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런 홀링허스트, 『수영장 도서관』
최고의 동성애 문학이라는 평을 받는 앨런 홀링허스트의 『수영장 도서관』을 읽고 있는데, 오늘(6월 1일) ‘퀴어축제’가 열린다는 뉴스를 봤다. 의도한 건 아니다. 어쩌다 겹쳤을 뿐이다. 사실 어떤 이유로 오래 전부터 책상 한쪽 구석에 두었던 책인데, 이제 읽게 되었는데, 내가 생각한 그 이유를 책에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이렇게 퀴어 축제와 겹쳐 읽으니 오히려 그 의미가 생겼다고 할 수 있다.
읽는 내내 이 소설을 그대로 화면으로 옮긴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절대 그대로는 만들지 못할 것 같고, 만들더라도 어디서 상영하기가 정말 힘들 것이다란 건 거의 확신이다. 그런데 묘한 건, 이걸 활자로 읽는 데는 거부감이 거의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더욱 묘한 건, 남녀 간의 사랑 장면을 읽을 때면 드는 그런 기분이 이 소설에서 무수히 등장하는 사랑, 혹은 성교의 장면에서는 전혀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게 내가 이성애자라는 것은 분명하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래서 이 소설은 퇴폐적이고 저속한 것일까? 라고 묻는다면 ‘아니오’라고 대답할 수 있다. 내가 이 소설을 읽고, 어떠한 ‘더러운’ 느낌도 받지 못했는데(물론 ‘아름다운’ 느낌도 아니다) 소설이 더럽다고 평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퇴폐미’와 ‘퇴폐’는 큰 차이가 있다. <뉴욕 타임스 북 리뷰>의 평처럼 음란도 어쩌면 우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성은 등장하지 않는다. 전적으로 남성들의 세계다. 분명 의도적이다. 그런데 그 남성들의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남성들의 세계는 아니다. 남자들은 소설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반하고, 또 탐하고, 질투한다. 실제로는 상당히 마이너한 세계이지만, 이 소설에서만큼은 그들만이 살아가는 세계다. 이것도 살아가는 한 방식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마이너한 세계라는 것을 부정하고 싶었을까?
이 소설은 그냥 동성애를 보여주고 합리화하는 데만 집중하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소설은 동성애자들의 삶을 통해서 층층이 쌓인 권력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아주 멋진 외모를 가졌으며, 스스로 돈을 벌지 않더라도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귀족 집안의 20대 청년 윌리엄 벡위스도, 80대의 전직 식민지 관료 출신 찰스 낸트위치도 바로 그런 복합적인 권력의 구조 속에 놓여 있다.
전직 검찰총장이자 상원의원의 손자로서 누리는 사회적 지위(윌리엄 벡위스)나 영국의 식민지에서 제국주의 관료로서 마음껏 권력을 누리던 힘(찰스 낸트위치)은 그들이 사회적으로 보자면 권력의 최상층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윌리엄은 찰스의 일기를 읽으며 그의 동성애 성향에 공감을 한다. 하지만 찰스와 동료들의 제국주의자적인 행태에 비판적이고, 흑인에 대한 그의 자선적인 행동이 이율배반적이라고 여긴다. 그의 시각은 과거 제국주의 영국에 대한 새로운 세대의 비판이다. 그러나 윌리엄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동성애 상대로 늘 자신보다 어리고, 사회적으로 지위가 낮고, 유색인종의 남성을 고른다. 고른다기보다는 끌린다고 해야 할 지 모르지만, 그가 상대와의 관계에서 늘 힘을 가진 위치에 선다는 것은 ‘선택’한다고 하는 게 그리 틀린 말은 아니란 걸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흑인인 압둘이나 아르헨티나 출신 남성에게 ‘당하는’ 장면은 윌리엄을 비꼬는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그들의 사회적 지위는 높았지만, 절대적으로 다수자가 아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법적으로도 인정받지 못하는 성적 취향을 가진 이들이었다. 귀족이면서 식민지 관리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은 찰스였지만 1950년대에 동성애 때문에 붙잡혀 재판을 받고 6개월 징역을 살기도 한다. 그런 상황은 1980년대 들어서도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는다. 윌리엄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애인인 제임스가 함정 수사에 걸려 체포되고 재판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 그것을 분명하게 확인시켜 준다. 찰스가 징역을 살게 된 게 (당시 검찰총장이던) 윌리엄의 할아버지인 벡위스 경이 주도한 동성애 박해 때문이었다는 것은 이 소설에서 가장 아이러니하면서 중요한 이야기이지만, 동성애 문제가 단지 개인의 성적 취향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1980년대 영국의 이야기다.
지금 퀴어 축제가 열리고 있다는 뉴스와 함께(그러나 ‘서울광장 밖’에서), 반대 집회도 만만찮다는 뉴스도 올라온다. 혐오스럽다는 게 과연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본다. 우리가 본 것인가, 확인한 것인가, 그냥 들은 것인가, 상상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