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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26 - 내가 아는 예수는 달랐어요

기대와 현실 사이에서 다시 묻는 이름

by 나그네 한

그날 나는 오래전 갈릴리에서 들은 이야기로부터 시작해 보기로 했다. 조금은 슬프고, 조금은 복잡한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건넨 이가 있었다. 그는 나직하게 말했다.


“요한이 사람을 보냈습니다. 감옥 안에서였어요.”


그 말을 듣고 나는 그가 전하려는 이야기를 바로 짐작했다. 요한. 광야의 외침. 메마른 땅에 울리던 회개의 소리. 그를 기억하지 못할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 요한이, 지금 예수에게 사람을 보냈다? 그건 놀라운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 더 놀라운 건 질문이었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나는 그 질문을 받아 적고 나서 한참을 멈추었다. 무슨 뜻일까. 그 질문이 의미하는 바는 뚜렷했다. 의심. 광야에서 목소리를 높였던 그 사람, 사람들을 물가로 불러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던 그 사람. 하느님의 나라를 준비하라 외쳤던 그 사람이 지금, ‘정말 맞냐’고 묻고 있었다.


누군가는 실망했다고 했다.


“요한답지 않아.”


광야에서 그의 외침을 들었던 한 남자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사람, 예수가 오는 걸 보고 ‘보라,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 외쳤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맞냐고 묻는다니... 이해가 안 돼.”


또 다른 이가 중얼거렸다.


“기다리던 그가 왔는데, 정작 요한은 확신하지 못했나 봐. 혹시 감옥에 오래 있으니 마음이 흔들린 건 아닐까?”


사람들의 말은 흩어졌지만, 한결같이 낯설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요한은 늘 분명한 사람이었다. 회색이 없는 사람. 광야에서 혼자 외쳤고, 두려움 없이 왕을 꾸짖었으며, 정의를 위해 스스로 거친 삶을 택한 자였다. 그런 요한이 지금, 예수에게 묻는다니. 모두의 눈엔 예상 밖이었다.


나는 그 질문을 조금 다르게 느꼈다. 어쩌면 요한은 실망한 것이 아니라, 혼란스러웠던 것 아닐까. 자신이 알고 있던 메시아의 얼굴과 눈앞의 예수가 너무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요한은 언젠가 강가에서 예수를 보았다. 그때도 그의 눈빛은 흔들렸다. ‘지금 이분이 맞는 걸까...?’ 하지만 그는 곧 외쳤다.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확신이라기보다는... 믿음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렀고, 요한은 감옥에 갇혔다. 바깥세상은 계속해서 예수의 소문으로 들썩였지만, 정작 들려오는 이야기는 다정한 목소리, 병든 이들과 함께하는 식사, 죄인들과의 동행, 그런 것들이었다.


“그분이 그렇게 말씀하셨다고요? 심판이 아니라... 사랑이라고요?”


어떤 이는 요한이 예수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떨구었다고 했다. 그의 마음속엔 오래전 선지자들의 말이 울리고 있었을 것이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이고, 불이 타오르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를 그날. 그런데 지금 들려오는 예수의 모습은... 너무 부드럽고, 너무 조용했다. 마치 재판장이 아니라, 위로하는 자처럼. 요한은 그 틈에 질문을 던진 것이다. 진심으로 묻고 싶었던 말. 내가 기다리던 이가 정말 당신입니까, 아니면 또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그건 단지 예수를 몰라서가 아니라, 자신이 알던 모든 예언과 기대를 내려놓는 질문이었다. 나는 그 마음을 오래 바라보게 되었다. 선포하는 자도 의심할 수 있다. 흔들림 없는 사람도 물을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신앙은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간다.


그때 예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날도 병자들을 고치고 있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이에게 손을 얹고, 말 못 하는 이의 입을 열어주고, 귀가 닫힌 이에게 속삭였다. 어떤 이는 죽음에서 돌아왔고, 어떤 이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 기적의 시간들 한가운데, 예수는 고개만 돌려 말했다.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전해라.”


그 말속에는 설명이 아니라 보여주려는 마음이 있었다. 사람들은 늘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을 믿는다. 그래서 그는 병자들과 함께 있었고, 손으로 만지고, 침묵 속에서 눈빛으로 응답했다. 나는 그 말을 받아 적으며 문득 마지막 구절을 놓치지 않았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하다.”


그 말은 요한을 향한 위로이자 동시에 경계였다. 믿음이란 언제나 흔들릴 수 있고, 선입견이 깊으면 눈앞의 진실조차 흐리게 보인다. 요한조차도. 그러니... 나 같은 자는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더욱 침착하게 그 대답을 마음속에 새겼다.






