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과장으로 진급하기 전에 여러 가지 시험을 치렀다. 토익은 물론이고 업무 상식, 사시 사훈까지. 게다가 임원 면접까지 있었다. 은행에 대리로 진급하기 전에 고시가 있었다는데 그에 못지않았다. 대학 입시 공부도 별로 안 하던 내가 ‘생활인’이 되다 보니 평일 업무가 끝난 후뿐만 아니라 휴일도 없이 도서관에서 살았다. 시험이 끝나고 한 고위 임원이 “너야 뭘 걱정하냐?”라고 힌트를 주기 전까지는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평소엔 아무것도 아니었던 일들이 왜 그렇게 하고 싶었는지 진급 시험이 끝나면 하고 싶은 일 목록까지 작성했었다. 코비 19 팬데믹으로 인한 행동의 제약은 그때보다 더하다.
조금 있으면 서오릉의 까치수영에 파묻혀 한여름을 즐기던 그 고혹적인 문양의 나비가 돌아올 것이다. 아마도 올봄에 화려한 봄꽃과 함께 되돌아올 것을 기약하며 변신을 한 채 나무속으로 들어갔던 녀석들일 것이다. 포식자는 자연으로부터 특권을 부여받은 대신 겨울에도 쉬지 않고 일해야 살아남는 구도로 이루어졌다. 사자가 사냥하다 다쳐 제구실을 못하면 무리에 끼지 못한다. 그동안에 가족을 위해 기여한 눈부신 성과는 그저 옛 영화일 뿐이다. 강하고 온전한 자만이 생존할 수 있다는 소름이 오싹 돋을 정도로 냉정한 판단이 그들을 백수의 제왕으로 만들었다. 그렇지만 포식자의 정점에 있는 동물들은 효율성을 명분으로 주관적인 감정은 일체 배제하는 오류를 흔히 저지르곤 한다.
인간 사회도 마찬가지다. 방글라데시 등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들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사회적 스트레스 강도가 매우 높은 편이다. 적절한 경쟁은 발전의 원동력이다. 하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도달하면 여기저기 고장이 생긴다. 반면 나뭇잎을 주저 없이 모두 버린 나무는 광합성을 하는 수고로움 없이 사실상 봄까지 동면에 들어간 다. 그것이 포식자인 동물보다 식물이 훨씬 더 오래 지구 상에 살아남은 이유이고 생물의 존재량(총중량)도 수백 배에 이르는 비결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그동안 크고 중요한 일의 우월함에 대해 지속적으로 학습됐다. ‘숲을 보지 못한다’라는 말은 사소한 일에 매달리는 사람을 공격할 때 즐겨 사용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아한 생존을 위해 일도 좋지만, 모든 잎을 미련 없이 내려놓은 활엽수처럼 잠시 멈추고 사소한 것에도 마음을 쓰는 여유가 필요하다.
여성은 이런 점에서 탁월하다. 사소해 보이지만 중요한 것들을 잘 챙긴다. 전통적인 시각으로 보면 시시콜콜하다 할 수 있는 일까지 마음을 쓴다. 수만 년 동안 DNA 속에 있는 여성의 이런 본성은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의식하든 안 하든 그들은 사람의 마음속에 잘 파고든다. 일상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지 그들은 이미 알고 있다. 인류를 지탱해 온 사랑을 키운 것도 여성의 몫이다. 이 팬데믹을 정복하는 것도 결국은 여성이 해낼 것이다. 기술적인 부분은 혹시 남자가 맡을 수 있어도 든든한 버팀목은 여성이 될 것이 틀림없다. 사냥이 안되거나 농사를 망쳐 남자가 생을 포기하려 할 때마다 감싸고 위로하며 대비책을 세워 놓아 우리가 여태껏 생존했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갖는 기회로 삼아야
사실 개인 간에 일어나는 사랑은 남한산성 어느 돌 틈에 소리 없이 피었다 스러지는 야생화처럼 세상의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다. 그가 지든 말든 세상은 아무 일이 없었던 듯 평온한 일상으로 복귀하고 시간은 거침없이 흐른다.
중국의 유명한 박물관에 가보면 눈에 띄는 공통점이 있다. 유물 중 상당수는 당대 최고의 권력자가 자신이 통치하던 제후나 외국의 왕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다. 개인이나 국가 간에 친교를 쌓는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 선물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선물은 위력이 크다. 연인이 될 때 일어나는 가장 큰 변화는 상대에게 선물을 조건 없이 주는 것이다. 유한한 생명의 시간을 쪼개 축적한 자원을 나누는 것이니 어찌 보면 생명을 나누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은 함께하는 것이다. 가능하면 오랫동안 생존해 그의 곁에 머무는 것이 제일이다. 세상이 자신을 그저 도구로만 대하거나 배경을 모른 채 도덕성을 비난할 때 감연히 나서서 함께 맞서고 보호해 주는 것이 최고의 사랑이다. 연인이 세상의 장난감이 될 때 시동도 제대로 걸리지 않는 중고 할리 모터사이클을 타고 브루클린의 어두운 뒷골목으로 달려가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그뿐 아니라 대화가 항상 통하고 때로는 나의 두려움과 이기심의 배경까지도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최상이다. 남자의 처지에서 여성은 판도라의 상자이기도 하지만, 이 세계가 준 최고의 선물이다. 그녀가 포사나 양귀비 같은 경국지색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인간은 누구나 소우주의 모든 요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나이 드는 것이 좋은 것 중 하나는 무엇이 되고자 애쓸 필요도 고민할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추진력이나 열망이 식었다기보다는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분명히 구별할 줄 알게 되어서다. 인생에서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은 대부분 가까이 있다. 중요하기에 근처에 있는 것이다. 보이는 행복은 머지않아 한계를 드러내고 공허감만 더할 뿐이다. 한가로운 일이라고 치부해 버리기보다는 하찮아 보이는 것에도 시간과 관심을 나누어 그들을 한 번이라도 유심히 관찰해보자. 다른 세계가 보이고 모든 것이 하나의 질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피상적인 지식과 관계는 결국 슬픔의 원천임을 깨닫고 자칫 놓치기 쉬운 것들에도 관심을 돌릴 때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19 사태가 주는 뜻밖의 선물을 받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