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루 질럴든, 『나는 점점 보이지 않는다』
저자는 어린 시절부터 시력에 문제가 있는 것을 느끼다 대학 들어 망막색소변성증 진단을 받는다. 조금씩 조금씩 꾸준하게 시력을 잃게 되는 병이다. 우리말 제목 그대로 ‘점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지금 저자에게는 5% 남짓의 시각이 남아 있다.
조금씩 시력을 잃어가는 저자는 어쩌면 인정하지 못했던 ‘눈먼 자들의 나라(The Country of the Blind, 이 책의 원제다)’로 들어가면서 이 책을 썼다. 법적 맹인의 지위를 얻고 지팡이를 펼친다. 가족들과 주변의 이해를 구하고, 앞으로의 삶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리고 ‘눈멂’의 철학적, 역사적 의미를 찾고, 눈멂을 비롯한 장애에 대한 상반되는 태도에 대해 깊게 고찰한다. 이 책은 그런 탐색과 고찰의 과정이다. 그의 시력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처럼 아직 끝나지 않은.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내용은 뜻밖에 알게 된 것들이다. 많은 현대의 기술들이 장애인들을 위해 개발되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휠체어 장애인들이 투쟁으로 얻어낸 건물들의 경사로(여기선 ‘커브 컷(curb cut)’이라고 한다)가 이제는 유모차나 카트를 미는 부모나 노인,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에게도 도움이 되었다. 류머티스성 관절염을 앓은 아들을 위해 개발한 수(水)치료 펌프는 이제 월풀 욕조로 발전되었다. 정보 기술은 더욱 그런 경로를 많이 거쳤다. 세계 최초의 타자기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고안한 것이며, 전자책의 표준인 EPUB는 1993년 시각장애인 기술자들이 처음 만든 것이다. 그밖에도 TV나 영화의 자막, 글자를 읽어내는 기술(OCR 기술) 등등 많은 기술들이 그렇다. 매우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을 위한 기술이 조금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더 많이 이용하는 기술이 된 것이다.
또 한 가지 인상 깊으면서, 헷갈리는 얘기도 있다. 바로 좁게는 ‘눈멂’, 넓혀서는 장애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어떤 쪽은 시각 장애를 중립적인 특징으로, 그것을 특별하게 여기면서 사람들의 연민이나 도움을 의도적으로 요청하는 것을 거부한다. 또 다른 쪽은 약점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에 대한 도움을 요청한다. 이것은 장애인들이 자신들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주변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런 장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 그런 이들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태도의 문제이기도 하다. 신체에 어떤 문제를 가진 사람을 무언가 부족한, 모자란 사람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그런 특징을 가진 사람으로 볼 것인지. 그래서 그들만을 위한 어떤 것을 만들어서 지원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평범한 사회의 일원으로 보고 무심하게 바라봐야 하는 것인지. 이런 장애에 관한 상반되는 태도가 더 큰 사회적 문제와도 연결되는 것을 이 책에서 접할 수 있다. 저자도 결론은 내리고 있지는 않지만, 도움만을 청하는 태도와 전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태도 그 사이 어디쯤 된다는 것쯤은 알 수 있다.
매년 한두 차례 시각을 잃은 사람을 곁에서 볼 때가 있다. 얘기를 나눠 본 적은 거의 없지만 며칠씩 근처에서 걷기도 하고, 근처 식탁에서 식사를 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식사를 어떻게 할까 궁금하기도 했다. 도와주는 사람이 옆에 있기도 하지만, 그들은 별 문제없이 식사를 한다는 것을 보고는 그들에 대한 관심이 거의 사라졌다. 자주 보면서 그들이 별 특별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자연스레 느껴진 셈이다. 그들에게 식당에서 움직이기 편한 자리를 미리 배정해주는 것과 그들을 특별한 시선(‘응시’)을 가지고 바라보지 않는 것 사이에는 큰 모순이 없다.
누구나 무언가 결핍되어 있고, 나이가 들면서는 그 결핍이 일상화된다. 그걸 장애, 혹은 불구(crip, 이 말이 퀴어(queer)라는 단어처럼 중립적이거나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는 재전유되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라고 부르지 않더라도 점점 불편한 세상에서 살아가게 마련이다. 그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인가에 따라 좋은 세상과 나쁜 세상이 나뉠 것이다. 물론 그 태도에 묘하게 어려운 지점이 있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