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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A Dec 06. 2024

계엄과 소설

폴 린치, 『예언자의 노래』

이 소설을 읽기 시작한 것은 12월 3일. 한 서른 쪼 가량 읽었을 즈음. 우연히 들여다본 휴대폰에 그 뉴스가 뜨기 시작했다. ‘비상계엄’.      


잠시 내가 소설을 읽다 보니 소설과 현실이 엉켜 있는 줄 착각했다. 아일랜드에 국민연합당이라는 극우 정당이 집권하고 비상대권법이라는, 말하자면 계엄을 선포하면서 한 가족에게 벌어지는 일을 쓰고 있는 소설을 읽으며 대한민국의 계엄 선포를 접하게 되다니... (심지어 다음에 읽을 책으로 이누히코 요모타의 『계엄』을 생각하고 있었다.)     


당연히 소설은 덮을 수밖에 없었다. 현실은 소설보다 비극적이지 않았지만, 내게는 더 엄중했다. 그러고 몇 시간 만에 그 개그스런(우습다는 얘기가 아니다. 너무 어처구니 없다는 얘기다) 쿠데타 시도가 무력화되고 나서야 다시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현실과 소설은 계속 겹쳐져서 눈을 어지럽혔다.      


소설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아일리시는 그 단조로운 생활에 행복이 숨어 있었음을, 행복은 보이면 안 되는 것처럼, 과거에서 들려오기 전까지는 들리지 않는 음(音『)처럼 가고 오는 매일 속에 깃들어 있었음을 깨닫는다.” (58쪽)     


그런 일상은 너무 허약하다. 그 일상을 지금까지 이루어내는 데 안간힘을 써왔지만, 그게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이다. 소설은, 행복했던 가정이 무너지는 과정은 정말로 아름다운 시적(詩的) 언어로 그려낸다. 시적 언어는 비극을 가리지 못하고, 너무 슬프게 만든다.      



분자생물학 박사 아일리시의 남편 래리는 교사이면서 교원노조의 부위원장이다. 비상대권법이 발효되고, 노조를 탄압하는 과정에서 시위에 나섰다. 사라진다. 그는 끝까지 돌아오지 못한다. 그저 아일리시의 상상과 염원 속에서만 등장한다.      


고등학생인 큰 아들은 열 일곱 살의 나이에 징집 위기에 처한다(얼마나 아이러니인가? 군인에게 붙잡혀간 아버지의 아들이 그 군인이 되어야 한다니). 첫째 아들은 반란군에 합류한다. 그 역시 연락이 두절된다. 역시 아일리시에게는 환영으로만 등장한다.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던 둘째 아들은 반란군과 정부군의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에서 머리에 부상을 입고 만다. 수술을 위해서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다 겨우 입원했지만 다음 날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아일리시는 군 병원에서 시체로 만난다. 고문의 흔적과 함께.      


아일리시는 탈출을 도와주겠다는 캐나다에 사는 동생의 제안을 거절했었지만, 이제는 탈출의 대열에 설 수밖에 없다. 십대 딸과 이제 겨우 걸어다니는 아들이 있기에, 어떻게는 살아남아야 하겠기에.      


작가 폴 린치는 시리아 내전과 그로 인해 벌어진 난민 문제, 그리고 난민에 대한 서구의 무관심을 비판하기 위해서 이 소설을 썼다고 했다. 그 지옥 같은 상황이 어디서든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기 위해서였으리라. 내가 발을 딛고 살아가고, 가족과 갈등을 겪으면서도 내일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상당히 높은 확률로 예상할 수 있는 삶, 아니 굳이 예상하지 않더라도 잘 살아갈 수 있는 생활이 얼마나 허약한 토대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 그게 어떻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폴 린치는 ‘예언’하고 있다. 소설은 자신의 나라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것을 어느 나라로 대입하더라도 하나도 다르지 않다. 대한민국은 더욱 더.      


오로지 2023년 부커상 수상작이라는 이유로 집어든 소설이다. 소설을 읽으며 현실에 몸서리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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