요한의 제자들이 돌아간 뒤, 예수는 잠시 그 자리를 둘러보았다. 모여든 사람들은 대부분 한때 요한의 세례를 받았던 이들이었다. 어떤 이들은 먼 길을 걸어와 광야의 먼지 속에서 그의 외침을 들었고, 어떤 이들은 줄을 서서 물속에 들어갔었다. 예수는 그들에게 물었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었느냐?”


그는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했다. 흔들리는 갈대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었느냐, 아니면 예언 자였느냐. 그리고 마침내 말했다.


“그는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 순간 예수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동시에 조용했다. 마치 어떤 오랜 진심을 꺼내는 사람처럼. 그는 성서의 문장을 인용했다. 메시아보다 먼저 보내는 일꾼, 그가 갈 길을 준비할 자. 세례자 요한은 그 ‘먼저’의 사명을 지닌 이였다. 이스라엘이 침묵하던 시간 동안, 다시 불붙은 불꽃같던 존재였다. 나는 그 말을 따라가며 구절을 적어 나갔다. 그러다 문득 멈췄다. 예수가 말했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사람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크다.”


그 말은 사람들 사이에 묘한 정적을 남겼다. 가장 큰 자. 그러나 가장 작은 자보다 작게 될 수밖에 없는 사람. 예수의 말은 찬양처럼 들렸지만, 그 안에는 또렷한 한계선도 있었다. 요한은 문턱까지는 이르렀다. 그의 발자국은 하느님의 나라 바로 앞에까지 닿았지만, 문은 아직 닫혀 있었다. 그 문이 열릴 순간, 그는 이미 뒤로 물러나야 할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어떤 이는 입을 가리고 속삭였다.


“요한이 문지기였던 거야. 길을 열고도, 안엔 들어가지 못한...”


그 말에 맞은편에서 누군가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그가 없었더라면 우린 이 자리에 없었을 거야.”


그날, 사람들 중엔 눈물을 훔치는 이들이 있었다. 회색 옷을 입은 중년 남자가 조심스레 눈을 닦았고, 그의 옆에 앉은 젊은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한때 세리의 집에 종으로 일했고, 광야에서 요한의 설교를 들은 뒤 주인을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고 했다. 그들 모두는 요한의 물가 세례를 통해 처음 ‘돌이킨다’는 말을 배운 이들이었다.


“그가 말했었죠.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였다고... 나는 그때 내 이름을 들은 줄 알았어요.”


누군가 그렇게 말하며 무릎 위에 깎은 손을 꼭 쥐었다. 그들은 예수의 말을 조용히, 그러나 깊이 받아들였다. 자신들의 출발점이 바로 요한이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요한은 그들에게 물로 길을 열어주었고, 예수는 지금 피와 땀으로 그 길을 걷고 있었다.


하지만 반응이 모두 같지는 않았다. 마른땅을 밟는 듯한 소리와 함께 몇몇 사람들이 조용히 자리를 떴다. 검은 끈으로 두른 머리와 옷자락을 단정히 정리한 남자들.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그 자리에서도 약간 떨어져 있었다. 예수가 요한을 높이고, 다시 그보다 더 큰 이를 하느님의 나라에 두었다고 말하자, 그들의 눈빛은 차가워졌다.


“이 사람들 중에 누가 요한보다 낫다는 거지?”


한 율법학자가 옆 사람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세례 한 번 받았다고, 말 몇 마디 들었다고, 그게 그렇게 큰 자가 되는 길인가?”


그들은 마음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는 사람들이었다. 율법 조항, 의무, 전통. 요한은 경계선에서 불편한 인물이었고, 예수는 그 불편함을 더 깊이 파고들었다. 그들에게 요한은 인정받지 못한 자였고, 예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자였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이 자신들에게 있다 믿었기에, 자신에게 돌이키라 말하는 자들을 불편해했고, 그래서 고개를 돌린 것이다.


그날 나는 그 모든 반응들을 기록해 두었다. 받아들이는 자와 돌아서는 자, 고개를 끄덕이는 자와 고개를 젓는 자. 같은 말을 듣고도 그렇게 갈라지는 모습이 내게는 낯설고도 뼈아픈 현실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자리였는지도 모른다. 누구는 물러나고, 누구는 들어서는 그 문 앞에서.









그리고 예수는 말했다. 마치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시작하듯. 그러나 너무나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유할까?”


예수는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 이야기를 꺼냈다.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곡을 해도 울지 않는 아이들.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퍼졌다. 모두가 아는 장면이었다. 시장 끝자락, 비탈진 돌길 옆에선 아이들이 자주 모여 놀았다. 큰 돌 하나를 가운데 두고, 편을 나눠 서로를 향해 고함치던 모습.


“우리 피리 불었잖아, 너네 왜 안 춤춰?”


“우린 곡했단 말이야, 왜 아무도 안 울어?”


