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다니던 피아노 학원에서 정기 연주회가 열렸다. 호기롭게 연주자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더 이상 자신감 없이 긴장하며 살기 싫다는 마음에서 저지른 패기였다. 피하고 싶은 상황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온몸을 던지고 나면, 당당하게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거라는 단단히 틀린 착각을 했다.
연주회 당일 날의 기억은 대부분 삭제되었다. 이름이 불려 앞으로 나간 순간부터 연주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올 때까지의 단 5분간의 기억. 그중 3분여간의 연주 시간은 필름을 편집하듯이 싹둑 잘라져 나갔다. 극도로 긴장하면 시야가 극단적으로 좁아지는 일은 영화적 표현인 줄로만 알았다. 의자에 앉아 악보를 간신히 바라보았다. 시야에는 악보 중앙에 흐릿한 테두리의 원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3분 남짓한 연주는 블랙아웃처럼 머릿속에서 도려내 졌다.
기억은 삭제되었지만, 세상에서 가장 삐걱거리는 피아노 연주였음을 자부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힘 좀 빼고 살자는 푸석푸석한 다짐을 했다.
집으로 향하는 7780번 버스의 뒷 좌석. <힘 빼기의 기술>이라는 책을 읽다가 책갈피를 꽂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언제나처럼 실패할 다짐이었다. 그때는 '굳은 다짐'을 마법처럼 여겼다.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나다움'을 보여주는 사람이 부러웠다. 바깥세상은 일종의 무대였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역할을 훌륭히 소화하는 배우였다. 무대 위의 나는 무언가를 뻣뻣하게 연기하고 있었다. 몸도 뻣뻣하고 마음도 그야말로 뻣뻣. 그렇게 ’ 지나가는 사람 1’은 잘 보이기 위한 어설픈 연기를 하고 있었다. 온몸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로.
카메라가 자신만 비춘다고 착각하기 때문이었다. 내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 내 행동이 어떻게 보일지, 매 순간이 긴장의 연속이다. 자의식이 만들어낸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라는 환상은 카메라의 렌즈가 얼굴 바로 앞에 있는 것과 같다. 카메라 렌즈에 비칠 모습은 영화처럼 자연스럽고 멋들어져야 했다. 그렇게 자신에게 높은 잣대를 들이대고 스스로를 채점하였다.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웠던 자신과의 거리. 그만큼 자의식의 크기는 비대해졌다. 비대해진 자아는 자기 파괴적이기에, 스스로를 과소평가하고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생각과 감정을 알아챌 수 있는 힘은 분명하게 삶의 균형을 잡는데 큰 도움이 된다. 자의식은 알아차리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감정의 모양을 알기 위하여 집착적으로 분석하다 보면 쉽게 그 감정에 휩쓸릴 수 있다는 점이다. 사과 크기 정도의 감정은 집요하게 건드리면 건드릴 수록 크기가 커져 수박보다 커지고, 방 안을 가득 채우게 되고 결국 우리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지게 된다. 우리는 이렇게 필요 이상으로 많은 시간, 많은 에너지를 들여서 인식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자기 자신을 과도하게 분석하려 들지 말자. 그저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자기 자신이니까 나를 알기 위해서 나를 실험실에 가둬놓고, 분석하고 해체하려 하지 말자.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과 어떻게 관계 맺을지'가 더 중요하다.
어설프고, 약하고, 상처 받기 쉽고, 실수하고, 우스꽝스러운 내 모습에 저항하지 말자. 그런 모습들 전부가 나를 이루는 조각들이다. 조각들을 알아차리고(Awareness),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Acceptance).
우리는 자기 자신과의 적절한 심리적 거리(Psychological Distance)를 유지해야만 한다.
더 이상 깊게 고민하지 말고 우선 행동하기로 하였다. 우리는 자신의 삶에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바로 실천해볼 수 있는 방법을 떠올려보았다.
우선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한 번이라도 더 생각해볼 수 있다. 그것을 표현하기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선물하기다. 선물은 선물 받을 사람이 어떤 것을 좋아할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짐작해보는 일이다. 나보다 다른 사람의 눈과 마음으로 한 번이라도 더 생각하는 것. 그렇게 나에게서 한 발짝 더 거리를 둘 수 있게 된다.
또 한 가지 방법은 감사 일기다. 무언가에 감사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나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인식해야 한다. 그것은 자신의 좁은 시야를 넓히는 일과 같다. 어떤 상황에서 우리는 한 대의 카메라만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수많은 카메라들은 각각의 앵글로 나를 포함한 세계를 찍는다. 그중, 자신과 지나치게 가까운 카메라는 더 이상 두지 않기로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는 명상이다. 명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관찰할 수 있게 된다. 왜 그런 생각이 들고, 무엇이 '문제'인지, 감정이 타당한지 과도하게 분석하지 않기로 한다. 그저, 관찰자로서 떠오르는 생각 구름과 감정의 바다를 적당한 거리에서 지켜보면 된다. 차분히 깊은숨을 들이마시면, 마음속 소란은 잦아들고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그동안의 나의 필름은 익스트림 클로즈 업(Extreme Close-Up), 클로즈 업(Close-Up) 그리고 바스트 샷(Bust Shot)이 대부분이었다. 앞으로 살면서 수많은 씬들을 찍게 될 것이다. 풀 샷, 롱 샷, 버드 아이 뷰(Bird-eye view; 부감)등 그 화면에는 나 이외에 다른 사람들도 있다. 세계는 나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만 한다.
눈앞에 들이댔던 카메라를 다른 사람도 들어오도록 돌려보기로 한다.
그리고 카메라 안에 담길 나를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봐주면 된다.
*상단의 그림 출처 - "Tim Eitel, <Interior with Crown (King)>,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