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끝에 찾아온 이름 없는 희망
가버나움은 언제나 사람들의 소리로 가득 찬 도시였다. 어시장 골목에서는 새벽에 잡힌 생선을 흥정하는 외침이 이어졌고, 언덕 아래 상점가에서는 어린아이들이 돌을 차며 뛰어다녔다. 바닷바람은 골목마다 쌓인 먼지를 실어 나르며, 가끔은 들려선 안 될 속삭임들까지 전해주곤 했다. 누군가의 병이 깊어졌다는 말, 로마 병사들이 지나치게 술을 마셨다는 소문, 회당 앞 나무가 바람에 부러졌다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들은 짐짝처럼 도시를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그날도 비슷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목소리에 섞인 감정은 무언가 달랐다. 수군거림이 아니라, 마치 웅성거림이었다. 사람들은 흥분보다는 경외심에 가까운 표정으로 같은 이름을 반복하고 있었다.
“예수.”
그리고 그와 함께 또 하나의 이름이 자주 등장했다.
“백부장.”
그 이름은 놀랍게도 존경을 담아 불렸다. 로마 제국의 군인이며, 유대 사람들에게는 흔히 경계의 대상이 되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에 대해 말하는 이들의 입가에는 은근한 감탄이 섞여 있었다. 누군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사람... 참 이상한 로마인이었어요. 우리한테 잘해줬고, 종한테도 더 잘했죠.”
그 백부장은 이방인이었고, 군대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지휘관이라기보다는 무너진 삶을 일으키려는 이의 것에 가까웠다. 가버나움에 회당을 짓는 데 기꺼이 자신의 재산을 내놓았다고 했다. 그곳 사람들은 그를 ‘도움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 표현했다. 대개는 로마 관리가 지역 유대인을 도와준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는 사람들의 믿음을 얻은 사람이었다.
그의 종이 병에 걸렸을 때, 그는 지체 없이 예수를 찾았다. 사람을 보내어 말하게 했다.
“그분을 좀 모셔와 주십시오. 내 종이 죽게 생겼습니다.”
그는 애원하지 않았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분’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걸 알아챈 듯했다.
예수가 그의 요청을 듣고 실제로 그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백부장은 또 다른 사람을 보냈다. 이번엔 뜻밖의 말이었다.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당신을 제 집에 모실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그 말씀으로 충분합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예수가 그 자리에 멈춰 섰어요. 정말... 갑자기요. 뭔가 생각에 잠기신 듯했고, 그 뒤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어요.”
그가 그렇게 멈춘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늘 주도적으로 움직이던 사람이었고, 누군가의 말에 그렇게 오래 반응 없이 서 있던 모습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그에게 무언가 진심이 전해졌던 것 같다고—누군가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백부장의 말은 단순한 예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삶 전체가 녹아든 판단이자 결심이었고, 오랜 시간 자신이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왔는지를 말해주는 한 문장이었다. 그는 명령과 복종의 구조 속에서 오래 지낸 사람이었다. 상관이 부르면 즉시 움직이고, 자신도 누군가를 움직이게 만들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에게 ‘말’은 곧 ‘결과’를 불러오는 도구였고, 말에 권위가 실릴 때 세상은 달라진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이번엔 예수에게서 그 절대적인 권위를 본 것이다. 말 한마디로 병이 물러나고, 말 한마디로 생명이 돌아올 수 있다는 것. 백부장은 그걸 믿고 있었다. 아니, 믿으려 애쓴 것이 아니라—이미 알고 있었던 듯 말했다.
그는 예수도 그런 분이라고 여겼다. 몸은 여기 있지만, 말은 거기까지 닿을 수 있는 사람. 말이 도달하면, 그것이 곧 현실이 되는 사람. 손짓 하나 없이도, 거리와 시간의 경계를 넘어, 무너진 몸과 닫힌 생명을 다시 여는 사람.
예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이런 믿음은 본 적이 없다.”
