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우리도 길가와 바위를 지나, 결국 그의 등불 아래 설 수 있을지도
그는 천천히 걸었다. 도시와 마을, 들판과 길목을 지나며 누구라도 만날 수 있는 자리에 서 있었다. 그가 지나간 자리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어떤 이는 소문을 따라왔고, 어떤 이는 고통을 안고, 또 어떤 이는 희망 없이 끌려오듯 따라왔다.
나는 갈릴리 북쪽의 작은 마을에서, 그가 지나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마을 광장에 모인 이들 중 몇은 멀리서 온 사람이었고, 몇몇은 병든 이를 데려온 가족들이었다. 바닷가 어귀에서 만난 한 남자가 조용히 내게 말했다.
“그 사람 말이지, 그분은 무리를 뚫고 걸어가시더라고. 아무도 모른 척하지 않으셨어요. 병든 아이, 불편한 노인, 눈빛 흐린 여자까지 다 보고, 말을 거셨어요.”
나는 그 장면을 상상했다. 마치 어두운 골목마다 등을 하나씩 켜는 사람처럼.
불이 퍼지면, 그 앞에 숨겨진 얼굴들이 드러난다. 그리고 어떤 눈빛은 그 빛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얼굴은 고개를 돌린다.
그가 가르쳤던 말 중 하나는 ‘씨 뿌리는 자의 이야기’였다. 농사를 지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큼 익숙하고 단순한 이야기였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여졌다. 그는 말했다.
“씨를 뿌리러 나간 사람이 있었다.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져 발에 밟히거나 새에게 먹혔고, 어떤 씨는 바위 위에 떨어져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말라버렸다. 또 어떤 씨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져 숨이 막혔고, 그러나 어떤 씨는 좋은 땅에 떨어져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사람마다 하느님의 말을 듣고 반응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듣고도 마음에 남기지 못하는 사람, 기뻐하다가 어려움이 오면 주저앉는 사람, 세상 걱정과 욕심에 눌리는 사람, 그리고 마음에 새기고 조용히 견디는 사람. 그는 그런 이들을 위해 이야기했다. 좋은 땅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어떤 이는 그 이야기를 듣고 웃었다.
“에이, 밭을 가는 사람은 다 알지. 길가에 뿌리면 안 된다는 걸.”
하지만 또 다른 이는 고개를 숙였다.
“나는... 늘 길가 같았어요. 뭐든 듣기는 하는데, 그게 마음 안에 남질 않아요. 누가 말해도, 늘 지나가요. 잡히질 않아요.”
씨가 길가에 떨어졌다는 말, 나는 그 말이 처음엔 그저 이야기인 줄 알았다. 하지만 몇 날 며칠, 다른 사람들의 말을 모으고 나서야, 그 말이 곧 사람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이야기는 어떤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조용히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는 바위처럼 단단한 사람이었고, 누군가는 가시덤불 속에 갇힌 사람이었다. 겉으로는 모두 열심히 듣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듣는 사람 안의 ‘속’을 비추는 빛이기도 했다.
“나도 그날 들었어요. 길가 얘기, 바위 얘기, 가시덤불 얘기, 그리고 마지막에 좋은 땅 얘기.”
그렇게 말하던 중년의 여자는 말을 이었다.
“근데 말이에요, 좋은 땅이라는 건 그냥 좋은 사람이란 뜻이 아니더라고요. 그건 기다리는 사람이었어요. 듣고, 품고, 때를 기다리는 사람.”
그녀는 예전에 한 아이의 어머니였다고 했다. 아이가 태어났지만 병이 깊어 늘 울음 속에서 살았고, 병자를 고친다는 이가 있다면 어디든 찾아갔다고 했다. 그중 몇은 돈을 요구했고, 몇은 침묵으로 돌려보냈다.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그때 난, 가시덤불이었어요. 희망도, 믿음도 자랄 수가 없었죠.”
하지만 어느 날, 그가 지나갔고, 그녀는 그 무리 끝에서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고 한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아이에게 손을 얹었다. 아이는 곧 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그날 이후, 그를 따라다녔다고 했다.
“나는 돈이 없었어요. 그런데도 그 사람, 나를 떼어내지 않더라고요.”
그녀는 다른 여자들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막달라라는 여자, 요안나, 수산나...
막달라는 한때 일곱 귀신에 시달렸던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멀리했고, 그녀 스스로도 자신을 감췄지만, 그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고 고요하게 다가갔다고 했다.
요안나는 왕궁 가까이에 살았던 여인이었다. 헤로데의 신하인 구사의 아내였던 그녀는 권력과 사치 속에 있었지만, 마음은 늘 외로웠고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녀는 남편이 섬기던 권력 안에서 세례 요한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고, 그 이후 마음이 무너졌다고 했다.
수산나는 사람들 사이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병이 깊었던 적이 있다고 했다. 몸뿐 아니라 마음도 약해져 사람들 틈에 끼지 못하던 때, 그가 그녀를 불러 세웠고, 그녀는 다시 살아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그들 모두, 한때는 보이지 않는 벽 안에 갇힌 삶을 살았지만, 지금은 그를 위해 가진 것을 내놓으며 함께 걷고 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문득 생각했다. 그는 왜 여인들과 함께 다녔을까?
