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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관홍 Apr 22. 2021

저도 이만 내릴게요

일단 제 발로 걸어보려고요

"퇴사하고 뭐할 건데?"
"아, 별 다른 계획은 없고, 일단 나가려고요"


퇴사 소식을 들은 과장님이 물었다. 나는 정말로 솔직하게 대답했다. 계획 같은 건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여기서 내리고 싶다는 생각뿐이에요. 지금이 아니면 정말 안 될 것 같아요.


사람들은 퇴사하면 무엇을 할까?
다들 확실하거나 그럴싸한 계획이 있는 걸까? 


퇴사한 사람의 수만큼의 계획이 있겠지. 그런 건 물어보고 싶은 생각도, 찾아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강박적 완벽주의자라는 INFJ인 나는 (만 30세, 경기도민, 자차없음)는 그런 계획이 스스로를 괴롭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음을 순하게 먹고 구름 위를 걷듯이 무엇을 할지 생각해 보았다. 퇴사를 앞둔 나의 소박한 즐거움이었다.


    일단 6월까지는 재취업은 생각하지 않아야지. 

    6월이라는 기준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다. 

    재취업을 유예하고 싶은 마음이 크기 때문이겠지. 

    그렇다면 최소한 6월까지는 그 시간이 의미 있었다는 흔적을 남겨보자.


    집을 벗어나 새로운 환경에 나를 던져볼까?

    여행은 원래 좋아하지 않는다. 호캉스나 제주 일주일 살기를 떠올려 보았다. 

    굳이 지금부터 계획을 세우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훌쩍 어디론가 떠날 수 있는 정도의 용기와 실천력이 생겼으니까.


    언제나 실패했던 나만의 루틴을 만들어보자. 

    가만히 멈춰 서서 나를 들여다보고 나와 대화를 하자. 

    나에게 던진 질문이 나를 성숙하게 만들어 주겠지. 질문에 대한 정해진 답은 없다. 

    질문 안에서 사는 것이 중요하다. 

    답은 따라오는 것일 뿐.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퇴사를 한 기분이었다.




세상의 톱니바퀴는 끊임없이 돌아간다
내가 없어도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하나였다.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라는 트랙에서 일단 벗어나는 것. 트랙 위를 벗어나면 나에게 하루라는 시간이 오롯이 주어진다. 그 시간을 내 발로 걸어보고 싶었다. 어디론가 멀리 떠나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 않는 쉼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누가 시키거나 해보라고 권유하지 않는 나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일. 그렇게 스스로 한 걸음씩, 나만의 속도로 단 한달만이라도 지내보고 싶었다.


트랙에서 벗어난 지 한 달 정도 지났다. 어떤 날은 산책하는 기분처럼 천천히, 어떤 날은 악몽에서 깨어나듯 순식간에 마감되었다. 무작정 집 밖을 벗어나 도심 속 카페로 떠났다. 사람들은 각자의 시간축에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카페 안과 밖의 사람의 수만큼의 시간이 교차된다. 교차하는 시간의 흐름에서 나는 혼자 둥둥 떠있었다.




온라인 루틴 모임에 인증을 한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배우고 싶은 취미 강의를 듣는다. 가만히 앉아서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질문을 던진다.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러 나간다. 마음에 들어온 시 한 편을 필사한다. 내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기록한다. 하루 동안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 중 감사할 대상을 찾아 적는다. 더 이상 나를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나에게 말한다.


나는 읽고 쓰고, 다시 읽고 쓴다.
그렇게 변하고 있다.


나만의 시간축이 고유한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지금의 시간에 어떤 의미가 생길지는 알 수 없다. 스스로 걷고 있다는 감각이 좋다. 일단 나는 내 발로 걷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지금은 충분하다. 


특별한 도약이나 전환은 없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하반기에는 직장을 구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지 않을까. 내적 가능성을 탐구하여 다른 길의 시작을 찾을 만큼 유예기간이 충분한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뜻밖의 기회를 만나기 위해서는 지금 시간 안에서라도 구멍을 파보는 수밖에 없다. 직장에 속하여 일을 다시 시작하게 되더라도, 지금 시간의 감각들은 나를 다른 곳으로 이끌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내 발로 걸어보는 일은 불확실성의 가능성을 믿어보는 일이다.



*상단의 이미지 크레딧 - "Vladimir Zhirov/Shutterstoc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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