그 말은 칭찬이라기보다는, 놀라움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자리에서 진실을 발견했을 때 나오는 목소리. 예수는 백부장의 말속에서 단순한 신뢰가 아니라, 본질을 꿰뚫는 인식을 보았다. 그의 집에 가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보지도 않았다. 다만 말이 오갔다. 그리고 그 말이 생명을 건드렸다.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고, 약도 쓰이지 않았다. 종은 나았다. 말 하나로 충분했다.
며칠 후 또 다른 곳에서 들은 이야기는, 더욱 깊은 곳으로 이어졌다. 그곳은 갈릴리 남쪽의 작은 마을, 나인. 이름처럼 조용하고, 오래된 삶이 묻어 있는 곳이었다. 그날, 마을 성문에서 한 장례 행렬이 나오는 걸 예수가 마주했다.
“그날... 다들 조용했어요. 그 여자가 너무 크게 울어서, 오히려 아무도 말을 못 하겠더라고요.”
울고 있던 여인은 과부였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그 아들 하나로 모든 시간을 버텨낸 사람이었다. 단지 감정적인 의지처가 아니라, 삶 그 자체를 지탱하던 존재였다. 당시 여자에게 남편과 아들은 곧 사회적 안전망이었다. 남편이 없으면 아들에게 기대어 살아가야 했고, 아들마저 없으면 삶은 곧 생존의 경계로 밀려났다. 그 여인의 울음은 단순한 상실이 아니라, 이제 어디에도 기댈 수 없다는 절망의 몸부림이었다.
관을 따라가던 사람들은 그녀를 위로하려 애썼지만, 누구도 진심으로 다가가진 못했다. 그런 고통 앞에선 조심스러움도, 거리낌도 생기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예수는 달랐다. 그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누구도 이름조차 부르지 않았던 그 여인에게, 곧장 걸어갔다.
그리고는 단 한마디를 건넸다.
“울지 마라.”
그 말이 과연 위로였는지, 선언이었는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분명한 건 그 말에 담긴 눈빛이었다. 누구도 선뜻 말할 수 없었던 그 한마디를, 그는 망설임 없이 꺼냈다. 마치 그 여인의 눈물에 오래전부터 마음이 있었던 사람처럼.
그는 그 말을 던지고 멈추지 않았다. 관 가까이로 걸어갔다. 그곳에 다가가는 것은 단순한 동정이나 용기가 아니었다. 당시의 규례상, 죽은 자를 만지는 건 곧 부정함을 떠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들 것 같은 관에 손을 댔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젊은이야, 일어나라.”
그 순간, 움직일 줄 몰랐던 젊은이의 가슴이 미세하게 들썩였다. 처음에는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죽음의 침묵이 짙게 깔린 공간 속에서, 작고 느린 움직임은 오히려 착각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그의 손가락이 떨렸고, 가슴이 한 번, 두 번, 더 확연하게 오르내렸다. 관 가까이에 있던 몇 사람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을 크게 떴고,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젊은이의 눈이 열렸다. 고요했던 눈동자가 빛을 받아 깜빡였고, 입술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메마른 입에서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은 숨을 멈췄다. 마을 사람 중 몇몇은 그대로 주저앉았고, 어떤 이는 옷자락을 움켜쥐며 뒤로 물러났다.
두려움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이 사람들의 감각을 마비시켰다. 그들은 놀라움과 공포, 경외와 혼란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그 복잡한 감정을 어찌할 수 없었다. 누군가는 두 손을 하늘로 들어 올렸고, 또 누군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누구 하나 소리치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같은 질문이 맴돌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 눈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 두려움은 단지 기괴한 장면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쩌면, 그들이 지금 막 신성한 영역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감각 때문이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장면은 단지 충격적인 사건이 아니라, 이 세상의 질서 바깥에서 무언가가 작동하고 있다는 징후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선 사람—예수—그는 이제 단순한 랍비나 선생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예언자야... 큰 예언자가 우리 가운데 나타났어.”
그 말은 마치 물속에 돌을 던지듯 사람들 사이로 번져나갔다. 말은 말로 이어졌고, 수군거림은 곧 고백처럼 바뀌었다.
“하느님이... 우리 백성을 다시 찾아오신 거야.”
