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새로운 글자의 풍경

유지원, 『글자 풍경』

by 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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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원의 『글자 풍경』을 다시 찾았다. 북디자이너들과의 인터뷰집 전가경의 『펼친 면의 대화』를 읽고 나서 생각났다. 『펼친 면의 대화』는 책 전체의 디자인에 대한 얘기지만, 글자체에 대한 내용도 많다.


4, 5년 만에 읽었는데, 마치 새로 읽는 느낌을 받았다(https://blog.naver.com/kwansooko/221518574768). 그 사이 내가 이 분야에 대해서 더 알게 된 것이 없다는 얘기일 수도 있고, 혹은 이 책의 내용이 그 동안에도 의미를 잃지 않았다는 얘기일 수도 있다. 특히 눈에 더 들어오는 것은 한글에 관한 내용들이다.


몇 가지 인상 깊은 부분만 추려 보면,


“폭이 좁고 어둡고 뽀죡한 독일의 글자들과 달리, 이탈리아의 글자들은 햇빛을 받아 몸을 활짝 폈다.” (27쪽)

글자가 ‘지역적 생태성’을 가진다는 얘기다. 보통 사람은 쉽게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유지원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명료하게 보인다. 그리고 다음의 정인지가 쓴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의 글은 처음 읽을 때는 미처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글이다.


“사방의 지역마다 자연의 풍토가 다르다.

따라서 지역마다 사람의 발성과 호흡도 달라진다.

그러니 언어가 달리지고, 이에 따라 글자 또한

서로 달라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억지로 같게 만들려고 하면 조화에 어긋난다.”


독일과 이탈리아 글자의 차이만큼이나 영국의 글자 역시 지역색을 나타내면서 인상적이다. 영국 런던의 글자는 “양 끝을 둥글린 직사각형”의 ‘길 산스’체다. 길 산스체를 만든 에릭 길의 스승 존스턴의 존스턴체를 보니 너무 정갈하다.


우리나라의 명조체가 바탕체가 되고, 고딕체가 돋움체로 명명되었다는 것은 왜 까먹고 있었을까? 나는 거의 모든 한글 문서는 ‘함초롬돋움체’로 쓰고, 가끔 ‘함초롬바탕체’를 쓴다. 그런데 내게는 ‘함초롬돋움체’가 마치 명조체처럼 여겨진다. 글자라는 게 참 보편적이지만, 또 개인적인 느낌이 강하다.


네덜란드 디자이너가 우리나라에 와서 청주고인쇄박물관에서 직접 우리나라 옛 인쇄 방법을 해보면서 했다는 감탄도 인상 깊다. 우리나라 금속활자는 구리의 조성이 매우 높단다. 구텐베르크 활자가 납이 주재료였다는 것과 대비된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것이 매우 비싸다는 얘기다. 이는 높은 수준의 금속 기술을 가졌다는 얘기이기도 한데, 또 금속활자 인쇄술이 오랫동안 국가 주도로 이뤄질 수 없었던 이유도 된다. 또 그는 인쇄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 놀랐다 한다. 인쇄기 도움 없이 문지르기 방식으로 인쇄하는 것이 우리나라 전통 인쇄술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이는 우리나라의 제지술이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역시 훌륭함의 이면에는 대량인쇄술이 발달에 대해서는 저해 요소가 되었다는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는 활자를 젓가락으로 집는다는 데 놀랐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내내 풀지 못한 숙제도 있다. 강의 자료 등을 만들 때 ppt의 글자체다. 영어만 쓰는 경우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 가지 폰트로 쓰면 되니까 말이다(난 ‘Courier’체를 쓴다. Arial이 Helvetica의 짝퉁이라는 글을 읽고 버렸다. Helvetica를 써 봤더니 좀 맞지 않았다). 그런데 한글과 영어를 함께 서야 하는 경우가 많다. 같은 폰트 사이즈로 쓰면 글자 크기가 맞지 않는다. 한글이 작아 보여 모든 글자마다 사이즈를 키우는 작업을 해야하는 불편함이 있다. 영어와 한글을 같은 글자체로 써도 되지만, 영어에서 마음에 드는 폰트와 한글에서 마음에 드는 폰트가 다르다. 서로 호응되면서 내 마음에 드는 폰트가 어디 없을까? 유지원씨도 이에 대해서는 해답을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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