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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A Sep 23. 2024

타인과 역사를 알고, 이해한다는 것에 관한 질문

줄리언 반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미완성 프로젝트의 왕’ 닐은 두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 사람은 두 번의 이혼을 겪은 후 성인 대상 강의에서 만난 엘리자베스 핀치 교수이고, 또 한 사람은 핀치가 강의에서 이야기했던 로마의 황제 율리아누스다.


핀치는 무슨 사건이 벌어진 년도와 사실을 학생들을에게 주입하는 대신 간단한 질문으로부터 흥미로운 생각으로 발전시키는 강의를 한다. 그런 핀치를 닐은 흠모한다. 강의가 끝난 이후에도 20년 간이나 정기적으로 만나 식사를 하며 토론을 한다.


그러다 핀치는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다. 핀치는 유서를 통해 자신의 책과 노트를 닐에게 남긴다. 닐은 핀치의 노트를 읽으며 자신이 마무리짓지 못했던 과제를 이번만은 완성해보겠다고 결심한다. 그게 바로 ‘배교자 율리아누스’에 관한 에세이다.


‘소설’의 두 번째 장은 바로 고스란히 ‘배교자 율리아누스’에 관한 ‘닐’의 에세이다. 이 두 번째 장은 줄리언 반스가 애초에 《빨간 코트를 입은 남자》와 같은 논픽션을 계획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마지막 이교도 황제’, 핀치가 그의 죽음을 ‘역사가 잘못된 길로 접어든 순간’이라고 했다고 한 율리아누스의 삶과 죽음, 그리고 이후 그에 대한 평가가(그러니까 이것 자체를 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무려 80쪽 가까이 이어진다.


율리아누스가 죽고 한 세기가 지나고, 테오도레토스는 《교회사》에서 율리아누스가 죽으며 “그대가 이겼다, 오 갈릴리인어여.”라고 했다고 썼다. 그리고 1500년 후 시인 스윈번은 이것은 “그대가 이겼다, 오 창백한 갈릴리인이여”라고 고쳐 썼다. 닐은, 그러니까 줄리언 반스는 이것을 뛰어난 날조라고 한다. 역사가도 탁월한 소설가가 될 수 있다며.



그러나 율리아누스가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기독교를 공인하고 국교로 지정한 콘스탄티누스 이후 ‘부드럽게’ 기독교를 몰아내던 그가 갑작스럽게 죽음으로써 역사가 바뀌었다. 160쪽부터 161쪽까지 한 문단으로 이어지는 (율리아누스가 오래 살아 있었다면 벌어졌을) 대안의 역사는 일신교인 기독교가 유일하게 인정받는 종교로서 끼친 해악을 고발하고 있다. 한 부분만 보면 이렇다.


“오랜 그리스-로마의 방식들이 말짱하게 남아 있고 위대한 학문적 장서들이 파괴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 르네상스는 필요 없었을 것이다. (...) 엄청나게 강력한 국교의 강요로 인한 오랜 세월의 도덕적, 사회적 왜곡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성의 시대’가 도래했을 때 우리는 이미 그런 시대를 14세기 동안 살고 있었을 것이다. (...) 지난 1500년 동안 종교전쟁이 없었다고, 또 어쩌면 종교적 또는 인종적 박해도 없었을 것이라고 상상해 보라. 과학이 종교의 방해를 받지 않았다고 상상해 보라. (...)”


그러니까 줄리언 반스는 닐을 통해, 핀치를 통해 서양의 세계가 1500 동안 종교의 굴레에 묶여 행했던 역사를 생각하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비록 ‘배교자 율리아누스’에 관한 평론이 소설의 1/3이나 차지하지만 이것만이 줄리언 반스가 이 소설을 쓴 목적은 아니다. 닐이 핀치가 죽은 후 그의 오빠와 나눈 대화, 핀치의 노트에서 발견한 사실, 같이 강의를 들었던 안나와 만나 들은 이야기 등은 한 사람을 기억하는 방식에 관한 날카로운 통찰이다.


닐이 알고 있는 핀치는 그의 편협한 기억 속에 존재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게 전혀 근거 없고,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왜곡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기억하고 싶은 것을 기억했고, 회피하고 싶은 것은 잊었거나 아예 기억 속에 두지 않았다. 그것은 집단적 기억에 해당하는 역사도 마찬가지다. 닐은, 그러니까 줄리언 반스는 몇 차례나 국가도, 종교도 잘못된 기억을 갖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며 야유한다. 사실 줄리언 반스가 길게 쓴 율리아누스에 관한 평론도 바로 그런 의미다. 한 개인을 기억하는 것이 편의적이듯, 역사 역시 해석에 불과하다. 역사의 인물과 사건을 ‘알고’, 또 ‘이해하는’ 것은 개인을 이해하고 ‘알고’, 또 ‘이해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게 소설일까 싶지만, 존재하지 않는 인물을 통해, 그 인물을 기억하는 방식을 이야기하는 인물을 통해 만들어진 이 글을 소설이라 하지 않을 수는 없다. 다만 너무나도 지적인 소설일 뿐이다. 그게 줄리언 반스의 작품에 매혹당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떤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고 어떤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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