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티 캘러허, 『아름다운 것들의 추한 역사』
어떤 것이 아름다운 것인지에 대한 정의나 인식은 사회마다도 다르고, 개인마다도 다를지언정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는 거의 본성에 가깝다. 그것이 개인적인 본능에 의한 것이든, 아니면 사회적으로 주입된 것이든. 아름다운 것을 보면 가지고 싶고, 만져보고 싶고, 느끼고 싶어 한다. 그것이 내 것이 될 수 없고, 향유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자신에 대한 실망, 심지어는 혐오가 생기기도 한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케이티 캘러허의 『아름다운 것들의 추한 역사』는 바로 그런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을 잘 인식하게 한다. 저자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시작해서 역사를 그쳐 다시 현재와 자신으로 이어지는 스토리 라인은 저자의 자의식이 짙게 묻어 있다. 아름다움의 실체에 대해 객관적인 시선과 주관적인 느낌을 오가면서 아름다움이란 추구할 수밖에 없지만, 때로는 포기해야 하고, 어쩌면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아이러니한 속성을 낱낱이 폭로하고 있다.
저자가 아름다운 것들로 내세우는 것은 자신이 개인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던 것들이다: 거울, 꽃, 보석, 조개, 화장, 향수, 실크, 유리, 도자기, 대리석. 어쩌면 그것 자체로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것도 있다고 여길 수 있다. 자체로 아름답지 않더라도 최소한 아름다움을 드러내게 하는 수단이거나, 아름다움을 포장하는 재료가 되기도 하는 것들이다. 개인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이것들을 향한 욕망은 유구한 것들이다. 자본주의는 그것을 제도화하였고, 고도화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런 아름다움 것들에 대한 욕망은 자본주의만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제목에서도 보듯이 이 아름다운 것들은 이면에 추한 역사를 포함하고 있다.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착취, 값싼 노동력 착취, 제국주의적 침략, 부에 대한 비뚤어진 갈망 등등.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많은 우리들은 그것들을 추구한다. 가끔은 그 추한 이면을 인식할 때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을 거부한다. 그건 저자도 마찬가지다. 값비싼 보석을 가지고 싶어한다. 화장법을 다양하게 시도하고, 형편에 맞지 않는 실크 드레스를 고집하기도 했다. 취재를 통해 대리석으로 지어진 집을 보면서 부러워하지만 그것을 소유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해 크게 좌절하기도 한다. 그게 사람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 이면을 바라볼 줄 안다. 갖고 싶으면서도 가져서는 안 되는, 적어도 자제해야 하는 이유를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긴 하지만 인식의 여부는 무척이나 중요하다. 반성적 사고가 없이는 전혀 발전이 없다. 우리가 기후 변화를 염려하며 하는 한두 가지의 행동이 실제로는 별 영향을 주지 못하지만, 그런 흐름이 모여 정부와 기업의 정책과 행동을 변화시킬 수가 있다.
아름다운 것을 욕망할 수 있다. 욕망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을 혐오할 수도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