아이들은 자기들이 정한 규칙이 어겨지면 발을 동동 굴렀고, 상대편이 장단을 맞춰주지 않으면 금세 싸움이 벌어졌다. 그런 아이들 모습을 예수가 비유로 들자, 사람들은 웃었지만 곧 웃음을 거뒀다. 예수는 그 모습에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을 겹쳐 말한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장터에서 늘 중심에 서 있으려는 아이들처럼, 그들 또한 중심이 되려 했다. 자신들의 방식, 자신들의 규칙 안에서만 모든 걸 판단했다. 그런데 그 방식은 언제나 일관되지 않았다.


“요한이 와서 빵도 안 먹고 포도주도 안 마시니 미쳤다고 하고, 내가 와서 함께 먹고 마시니 술주정뱅이라 하고, 죄인들과만 어울린다 하고...”


그 말이 끝났을 때, 나는 숨을 고르게 됐다. 그 순간이 불편했다. 비판의 기준은 명확한 게 아니었다. 회개의 외침이 거슬렸고, 죄인들과 식탁을 함께하는 것도 못마땅했다. 한쪽 끝에서는 너무 거칠다 하고, 다른 쪽 끝에서는 너무 물렀다 했다. 어느 누구도 마음을 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모든 평가가 결국 자기 입맛에 맞추어졌고, 자기 기대에 따라 누군가를 판단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한 장면을 떠올렸다. 며칠 전 들었던 이야기였다. 어떤 바리새인이 요한의 제자 하나를 붙잡고 물었다고 한다.


“네 스승은 왜 그렇게 까칠하냐? 빵 한 조각도 안 먹고, 술 한 방울도 안 마신다고 하더라. 그건 좀 이상한 거 아니냐?”


며칠 뒤엔 또 다른 말이 돌았다.


“그 예수라는 자는 술도 너무 잘 마시고 너무 아무나랑 어울리잖아. 세리들하고도 같이 밥 먹는다며?”


이야기는 서로 충돌했다. 어느 누구도 예수나 요한이 누군지를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들의 틀에 맞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 불편한 사람으로 치부해 버렸다.


예수는 말없이 장터의 아이들을 비추었지만, 그 말은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을 겨냥하고 있었다. 피리를 부는 사람은 늘 다른 누군가가 춤추길 바란다. 곡을 하는 사람은 누군가 대신 울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정작 자기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슬퍼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았다. 중심이 되고 싶어 했지만, 그 중심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 말이 내 가슴 한편을 파고들었다.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은 그렇게 산다. 이해하지 못하면서 단정하고, 듣지 않으면서 말한다. 결국 그들은 예수도, 요한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둘 다 틀렸다 말했지만, 실은 둘 다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장면을 마음 깊이 새겨둔다. 말이 아니라, 마음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러나 지혜는, 그 자녀들에 의해 옳음이 드러난다.”


예수의 마지막 말이었다. 진리는 말이 아니라, 그것을 살아가는 자들로 증명된다는 말. 그리고 나는 그 말에 오래 머물렀다. 지혜란 아마, 요한처럼 광야에서 외치는 용기일 것이고, 예수처럼 병자 곁에 머무는 인내일 것이다. 피리를 불지 않아도 춤추고, 곡하지 않아도 울 줄 아는 마음일 것이다.



"나는 오늘도 그 마음을 글로 옮기려 한다."


어쩌면 믿음이란, 요한의 질문에서 시작해 예수의 침묵을 바라보며, 다시 돌아오는 그 기다림의 길이 아닐까. 그렇게 우리는 또 한 걸음,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예수는 말보다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 침묵 속에 감춰진 이해,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 조용한 걸음. 누구나 알아보는 방식이 아니라, 누구나 놓칠 수 있는 방식으로 다가오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요한은 질문했고, 사람들은 흔들렸고, 누군가는 돌아섰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예수를 따라간 사람들의 얼굴엔 깊은 평온이 남아 있었다. 확신이라기보다는 신중한 고백 같은 표정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건 늘 단순했다. 설명이 아니라 기억이었다.


“그가 내 곁에 있었다.”


“그가 지나치지 않았다.”


누구는 맹인이었고, 누구는 세리였고, 누구는 죄인이라 불렸지만, 그들의 말에는 어떤 공통된 감정이 스며 있었다. 외면당하지 않았다는 감각. 말없이 인정받았다는 기억.


믿음은, 아마 그 지점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명확해져서가 아니라, 더 이상 외면당하지 않는다는 확신에서. 그래서 나도 오늘, 또 한 줄을 적는다. 이 길을 걸었던 이름 없는 이들을 따라. 이해할 수 없어도 묻고, 다 알지 못해도 걸어간 이들의 흔적을 따라. 하느님의 나라는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질문과, 아무도 소리 내지 않은 고백들 속에서.




위의 글은 신약 성경 "누가복음 7:18-35"을 각색해서 쓴 글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성경책을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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