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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맹만 비극인가

루스 렌들, 『활자 잔혹극』

by ENA


다음과 같은 굉장히 인상적인 문장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유니스 파치먼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


이 문장은 이 소설의 거의 모든 것을 표상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선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유니스 파치먼은 읽고 쓰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런 사실을 용케 감추며 살아왔다. 커버데일 일가의 로필드 홀에 가정부로 취직하면서 거짓말을 했고, 읽고 쓰지 못한다는 것을 감췄다. 글을 읽지 못하는 것이 드러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 온갖 방법을 썼다. 그리고 그것을 들키면서 일이 벌어졌다.


소설은 미리 결말을 이야기해놓고, 그게 어떻게 벌어졌는지를 되돌아보는 형식으로 쓰여졌다. 어쩌면 극적 긴장감을 풀어놓는 형식 같지만, 묘하게도 긴장감이 풀어지지 않는다. 사람 사이의 관계가, 상황이 팽팽하게 당겨진 상태로 끝을 향해 간다.


소설에서 가장 눈여겨보고, 생각하게 되는 부분은 뭐니뭐니 해도 ‘읽는다’는 것이 갖는 의미다. 유니스 파치먼은 단지 읽지 못하는 중년 여인이 아니다. 읽지 못함으로써 상상력마저 메말라 버렸다. 그러니까 활자와 인간성 사이에는 매우 끈덕진 연관이 있다는 얘기다.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가지는 데, 활자가 가지는 역할에 대해는 매리언 울프(『프루스트와 오징어』) 등이 잘 풀어놓았었다. 물론 오랫동안 활자를 아는 것이 특권이고, 문맹자가 다수를 차지해왔지만, 그래도 활자는 인간 사회의 필수 조건이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당연한 조건이 되어 버리기도 했다. 그걸 그냥 지적 능력과 관련짓는 게 아니라, 상상력과 인간성의 조건에까지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 이 소설의 설정이다.


그렇다고 유니스 파치먼에 대해서만 비판, 비난이 가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유니스 파치먼의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 자일즈이다. 늘 책을 읽는 그에게는 전혀 사회성이란 찾아볼 수 없다. 가족 대부분과 문장으로 된 대화를 나누지도 않으며, 글 속에 파묻혀 현실 세계에서 도피하고 있다. 작가는 자일즈에 대해서도 결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지 않는다. 어쩌면 활자와 문맹의 세계가 충돌하여 파국으로 가는 것처럼 그리고 있는 것이다.


또한 유니스 파치먼이라는 비인격적이고, 왜곡된 인간상을 그리면서도 그녀의 뛰어난 능력도 함께 그려내고 있다. 글을 읽지 못하는 대신 뛰어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을 보면 소크라테스가 문자를 비판했던 이유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소크라테스는 문자가 상상력과 지적 능력을 쇠퇴시킨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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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라고 한다면, 이 소설은 별 수 없이 문맹자에게는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이다. 활자에 익숙한, 아니 활자와 함께 살아가는 이들만이 활자를 인식하지 못하는 유니스 파치먼을 비난하거나, 혹은 불쌍하게 여길 수 있고, 그들만이 활자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살아가는 자일즈의 비인격적인 면을 찾아낼 수 있다. 책을 비판하고, 글자를 비판하고, 거기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인간을 비판하기 위해서도 어쨌든 글이라는 형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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