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킹, 『홀리』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을 보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착각으로 밝혀지지. 악에는 끝이 없어.”
코로나19의 상황이 소설 전체를 관통한다. 병원의 응급실이 넘쳐나고, 백신을 맞았는지를 서로 확인한 후에야 마스크를 벗고(혹은 그대로 쓰고 있거나), 코로나19를 부정하고, 나아가 백신 접종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고(특히 미국은 더 그랬다), 그러다 탐정 홀리의 어머니는 코로나19로 사망하고 만다. 이 팬데믹 상황이 소설에서 범죄나 해결에서 결정적인 설정은 아니지만, 인물들의 성격을 드러내는 데는 중요하다. 홀리가 혼자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다니게 된 것도, 결국은 파트너가 코로나19에 걸렸기 때문이다. 더 중요하게는 이런 설정이 소설을 더욱 현실감 있게 만드는 것이다. 스티븐 킹의 특기다. 소설이 현실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이 소설이 현실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이 소설에서 벌어지는 범죄도 현실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게 여기기에는 너무나도 참혹하기 기괴하지만 말이다.
코로나19로 어머니가 죽고, 파트너마저 입원하면서 탐정 사무소는 휴업 중인데, 홀리 기브니에게 한 여성으로부터 전화가 온다. 사라진 딸을 찾아달라는 호소. 경찰은 가출이라며 제대로 된 조사도 하지 않고 있다(정말 가출이라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처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조사를 시작한 홀리. 미심쩍은 점이 드러나고, 비슷하게 실종된 이들이 더 있다는 것을 알아낸다. 사건들의 연결 고리는 미미하지만, 희미한 흔적들을 더듬으며 아주 조금씩 조금씩 진실에 다가간다. 하나의 흐름은 이렇다.
하나의 흐름이 현재(2021년 7월)의 시점에서 탐정 홀리가 사건에 다가가는 것이라면 또 하나는 2012년부터 드문드문 이어지는 범죄의 흐름이다. 스티븐 킹은 이 사건이 누구에 의해 벌어지는지를 전혀 감추지 않았다. 첫 장에서부터 밝힌다. 인근 대학교의 명예 교수 부부. 남편은 생물학 및 영양학 교수이고, 아내는 영문학 교수다. 그들이 왜 속임수를 써서 사람을 기절시킨 후 지하실 철창에 가두고 생간을 먹으라고 강요하는지 처음에는 궁금하지만, 스티븐 킹은 그것도 금세 알려준다. 그들은 식인종이다.
이 두 흐름은 조금씩 간격을 좁혀가며 결국에는 만난다. 소설의 성패 여부는 그 만남에 이르는 지점까지 얼마나 긴장감을 고조시키느냐인데, 스티븐 킹이라면 충분히 기대할 만하고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는 이야기의 제왕이 아닌가.
소설에는 범죄와 범죄자를 쫓는 탐정의 이야기가 뼈대만 앙상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홀리와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괴로워하는 상황과 제롬과 바버라 오누이가 글쓰기의 재능을 발휘하면서 과거의 상처로부터 벗어나가는 과정(특히 바버라는 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물론 그게 단선적이 아니라 독자들을 애태우지만) 등등이 소설을 보다 섬세한 이야기로 만든다.
그리고 끝으로 또 한 가지. (너무 부차적인 얘기일지 모르지만) 동료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인용하고 있는데, 뭐랄까? 조금은 귀엽다는 느낌이 든다(여든을 바라보는 작가에게 할 얘기인가 싶기도 하지만). 특히 마이클 코넬리의 작품에서 보슈 형사를 인용하는 장면(“특히 그의 제1원칙을 사랑해 마지않는다. 퍼질러 앉아 있지 말고 문을 두드리고 다녀라.”)은 동료 작가에 대한 경의란 느낌도 든다. 코맥 매카시의 작품(예를 들어 『모두 다 예쁜 말들』, 『핓빛 자오선』을 언급하는 장면에서는 내가 조금 뿌듯해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