당시 많은 선생들이나 예언자들은 여인을 제자로 삼지 않았다. 여인들은 보통 이야기를 듣는 자리에만 머물렀고, 앞자리에 앉을 수도, 질문을 던질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들과 함께 걸었다. 그들의 이름을 불렀고, 함께 식사했고, 함께 피곤을 나눴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이 받아낸 자비를 그대로 살아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걷게 된 사람은, 그 길을 스스로도 걷고 싶어 졌던 것일까. 그의 말 한마디, 손길 하나로 다시 살아나듯 일어난 이들은, 그와 함께 걷는 것이 삶을 지켜내는 유일한 길이라고 여겼을지도 몰랐다. 어떤 이는 그 길 위에서 다시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또 어떤 이는 아직도 어딘가에 있을 또 다른 어둠 속 사람들을 위해 함께한 것 아닐까. 그들과 동행하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함께 걷는 것’이 단지 도움의 자리가 아니라, 새로운 삶의 자리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여인들은 단순한 조력자가 아니었다. 그들 안에는 ‘들음’이 있었고, ‘기다림’이 있었고, 무엇보다 ‘감사’가 있었다. 그 감사는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것이었다. 한 번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분이요, 말씀하실 때마다 눈을 보셨어요. 누구의 눈도 피하지 않으셨어요. 말로 이해 못 해도, 눈으로 전해지는 게 있었어요.”
나는 다시 씨 뿌리는 이야기로 돌아갔다. 길가, 바위, 가시덤불, 좋은 땅. 이 비유는 단지 네 종류의 사람을 분류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누구든 그 네 단계를 모두 지날 수 있음을 말해주는 듯했다.
어떤 날은 길가 같고, 어떤 날은 바위 같고, 또 어떤 날은 가시덤불 같지만, 마음을 다잡고 다시 돌아오는 이들에겐 결국 좋은 땅이 될 수도 있다는 것.
그는 그런 사람들을 찾고 있었던 것 같다. 잘난 사람, 똑똑한 사람, 흔들림 없는 사람이 아니라, 언젠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이야기 끝에 그는 또 다른 말을 했다고 들었다.
“등불을 켜고 그걸 숨기지 마라. 그것은 드러나기 위해 있는 것이다.”
나는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누구도 자신의 등을 켜고 그걸 침대 밑에 두진 않는다. 등을 켠다는 건, 뭔가를 비추기 위함이고, 함께 보기 위함이다. 그는 사람 안에 있는 빛을 말한 것일까. 마음속에 비친 진실이나 믿음 같은 것을 감추지 말고, 세상 가운데 드러내라는 뜻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네가 들은 것을, 네가 본 것을 그냥 두지 마라. 그건 숨기라고 준 게 아니다.”
그의 말은 언제나 사람을 향해 있었다. 등불처럼, 누구도 홀로 어둠에 남지 않도록.
그의 이야기는 그랬다. 처음엔 수수께끼 같고, 쉽게 풀리지 않았지만, 그 이야기를 마음에 품고 있다 보면 어느 순간 빛처럼 비추어졌다. 그리고 사람들은 조금씩 자신 안의 어두움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를 찾아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사람들 속을 지나오려 했지만 너무 많은 무리로 인해 만나지 못했고, 누군가 그에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서 계십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지키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어떤 이들은 그가 가족을 부정한 것처럼 여겼다.
얼굴을 찌푸리며 “어머니가 밖에 와 계시다는데, 어떻게 저럴 수 있지?”라며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또 어떤 이들은 놀라움에 말을 잇지 못했다. “가족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건가?” 하는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가만히 듣고 있던 몇몇은 고개를 끄덕였고, 눈빛이 달라졌다. 마치 무언가를 이해한 듯, 더 가까이 다가갔다. 나는 그때 그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그는 가족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경계를 넓히고 있었던 것이다. 피보다 더 깊은 유대, 말보다 더 무거운 실천을 통해 묶이는 가족.
그는, 그런 가족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예수가 누구인지 다 안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그의 이야기를 들려준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 순간 그에게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길 위의 씨앗처럼 무작정 던져진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좋은 땅을 기다리는 이었고, 마음이 굳고 닫힌 사람조차 언젠가 다시 반응할 수 있으리라 믿으며, 등을 켜는 사람이었다.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려면, 그 사람이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를 보면 된다고 했다. 그는 늘, 상처 입은 사람을, 외면당한 사람을, 조용히 기다리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길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달라졌다고 했다.
그 변화는 크고 눈부신 것이 아니었다. 그저 조금 더 숨을 쉬게 되었고, 조금 덜 움츠러들게 되었고, 아주 조금 더, 앞으로 걸어갈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믿는다.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그 빛을 따라 걷는 사람들의 삶에서, 분명 무언가가 바뀌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위의 글은 신약 성경 "누가복음 8:1-21"을 각색해서 쓴 글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성경책을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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