그날 이후, 그 이야기는 성문을 지나 마을을 떠났고, 이웃 마을의 장터와 회당, 그리고 유대 땅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죽음에서 생명이 일어났다는 소식, 그 중심에 ‘예수’라는 이름이 있다는 사실. 사람들은 그 이름을 속삭이듯 말했고, 또 어떤 이들은 조심스럽게 마음에 담았다. 누구는 여전히 두려움에 떨었고, 누구는 그날의 광경을 기적이라 불렀다.
“정말 살아났대. 눈을 떴다니까.”
“그냥 움직인 것도 아니고, 앉아서 말을 했대.”
“예수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젊은이야, 일어나라.’ 딱 그 말 한마디였대.”
사람들은 그 이름을 속삭이듯 말했고, 또 어떤 이들은 조심스럽게 마음에 담았다.
“내가 거기 있었으면 진짜 못 버텼을 거야. 나 같으면 도망쳤을지도 몰라.”
“근데 무섭기만 했으면, 이렇게 계속 생각나진 않을걸.”
하지만 그 장면을 눈앞에서 본 이들에게는, 단 하나의 진실만이 또렷하게 남았을 것이다. 누군가가 절망의 끝에서, 말없이 울던 이의 삶을 되돌려놓았다는 것. 죽음을 넘어, 다시 사람을 어머니에게 되돌려주었다는 것. 그것이 그날의 가장 깊은 진동이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예루살렘에서 처음 예수의 이름을 들었던 그 날이 떠올랐다. 그때도 사람들의 눈빛은 비슷했다. 말보다 침묵이 많았고, 설명보다 여운이 길었다. 찾아온다는 말. 돌아온다는 말. 하느님이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는 이야기. 그 길은 높고 넓은 성전의 길도 아니었고, 랍비들의 눈에 띄는 회당 길도 아니었다. 무너진 집으로, 울고 있는 여인의 골목으로, 아무 희망도 남지 않은 작은 마을의 성문 앞까지. 그 발걸음은 늘 가장 낮고, 가장 눈물 많은 자리를 향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멈췄다. 기다린 것도, 스쳐 지나간 것도 아니었다.
그 자리에 ‘찾아왔다’.
그 고백은 단지 놀라운 기적을 보았기 때문에 생긴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느낀 건, 한 사람이 누군가의 울음을 멈추기 위해 자신의 걸음을 멈췄다는 사실. 그리고 말 한마디로 죽음을 밀어냈다는 충격이었다. 그 말은 의심이나 조건을 담은 설명이 아니라, 살리려는 마음에서 흘러나온 명령이었다.
“일어나라.”
죽은 자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사람들은 처음 보았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자꾸만 그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모두가 울고, 모두가 두려워했던 그 순간— 예수는 왜 그렇게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그 말을 했을까. 울지 말라고, 일어나라고. 그 두 문장은 어쩌면, 이 세상에 가장 오래 필요한 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따라다녔던 걸까.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있는 곳에 숨이 돌고, 눈물이 멈추고, 죽음이 물러나는 걸 느꼈기 때문에. 그는 희망처럼 걸어 다녔고, 말처럼 살아 움직였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다시 길을 걸었다. 그의 이름을 말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늘 약간의 떨림이 있었다.
마치 너무 밝은 빛을 본 사람처럼, 혹은 너무 조용한 침묵을 들은 사람처럼. 누군가는 끝까지 말하지 못했고, 누군가는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누구 하나, 그를 가볍게 말하는 이는 없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들을 따라
그의 이름을 조심스레 꺼내어 적는다. 그가 누구였는지를 아직 다 알지는 못하지만, 그가 걸었던 길과, 그 길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되짚으며 한 사람의 기억으로, 또 한 사람의 증언으로 조용히 그를 따라가 본다.
찾아온 사람.
눈물 속에 멈춰 선 사람.
말로 살려낸 사람.
그 이름 앞에서, 나의 펜도 잠시 멈춘다.
위의 글은 신약 성경 "누가복음 7:1-17"을 각색해서 쓴 글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성경책을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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