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력(他力)은 타력(打力)이다

담쟁이의 용기

by 김광훈 Kai H

도종환의 시 담쟁이가 있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숲 속을 산책하다 보면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담쟁이를 흔히 본다. 슬쩍 힘을 가해 나무로부터 분리해보려 하지만 어림도 없다. 어찌나 나무에 단단하게 붙어 있는지 마치 담쟁이에 흡착판이 곳곳에 달려 있는 듯하다. 담쟁이의 몸통(trunk)으론 한 뼘도 똑바로 설 수가 없다. 자신의 깜냥을 진작에 파악하곤 타력에 의존하기로 방침을 세운 게 분명하다.




한 때 <자기 계발서>가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은 적이 있었다. 국민 <성공시대>가 우리나라를 휩쓸었다. 자기 계발은 self-help를 말한다. 자신의 실력을 배양해 오롯이 자신의 힘만으로 성공하자는 얘기다. 미국에서도 한때 불었던 열풍이다. 취지는 좋으나 현실성이 결여된 탓인지 지금은 양국 모두 시들해진 상태다. 자기 계발보다 중요한 건 <사소한 용기>의 실천이다.


펭귄뿐만이 아니라 익사의 위험이 있는 걸 알면서도 경험 많은 순록의 암컷이 앞장서서 급류를 건너기 시작한다. 난 동물 학자는 아니지만, 그런 순록은 순록 사회에서 분명 극진한 존경을 받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의 시선에서 난 그걸 감지한다.


미국에서 인터넷 관련 스타트업으로 억만장자가 된 알렉시스 오헤니언은 대학 졸업 직후 피자가게의 웨이터로 잠시 일했다. 이후 법조계에서 일하려다 우연히 창업 관련 강연을 듣고 진로를 바꾼다. 그가 창업을 할 무렵은 여러 가지로 고통이 많은 시절이었다. 여자 친구는 사고로 5층 건물에서 추락해 의식을 잃은 상태로 병원에 누워있고 어머니는 뇌종양 말기 판정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는 시련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겠다는 각오를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


후에 그는 사업가로 로마의 한 호텔에 머물고 있다가 테니스의 여제인 세리나 윌리엄스와 우연히 만난다. 전날 과음으로 수영 장가에 놓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는데 그 옆자리에 세리나 일행이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하필 그 많은 자리 중에 자신들이 차지한 자리를 무단 점유한 키 196센티미터의 백인 남자를 쫓으려고 세리나 일행이 꾀를 냈다. 조금 전 쥐가 의자 밑을 지나갔다고. 그러자 알렉시스는 “저 원래 브루클린 출신이라 쥐는 늘 보고 지냅니다.”라고 넉살 좋게 대답했다. 이후 세리나가 알렉시스를 프렌치 오픈에 초대했고 뜻밖에 그가 응원하러 왔다. 그들은 연인이 되었고 결혼했으며 딸까지 두고 있다.




아무리 쉬워 보여도 맨 처음 하는 건 다 어렵다. 특히 초창기 인류는 전례가 없는 일을 해야 하니 더욱 어려웠을 것 같다. 새로운 방법이나 생각을 만들어 내고 개발하는 일은 육체와 정신 모두 버거운 일이다. 새롭고 낯선 땅에 이주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건 인간에게만 주어진 운명은 아니다. 식물이나 동물도 새로운 영역에 진출할 땐 필사적이다. 적응하지 못하면 멸종하니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창작도 관념적으로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암석을 뚫고 새로운 길을 내는 일과 비슷하며 그렇게 애써 뚫은 길로 독자를 초대하는 일이니 힘든 건 필연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작가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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