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아프대 -4-
눈물은 나지 않았다. 엄마가 당장 죽은 것도 아니니까. 요즘은 의술이 좋아서 레이저로 정교하게 암세포만 제거한다고 한다. 피부에 칼 한 번 데지 않는 셈이다. 항암제는 말할 것도 없다. 병실에서 엄마와 나는 이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잠깐 정적이 흐를 땐 옆자리 환자의 병명을 맞춰보기도 했다.
엄마를 고장 난 자동차라고 부르던 노의사는 수시로 우리를 찾아왔다. 언뜻 보기엔 의사가 더 아픈 사람 같았다. 그 얘기를 엄마에게 해주니 배꼽을 잡고 웃었다. 웃으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암환자라고 모두 침울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어차피 암은 이겨내면 완치율 100%인 거라고 생각했다.
암보다 더 큰 문제는 가족들이었다. 나는 누나만 넷이다. 가족이기에 엄마가 암환자라는 것을 굳이 설명해야 했다. 엄마는 더 나중에 말하자고 했다. 나는 후폭풍이 너무 클걸 알기에 고개를 저었다.
금술 좋은 엄마 아빠는 오남매를 키워 냈다. 나는 막내아들이었고, 누나만 넷이었다. 아들 하나 보려고 벌어진 사단인걸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알지만, 부모님은 항상 처음부터 5명을 낳으려고 했다고 말한다. 그 말에 부흥하듯 모두 사랑으로 키워주셨고, 누구보다 엄마 아빠를 따르고 사랑하는 오남매였다.
차마 한 사람씩 통화해 엄마의 소식을 전하기가 힘들어 메시지를 남겼다.
엄마는 위암이고, 기수는 아직 몰라.
근데 혈액에도 문제가 있어, 어쩌면 백혈병일지도 몰라.
검사 결과는 2주 후에 나오니까, 내가 엄마를 보살필게.
내 그럴 줄 알았다. 결국 전화가 빗발쳤다. 엄마와 가장 많이 싸웠던 딸 순으로 전화가 왔다.
침착하게 '확실하냐'며 병명을 물어보는 첫째,
아빠는 알고 있냐고 묻는 둘째,
당장 서울에 있는 큰 병원으로 가자는 셋째,
울며불며 타지에서 운영하던 카페를 접고
고향으로 내려오겠다는 넷째 막내딸.
결국엔 모두 본인이 엄마랑 있겠다며 슬픈 억지를 부렸다. 누나들은 엄마가 곧 떠날 사람인 것처럼 울었다.
아직 정확한 검사 결과도 나오지 않았고, 못해도 2주일은 더 기다려야 했다. 나는 각자의 자리에서 잘 있어달라고 누나들에게 부탁했다.
아직 아빠에게는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엄마도 아빠가 걱정되는 모양이다. 엄마는 괜히 핸드폰 통화 목록을 만지작 거렸다. 통화 목록엔 아빠 밖에 없었다. 가족이 아프면 누구든 작은 우울증에 걸린다고 한다. 그게 어떤 느낌인지 정확히 알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발 묶인 죄수가 된 기분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보호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