을 각색해서 쓴 글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성경책을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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